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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들

감격스런 찰나와 4년의 시간 사이엔 환호와 눈물과 탄식이 그리고 위로가 있었다. 6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런던 올림픽의 위대한 순간을 그렸고, <아레나>가 헌사를 달았다

UpdatedOn September 10, 2012




양학선 +    ILLUSTRATION 류희룡
결선 1차 시기, 양학선은 자신의 이름을 딴 기술 ‘양 1’을 신청했다. 공중에서 1080도를 회전한 후 착지했다. 두 걸음을 전진했다. 하지만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돌고도
착지할 수 있는 건 우주에서 양학선뿐이다. KBS의 여홍철 해설위원은 괜찮다고 말했다. 진심이 아니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양학선의 점수는 16.466이었다. 1등이었다. 물론 여홍철도 알았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여홍철은 도마의 최강자였다. 결선 1차 시기를 마쳤을 때 그의 이름은 전광판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2차 시기를
마쳤을 때는 그의 이름 위에 한 명의 이름이 생겼다. 그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기술 ‘여 2’를 뛰었다. 양학선의 결선 2차 시기가 끝났을 때 그와 코칭 스태프는 전광판을 보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과 관중도 마찬가지였다.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 모두 최강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조준호 +    ILLUSTRATION 이우식
조준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포효했다. 포효는 짧았지만 깊게 울렸다. 조준호는 패자부활전에서 이겼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겼다. 그는 관중과
심판들에게 승리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메달의 색은 의미가 없었다. 남자 유도 66kg급 8강전에서 조준호는 일본의 에비누마 마사시와 붙어 처음에 이겼고 나중에 졌다. 경기는 한 번을 치렀지만 심판은 판정을 두 번 했다. 심판 전원이 조준호의 승리를 알리는 깃발을 들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나왔다. 관중석은
일본인이 채우고 있었다. 심판위원장은 심판들에게 판정을 다시 내리라고 명령했다. 조준호가 졌다. 심판위원장 후안 카를로스 바르코스는 일본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유도 정신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도 정신은 조준호의 포효 속에 있었다.

 

김지연 +    ILLUSTRATION 유연호
김지연은 메달 후보가 아니었다. 8강전에서 그녀는 세계 랭킹 4위인 그리스의 바실리키 부지우카를 이겼다. 역전승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진 이어서 일어날 일을 정확히 예측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자 사브르 세계 최강 미국의 마리엘 자구니스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녀는 이번 올림픽 개막식에서 미국 팀의 기수를
맡았다. 지난 올림픽에선 이 종목에서 우승했다. 2연패를 눈앞에 둔 4강전에서 김지연을 만났다. 1엔드에서만 6점을 앞섰다. 누구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15대13으로 경기가 끝났다. 13이 마리엘 자구니스의 점수였다. 김지연이 결승에 올라갔다. 상대는 세계 랭킹 2위인 러시아의 소피아 벨리카야였다. 경기는 15대9로 끝났다. 9가 소피아 벨리카야의 점수였다. 펜싱 사브르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한국 여자 선수가 올라갔다. 그 현실을 상상한 사람은 단연코 없었다.

 

박태환 +    ILLUSTRATION 장재훈
박태환을 주시하던 많은 눈들이 있었다. 잘하길 바라는 눈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눈도 있었다. 그러나 한 명의 심판을 제외하곤 박태환이 왜 실격을
당해야 하는지 몰랐다. 경기를 중계하던 방송사 해설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못 봤다.” 영국 공영방송 BBC에서 수영 해설을 하던 이언 소프가 말했다. 박태환의 입수 장면은 TV 화면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반복되었다. 판정은 번복되었고 심판의 일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선수에겐 바로잡히지
않는 것이 있다. 그 불가항력을 견뎌내기 위해 삶의 대부분을 물속에서 지낸 건 아니다.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전,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서 있던 청년은 매일 그래 왔듯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것만이 지나온 시간을 미래로 잇는 길이라고 믿어서.

 


오진혁 +    ILLUSTRATION 김윤재
오진혁은 형이었다. 세계 최강자인 임동현보다는 다섯 살이 많고, 대표팀 막내인 김법민보다는 열 살이 많다. 활은 동생들이 더 잘 쐈다.
임동현은 걸핏하면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김법민은 한국 양궁을 짊어질 기대주로 각광받았다. 남자 양궁 단체전은 미국에게 패해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남자 양궁 개인전 16강에서 에이스 임동현이 탈락했다. 8강에선 김법민이 탈락했다. 형만 남았다. 형은 김법민에게 역전승한 중국의 다이샤오샹과 4강에서 붙었다.
역전승으로 이겼다. 결승에서 만난 일본 선수는 오진혁의 적수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형의 적수는 못 됐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한국 남자 양궁이
올림픽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딴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남자의 승리이기 이전에 형의 승리였다.

 

김재범 +    ILLUSTRATION 김상인
김재범은 몸을 대가로 시간을 견뎠다. 그의 몸은 성한 데가 없었다. 그는 금메달을 딴 이후의 날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살았다. 그에게는 오직
하루만이 있었다. 김재범은 간절함으로 버텼고 간절함으로 이겼다. 베이징 올림픽 때 그는 은메달을 땄다. 그에겐 의미 없는 메달이었다. 당시 그는
이원희, 왕기춘과 같은 73kg급이었지만 올림픽에 출전해 최강자가 되기 위해 81kg으로 체급을 올렸다. 갑자기 등장한 김재범 때문에 국가대표에서 탈락한 건
이번 올림픽 유도 90kg에서 금메달을 딴 송대남이었다. 김재범 때문에 송대남도 체중을 올렸다. 김재범은 4년 전에 자신에게 유일한 패배를 남긴
독일의 올레 비쇼프를 결승전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마땅한 영광이 그에게 찾아왔다. 몸에게 바치는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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