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 스탠딩 칼라 셔츠·성글게 짠 캐멀색 캐시미어 니트·어두운 갈색 바지·롱부츠 모두 구찌 제품.
(여자) 숄이 달린 캐멀색 원피스 구찌 제품.
“인터뷰 먼저 할게요.” 귀찮은 일부터 해치우겠다는 듯 이정재가 말했다. 스튜디오로 들어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직후였다. 보통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만진 후 옷을 갈아입고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감탄하는 중이었다. 곧 마흔이 될 남자가 일곱 살이나 어리고 심지어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미남’이란 소리를 듣는 남자보다 멋있다는 점에 대해. 그건 반칙 아닌가? 인터뷰를 먼저 하는 것도 반칙 아닌가? 하지만 이정재는 여유 있게 걸었다. 한 손에 아메리카노 잔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셔츠 단추는 두 개나 풀고, 멋있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이 많은 형한테 지는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전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그는 웃었다. 어차피 선택은 그가 하는 것이다.
감색 카디건·벨벳 소재 꽃무늬 재킷·감색 바지·술 장식 스카프 모두 구찌 제품.
청바지에 셔츠만 걸쳤을 뿐인데 왜 멋있지? 난 이런 느낌이 안 나는데.
에이, 뭘.
<도둑들>을 <아레나> 기자 11명이 다 같이 가서 봤다.
어쩐 일로?
시사회 갔다 온 영화 담당 기자가 너무 재밌다고 하기에. 결국 그 기자는 두 번 보게 됐지.
아, 그래?
맡은 배역이 ‘뽀빠이’라고 해서 살도 찌우고 울퉁불퉁 근육을 자랑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르고 스타일리시했다. 배역 준비할 때 어떤 이미지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텐데, 그 과정이 궁금하다.
만화에서 뽀빠이는 정의롭고 의협심 있는 캐릭터다. 근데 <도둑들>의 뽀빠이는 물욕이 강하다. 뭘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앞뒤 보지 않고 배신도 하는 뭐 그런 캐릭터라, 뽀빠이라는 이름만 사용하자는 게 우리 생각이었다. 만화 속 뽀빠이처럼 해군 문신을 할까, 몸을 불릴까 이런 얘기도 많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차이가 반전을 극적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뽀빠이가 아니어서 더 당혹스러웠던 거다.
그렇지. 사실 연기는 ‘이렇게 하면 되겠어’ 하는 감이 왔다. 그래서 어렵지 않았다. ‘룩’을 정하는 게 어려웠다. 뭘 해도 어느 영화에서 누가 하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과거에 내가 다른 작품에서 했던 거랑 비슷한 것도 같았고. 예전에는 패션을 연기의 요소로 잘 활용하는 배우가 많지 않았는데 요새는 많다. 영화에 어울리면서 너무 패셔너블하진 않은, 타협점을 찾다, 날씬하게 살을 빼고, 머리는 짧게 깎고, 콧수염 붙여보니 근래 한국 영화에서 못 본 룩이 나왔다. 관객에게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뽀빠이보다 이런 게 더 좋아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캐릭터는 악하게만 그리면 사랑을 못 받고 금방 잊히니까, 약간 허술하고 얼빵하게 설정했다. 악역이지만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만든 거지.
우리는 앉아서 2시간 보면 끝이지만 만드는 사람들은 고민할 게 많구나.
시나리오 보면 ‘아, 이런 헤어스타일을 하고 이런 콘셉트의 옷을 입고 이렇게 행동을 하면 되겠구나’ 하는 게 떠오르는데 <도둑들> 뽀빠이의 모습은 전혀 생각이 안 났다. 머리도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자르고 또 자르고 이렇게 또 해보고 계속 했다. 옷도 안 입어본 게 없을 정도다.
공 들인 만큼 <도둑들> 뽀빠이는 근래 한국 영화에 등장한 캐릭터 중 최고다. 악역이라는 게 결국 밝혀지지만 그럼에도 친근하고 멋있어서, 엉뚱하게, 아 도대체 이정재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인데 왜 안 늙지,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래서 방부제라도 씹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이정재도 늙긴 늙네.
그럼, 주름도 많이 생기고.
하지만 덜 늙는다! <모래시계> 백재희랑 다른 게 주름 몇 개밖에 없다! 그 사이 난 완전 아저씨가 됐는데!
계속 운동을 한다. 식단을 엄청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챙겨 먹어야 할 것들은 꼭 먹고. 나도 운동 안 하고 촬영 없을 때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술도 한잔씩 하면 얼굴이 바로 부해진다.
매일 정해놓은 만큼 운동을 하나?
촬영 때문에 못 할 때를 빼곤 거의 매일. 어쩔 수 없다. 이게 직업이니까.
