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소리는 피부와 몸통을 통해 느끼는 공감각적 영역 안에 있다. 백남준이 ‘음악의 전시’에서 밝혔듯이 공간은 소리를 풍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반쪽이다. 공간에 반응하며 공간을 장악하고 채운다. 그렇게 소리는 촉각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소리는 그렇게 만질 순 있지만 움켜잡을 수는 없다. 형상 없이 자유자재로 출몰하고 지나간다. 또 소리는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감각적 자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를 자극하고 감정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작용도 한다. 우리를 침잠시키고 동요시키고 그러다가 벌떡 일으켜 춤을 추게도 한다. 안리 살라의 작업엔 큰 소리가 작은 소리를 억압하고 외면하는 드라마틱한 감정적 구조가 있다. 하룬 미르자의 음향 장비들은 그 기능과 무관한 방식으로 빛에 반응하고 비트를 만들어낸다. 수잔 필립스는 가장 오래되고 친숙한 목소리라는 악기를 환경 속에 비치한다. 이렇게 소리가 그냥 단순히 소리로만 있을 수 없는 것, 그 탐구의 단면들을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오토모 요시히데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탐구한다. 빈 턴테이블이 만들어내는 소음의 협주곡은 그가 일본의 한 소도시 시민들과 진행한 퍼레이드나 작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진행하고 있는 페스티벌 후쿠시마를 떠올리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고 어디에나 갈 수 있는 방사선과 유사한 소리.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존감을 지키고 타인과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기능하는 소리, 그리고 함께 만들어내는 협연. 존 케이지와 백남준이 선취한 모든 관습적인 것을 거부한 소리를 이제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듣고 같이 연주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시장의 모든 소리들-작가들의 소리, 관람객들의 소리-은 전시작의 가벽을 뚫고 서로 간섭하며 하나의 커다란 앙상블을 이룬다.
동아시아에 한국이란 나라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르고 보통은 South Korea라고 한다. 거기에 이상한 소설을 쓰고 미심쩍은 시를 짓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하나같이 파스칼 키냐르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파스칼 키냐르를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그들이 모여서 파스칼 키냐르를 읽었다. 3월 13일 홍대 카페 커먼(common)에서.
파스칼 키냐르는 프랑스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 안다. 프랑스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문화와 문학의 나라. 보들레르와 랭보, 앙드레 지드와 프루스트의 나라다. 아직 모르겠다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알랭 드 보통의 나라다(물론 나는 미셸 우엘벡을 좋아한다). 그런 프랑스에서 파스칼 키냐르는 보석으로 불린다. 값나가는 보석이기에 많은 독자가 손가락에 끼진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빛난다. 파스칼 키냐르는 문학의 명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명품 참 좋아한다. 2012년 3월 파스칼 키냐르의 신작 <빌라 아말리아>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전에 <옛날에 대하여> <심연들> <세상의 모든 아침> 등의 작품을 냈다. 물론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산 사람들은 거의 환장했다. 프랑스 영화보다 독한 난이도에 프랑스 와인보다 진한 중독성을 그는 지녔다. 도전해보겠는가? 쉽진 않을 것이다(라고 겁을 주고 싶다. 키냐르를 너무 여럿이서 좋아하는 건 싫어!).
그날 홍대 카페 커먼에는 인디 밴드 대신에 시인과 소설가가 모였다. 시인 김소연과 김언, 소설가 한강과 정용준이 번역된 키냐르의 문장을 읊었다. 번역가(송의경, 류재하)와 연극 평론가(안치운)도 자리에 함께했다. 그러나 가장 중한 손님은 한국의 독자였다. 동아시아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거기에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아, 이것으로 우리나라는 충분히 훌륭하다. 모두 다 보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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