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오늘 신문 일 면엔 6.25 전사자 유해를 발굴한 국방부 감식단원의 거수경례 사진이 실렸다.
어제 신문 일 면엔 일본 자위대원들의 도쿄 시내 퍼레이드, 완전 무장한 그들의 사진이 실렸다.
요 며칠 전 신문 일 면엔 김정은 얼굴이 실렸다.
또 얼마 전 신문 일 면엔 일주일 내내 종북 논란의 정치인들만 내걸렸다.
시각언어의 힘은 얼마나 강력한지, 동공을 타고 뇌관에 천불을 지핀다. 작금이 일촉즉발의 전시 상황인 걸 나만 몰랐나 싶을 정도다. 신문을 벽에 붙이고 국민의례라도 해야 하는 건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불안을 강제하는 사진들은 대중의 안보 불감증을 꾸짖고 있다.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처럼 친절하고도 집요하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애국자라 자부한다.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한 사람으로 한국인만이 할 수 있다는 릴레이 야근의 선두 주자다. 나의 짧아진 밤잠이 국력을 증진하고 국방비 충당에도 일조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뿐인가. 부하 직원들의 예비군훈련, 동원훈련 통지서는 바로바로 컨펌한다. 원정 출산은 꿈도 안 꿔봤다. 아들 군대 뺄 생각은 아예 없다. 그런데 왜 뉘우~스 페이퍼는 새벽 이슬 맞은 곤봉이 되어 나를 꾸짖는가.
매카시즘의 잔영인지, 충성스런 대선 승리 전략인지를 논할 생각은 없다. 그저 행복한 데일리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어렵다. 불황의 전운이 감돈다. 유로존과 브릭스의 붕괴, 스페인 구제금융, 부동산 경기의 침체, 소비재 매출 급감.
내가 속한 패션 업계는 불황의 좌표다. 경기가 일렁이면 패션 업계는 출렁, 출렁인다. 0.1초 만에 나비효과를 맞는다. 낙폭도 크다. 상반기를 가슴 졸이며 보낸 패션 기업들은 한숨이 늘었다. 불황의 기운이 감돌면 누구나 비상식량 챙기듯 밑돈을 비축한다. 기름 값, 옷값을 억누르며 밑돈을 챙긴다. 지금이 그런 때다. 게다가 옷 판매엔 천운까지 따라야 한다. 올해처럼 봄이 어설프고 여름도 어설프고 비마저 안 오는, 그러니까 하늘이 옷 생산 주기율을 요리조리 피해가면 방법이 없다. 패션 업계의 봄은 잔인했고 여름은 쓸쓸하다. 특히 국내 브랜드의 상흔은 깊다. 천운도 안 따라주고 경기도 안 좋은데, 신무기를 장착한 해외 브랜드들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알투디투(R2D2)의 싸움처럼 허무한 일이다. 상업의 대성당인 백화점은 좌판이라도 깔아야 할 지경이라고 아우성이다. 이렇게 우리는 어렵다. 이런 우리에게 아침마다 반공, 멸공, 안보의 총탄을 날리는 건 야속한 일이다. 전운의 총구를 거두길 바란다. 그러지 않아도 생존을 위한 가미카제 특공대가 될 판인데 말이다.
온종일 다급했다.
다급한 진공 상태인 마감의 끝에 서서 생각한다. 편집부라는 명패를 단 이곳이야말로 세상을 등진 벙커 같다는 생각. 내가 완장을 차고 하는 일이란 반듯한 글을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것. 삭정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세상을 잊어도 되는 일. 눈과 뇌가 자음과 모음에 집중하고 또 집중하다 보면 무아지경에 이른다. 다급한 일이라 여겼는데 어느 순간 다행한 일이 된다. 이게 범민들이 사는 방식이다. 계몽하지 않아도 이기는 법을 안다. 잘 이기는 자는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땅에 발붙이고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도 승전고를 울릴 수 있는 게 우리다. 그러니 총구를 거두시라.
편집부라는 벙커에서 2012년 7월호 <아레나>의 마지막 원고를 넘긴다. 여기는 난공불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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