<도둑들> 보면서 이정재는, 이런 얘기 간지럽지만, 배역에 자신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배역을 맞춘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전자가 옳다고 믿었는데 요즘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영화를 예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집어넣었지, 상업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지 않았다. 연기자가 작품에 맞추는 게 그때 분위기였다. 우리나라에선 1990년대 후반까지 그랬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대기업의 자본이라든가, 금융 자본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량 투입되면서 영화가 상업의 카테고리 안으로 이동했다. 영화가 상품이 됐다. 영화가 예술의 카테고리 안에 있을 때 배우는 아트 퍼포먼서였다. 무용수가 될 수 있고 가수가 될 수도 있는 예술인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상업의 영역에 들어오면서 배우 역시 상품이 됐다. 상품인 영화 안에서 연기자만 “나는 예술인이야” 하는 건 맞지 않거든. 연기자 고유의 캐릭터가 상품이 되는 시대가 온 거다. 지금은 옷에 몸을 맞추는 게 아니라 몸에 옷을 맞추는 게 자연스러운 풍토다. 강의하는 것 같네. 무척 이해가 잘되는 강의다.
감색 카디건·갈색 시어링 재킷·금색 라인이 들어간 감색 바지·실크 스카프·롱부츠 모두 구찌 제품.
우리가 당사자니까. 또 나 같은 경우는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해서 이제 20년 정도 했으니까 흘러가는 큰 흐름이 보인다. 신인일 때는 안 보였다. 그런데 이제 챕터가 한 장씩 넘어가는, 그런 움직임이 느껴진다. 옛날에는 감독들이 “액션 영화는 연기 못하고 연출 못하는 것들이나 찍는 거지” 이러셨다.
정말 그 정도였다고?
다 그러셨다. 다. 그래서 액션 영화나 로맨틱 코미디 찍는 분들도 ‘아이 씨, 나도 저런 거 한 번 해봐야지. 나도 예술 감독 소리 들어봐야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로 ‘아, 나도 좋은 작품 하나 해야 하는데’ 생각했다. 좋은 작품이라는 게 사실 모호하지. 흥행이 되는 게 좋은 작품인지, 아니면 문학 소설 같은 영화, 지루하지만 그런 영화가 좋은 작품인지. 영화 만드는 사람, 보는 사람, 평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들이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이게 맞느냐, 그게 맞느냐. 예전에는 그런 분위기였다. 요즘에는 그런 거 없다. 예술 영화, 상업 영화 이렇게 나누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난, 정치 하는 양반들이 어이없는 짓을 많이 해서 그런지 예술 영화를 못 보겠다. 때려 부수는 영화를 봐야 스트레스가 풀린다.
요즘엔 특히.
아까 대략 20년 동안 배우를 했다고 했듯, 지나온 자의 경험은 소중하다. 오늘 나도 뭔가 배웠다.
글쎄.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래를 만드는 것은 경험이 다소 적은, 젊은 사람들이다. 창의적이고 주장이 강하다. 그걸 밀어붙이는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옛날 얘기한다고 싫어하겠지만 드라마 <모래시계>를 TV 화면 1cm 앞에서 봤다. 그때 이후로 ‘백재희’가 어떤 작품을 했는지 떠올려보니 기억나는 게 <태양은 없다> <오! 브라더스>, 그리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태풍>, <도둑들>이었다. 의외로 몇 개 안 된다. 그래서 이번 작품 <도둑들>이 배우 본인에게 무척 기념비적일 것 같다.
글쎄. 흥행작이 되겠지. 배우에게는 데뷔작이 있고 출세작, 흥행작이 있다. 나는 <젊은 남자>가 데뷔작이고, <모래시계>가 출세작이다. 아끼는 작품은 <태양은 없다>고. <도둑들>은 흥행작이 될 거다. 그런데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 <도둑들>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도둑들>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정재라는 배우를 기억할 때 <도둑들>이 아니라 다른 작품을 떠올리겠지. 어차피 배우는 대중의 관심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나를 알리는 작업을 계속 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가 성장해서 영화를 보고 분석할 거니까 새로운 세대에게 우리를 계속 알려야 하는 거다.
