아레나는 마음으로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아들이 잘못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초 단위의 근심과 좋은 것 해 먹이고 싶은 초 단위의 애정이 뒤따랐다. 나의 상황에 상관없이 머리 한구석을 아레나를 향해 항상 열어놓고 살았다는 얘기다. 10월호 아레나 218페이지에 실린 현대카드 정태영 대표의 인터뷰를 읽다가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그냥 24시간 뇌의 일부분을 비즈니스에 열어놓고 있으면 된다. 운동경기를 보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사람을 만나면서도 그 부분은 계속 돌고 있는 거지.” 외부에서 받은 영감을 비즈니스에 자연스럽게 접목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 문장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읽는 이도 있을 거다. 하지만 ‘봄에는 꽃피네’라는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소월처럼 시로 옮길 수 있는 자, 과연 몇인가. 24시간 뇌의 일부를 비즈니스에 열어놓으라는 자연스러운 결론은 늘 나의 스태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다. 항상 뇌의 일부를 일을 향해 열어놓는 것. 그리하여 오감 신경이 반응해 만들어낸 데이터들이 자연스럽게 일의 결과물로 도출되는 것. 이건 실상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다. 애정의 문제다. 연애를 하는 것처럼 일이 좋으면 뇌의 일부가 스스로 열린다. 이건 지긋지긋한 직업 전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즐겁고 신나는 직업 전선에 대한 이야기다. ‘24시간 일 생각만 한다고? 헐.’ 그런 일차원적인 접근으로 받아들였다면 당신, 일 잘하기는 글렀다. 뇌의 일부가 일을 향해 24시간 열린다는 건, 그게 부담과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열린 거라면, 당신은 복이 넘치는 자다. 은혜로운 자다. 그러니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는 선배들의 말은 직업인의 화두가 된다.
후배들에게 종종 묻는다. “요즘 좋냐?”
헬레니즘은 우리에게 ‘인간은 인간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화두를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과 감각의 뇌를 24시간 열어두고 있어야 하는 직업인에게 헬레니즘적인 사고는 위안이 된다. 그리스 신화를 근거로 하자면 인간은 신과 닮았고 신은 인간을 닮았다. 화도 내고 싸우기도 하고 질투도 하는 신이란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므로 신을 향한 맹목적 순정은 사라진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논리’라는 단어가 화두인 헬레니즘은 그래서 현시대 직업인에게 친숙하다. 나는 직장이, 특히 잡지를 만드는 아레나 편집부가 논리로 무장했으면 좋겠다. 한 우물만 파는 의리 있는 직장인이 뭉친 조직이었으면 좋겠다. 결국 조직의 이야기를 할 거면서 헬레니즘 운운한 건 좀 너무했다 싶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다. 이게 바로 졸음의 힘이다. 지금 난 이성을 일깨우느라 잠의 분비물을 커피로 억누르고 있는 중이다.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직장 생활엔 헤브라이즘의 종교적 맹목적은 없다는 거다. 직장이란 목적과 목적이 유기적으로 봉합된 조직이다. 창의 정신과 감성 경영을 강조하지만 그 밑바닥 깊숙이 자리 잡은 건 ‘논리와 이성’일 뿐이라는 거다. 결국 돈 받고 다니는 직장이니까. 그러니 24시간 즐겁게 일을 향해 뇌를 개방하되 죽음을 앞둔 노모처럼 굴지는 말자는 거다. 제우스가 형제들과 힘을 합쳐 아비를 몰아낸 후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 되고 누이인 헤라를 아내로 삼고 형제인 포세이돈에게 바다를 정략적으로 나눠주고... 이런 일련의 순환은 지금 여기, 직장이라는 조직, 더 넓게는 인간 사회의 일상이다. 결국 세상은 그렇고 그런 곳이다. 수만 년 전 조상들이 신화를 통해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건 나와 너다. 24시간 일을 향해 정신을 열어놓는 게 모략과 암투와 탐욕에 의한 게 아니라면. 우리는 ‘그렇고 그런’ 세상의 ‘그렇고 그렇지 않은’ 족속이 된 거다.
이긴 거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나는 매끈한 결론으로 글의 마지막을 붙잡지 못한다. 10월 편집장의 글을 이 미완의 문장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집중해야 하는 데 졸음과 피로와 공상이 총출동한다. 몸의 혈액이 끈적이며 느리게 혈관을 도는 느낌이다. 하지만 컨펌을 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래, 컨펌하자. 이제 모든 지면은 내 손을 떠나 인쇄기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 결국 이 순간 나는 월간미술 이건수 편집장의 글을 인용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아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얼마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를 거다. 글은 가깝고도 멀다. 글은 현학의 머리로 혹은 경험의 몸으로 쓰게 된다. 다음 문장은 몸으로 쓰는 글에 대한 이야기다. 몸으로 쓰는 문장은 치장할 수 없으니 맨살 그대로다. ‘편집장의 글’을 쓰는 심경을 기술한 아래 문장을 볼을 비비는 가족의 심정으로 읽었었다.
쓰고 싶은 글이 있고 써야 할 글이 있다. 기자는 대부분 후자의 굴레에 매여 있다. 그래서 결국 월간지 편집장의 에디토리얼(편집장의 글)이라는 것은 격전의 최후에 써야 하는 유언 같은 글이 된다.
중략
피곤에 피곤이 쌓인 새벽, 자판 두드릴 힘조차 없고, 머릿속의 생각이 더는 굴러가지 않으려 할 때, 다시 말해 머리로 쓰지 못하고 몸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글이 바로 에디토리얼이다. 그러므로 나의 에디토리얼은 최후에 쓰는 가장 비논리적이고 육체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글은 결국 내 것이 아니라고 포기하는 순간, 끝나고 완성되는 것이다. 때문에 마치 조각가나 화가의 ‘미완의 완성’처럼 늘 아쉬움이 남았다.
- 미술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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