얼마 전 종영한 <추적자>에서 박근형 아저씨가 연기하는 거 보고 좋았다. 나는 배우가 아니지만, 박근형 아저씨의 그런 모습이 후배 배우들에게 희망이 될 거 같았다. 이를테면 ‘나이 드는 게 꼭 슬픈 일만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나이 드는 걸 너무 억울해할 필요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계시다. 안성기 선배님 같은 경우는 아직도 멋있다. 박근형 선배님은 여전히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시고, 이순재 선배님은 변화무쌍하다. 충신으로 나오시다가 또 다른 사극에선 왕으로 나오시다가 어느 날 야동순재가 되고. 그 나이에 그렇게 변화무쌍하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아마 김수현 씨도 지금 이정재 선배님을 생각하며 ‘저 형은 왜 아직까지 저런 걸 해서 날 기죽이고 그래. 늙지도 않나. 이제 내가 해야 하는데’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 그만큼 자기도 더 오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얘기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사람들한테 “남자 배우 중에 누가 제일 잘생겼어?” 물으면 보통 장동건, 정우성을 꼽고, 한 명 더 이야기하면 이정재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되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나랑 내 주변 사람만 그랬나 보다. 또 이렇게 물을 때도 있다. “연기는 누가 제일 잘해?” 그러면 하정우, 김윤석, 그다음에 이정재, 뭐 이렇게 말한다. 이정재는 뭐랄까, 좋은데 조금 뭐랄까….
앞에 안 나오고 뒤에 나온다? 이런 거?
그렇다.
그런데 그런 게 안타깝다든가 혹은 ‘아, 씨. 어떻게 해서든 선두에 서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무의미하다고 해야 하나?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일은 스포츠 게임이 아니다. 동메달이 있고 은메달이 있고 금메달이 있는 경쟁 분야가 아니다. 표현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저 배우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느냐, 선택의 문제다. 대중이 좋아하는 컬러는 있다. 만약 옷이라고 한다면 양복을 살 때 어떤 색이 좋냐 물으면 보통 검은색, 회색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난 캐멀색 좋아,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 별로 없다. 그런데 캐멀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예 없어? 있다. 검은색의 느낌을 잘 내는 배우가 있는 반면 내가 어떤 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모르겠지만, 나 같은 색깔도 있어야 검은색이 존재할 수 있고, 여러 환경에 여러 색깔이 있으니까 조화를 이루고 비교도 할 수 있고, 표현 방법이 조금씩 다른 여러 면을 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름이 앞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
검은색 카디건·에드워디안 재킷· 검은색 바지·짙은 보라색 스카프 모두 구찌 제품.
(여자)꽃무늬의 살구색 실크 블라우스·캐멀색 통 넓은 팬츠·가느다란 위빙 벨트 모두 구찌 제품.
어른이구나.
어렸을 때는 나도 신경을 썼다. 스포츠 신문에 인기 순위가 나왔다. 그때는 <모래시계> 찍을 때니까 1위도 하고 상위권에 자주 있었다. 보면 좋지. 근데 요즘에는 그런 거에 의미를 두지도 않고 희열도 못 느낀다. 오히려 드라마라든가 영화를 다운받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사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사람들이 내가 나온 영화를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볼 텐데, 흥행이 잘됐다 안 됐다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콱 박히는 배우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평소의 인기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사람들의 취향이 다양해져서 이제 앞줄에 붙는 이름만 기억하는 시대가 아니다. 예전에는 앞줄에 이름이 있어야 관심을 가졌다. 요새는 독특하다든가 새로운 색깔이 있다든가 하는 배우에게도 관심을 갖는다. 신하균 씨 같은 경우가 좋은 예다. 단독 주연 배우는 아니지만 굉장히 좋은 배우, 굉장히 독특한 배우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그 점을 인정한다. 누가 1등이다 2등이다 이런 게 중요한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
그러면 이정재의 독특함은, 이정재의 캐멀색은 구체적으로 뭐냐 묻고 싶은데 안 묻겠다. 그건 이정재가 대답할 게 아닌 것 같다.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인 거 같다. 맞아, 그렇지.
유익한 수업이었다. 수업 마치기 전에 이정재 선생님께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 아까부터 담배를 손가락에 닿을 만큼 끝까지 태우던데 이유가 있나? 요즘 담배를 잘 안 피워서… 한 번 피울 때 아까워가지고….
이정재는 중지와 약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담배의 흔적을 지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담배을 피우듯 끝까지 태웠다. 무척 멋있는 모습이어서 어떤 여자든 이정재를 좋아한다면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질투할 필요가 없었다. 이정재는 어릴 때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알리 맥그로를 좋아했었다고 하는데 알리 맥그로가 50년만 늦게,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녀 역시 이정재를 좋아했을 거다. 그가 가고, 혼자 계속 그의 캐멀색을 생각했다. 보통 말만 그렇게 하고 생각 안 하는데 이번엔… 숙제 같았다. 누구라도 해야 할 숙제. 캐멀색을 찾는 건 결국 자아를 찾는 일이니까. 그리고 계속 이정재를 생각했다. 어떤 배우는 폭발할 것 같다. 어떤 배우는 온몸에서 빛이 나 정작 볼 게 없다. 어떤 배우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생각한다. 이정재는 후자인 것 같다…. 그런가? 다시 만나면 물어봐야지. 그도 자신의 캐멀색을 계속 생각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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