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마실 수 있는 술 중에 가장 대중적인 주종이 사케인데, 사케를 마시면 몸이 ‘알아서’ 달아오릅니다.
내가 상대를 달아오르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법대생 채은미는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는 중이다. 전화를 걸었을 때는 저녁 6시였고, 그는 누워 있었다. 혼자 누워 있는 거냐고 묻자 채은미는 웃었다. “오늘은 혼자 누워 있어요.” 섹스 칼럼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는 주제부터 알리는 것이 시간 절약에 도움이 되지만, 소중한 인터뷰이들을 잃지 않으려면 근황 토크는 필수다. 채은미에게 ‘졸업하고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뭔가··· 하긴 하겠죠? 일단 외국 나가서 살고 싶어요.” 채은미는 말끝을 흐렸지만 그가 가진 ‘명문대 간판’ 때문에 괜히 있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근황을 묻지 않고 이달의 주제를 알렸다.
섹스 전에 먹는 음식 이야기를 할 겁니다. “저는 뭐든 먹어야 해요. 무조건 ‘식후섹’.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저는 배고프면 기분이 안 좋거든요. 말만 걸어도 짜증 나고. 기분이 안 좋으면 섹스도 당기지 않잖아요.” 그럼 배가 불러야만 섹스가 시작되나요? “배가 부를 필요는 없어요. 고프지만 않으면 됩니다. 배가 고프면 속이 쓰리고, 속이 쓰리면 마음도 쓰려요.” 실제로 그랬던 경험이 있습니까? “제가 집에 와도 된다고 한 남자가 애매한 시간에 찾아왔어요. 오후 4시쯤? 저는 이른 아침 한 끼만 먹었던 터라 배가 고팠죠. 그 남자는 대놓고 ‘어서 하자’는 티를 냈지만, 저는 할 마음이 들지 않더라고요. 그저 배고프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남자가 그걸 눈치챘나요? “이미 몇 번 했던 남자라 금방 알아채고 집 앞 식당으로 데려가더라고요.” 내가 그 남자였다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 같지만, 당사자는 여유가 있었다. “그 남자는 원래 그런 인간이에요. 어떤 날은 집에 먹을 것도 없고, 늦은 저녁때라 식당도 다 닫은 적이 있어요. 그때 그 남자가 말했죠. 자기 거 먹으라고.” 그래서 먹었나요? “먹을 게 없으니까···.” 평소 그런 멘트를 좋아하는 편입니까? “서울말이었으면 별로였을 텐데 부산 억양으로 하니까 귀엽던데요?”
섹스 칼럼으로 채은미와 인터뷰를 나눌 때마다 그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메뉴를 묻기로 했다. “저는 깔끔하기만 하면 돼요. 술이든 음식이든.” 깔끔한 술, 깔끔한 음식은 뭔가요? “맥주는 더부룩하고, 위스키는 무거워요. 맥주는 탄산이 강하잖아요. 평소에도 탄산음료를 즐기지 않지만, 섹스 전에는 더 피하려고 해요. 정확히는 탄산 때문에 나오는 생리현상을 피하는 거죠.” 그렇다면 탄산이 없는 위스키는 왜 피할까? “찐득한 느낌이 싫어요. 취하기도 하고요.” 섹스할 때 취하는 걸 지양하는 편입니까? “취했을 때랑 취하지 않았을 때 하는 섹스는 각각 장단점이 있죠. 거친 맛이냐, 부드러운 맛이냐 차이인데요. 저는 둘 다 즐겨요. 이제 저 쉴게요. 재밌게 써주세요.”
매거진 에디터로 일하는 윤지성은 최근 은평구의 복층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그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종종 올리는 오피스텔은 근사했다. LP 플레이어, 커다란 거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 전경, 북유럽 특유의 미니멀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소파와 카펫까지. 지독한 취향의 공간이었다. 그런 그는 최근 2년 정도 만나온 연인과 이별했다. 금요일 밤 오피스텔로 초대할 여인이 사라진 남자라면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았다. 스마트폰 너머 윤지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했다. “제가 무슨 답변을 드리면 되나요?”
섹스 전에 술을 드시는 편입니까? “평소에 술을 즐겨 마시지만, 하기 전에 마시는 건 즐기지 않습니다.” 이유가 궁금했다. “늦게 싸게 됩니다. 너무 늦게.” 윤지성은 지루였다. 그는 술을 마시고 관계를 맺으면 결국 끝을 맺지 못한 채 잠들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남은 섹스는 아침에 합니다.” 남은 섹스는 뭡니까? “오로지 사정을 위한 섹스죠. 제가 사정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하는 여자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때는 아침에 일어나서 마무리합니다. 실제로 아침에 하는 게 더 좋기도 하고요.”
섹스 전 술을 마실 때도 있습니까? “어쩔 수 없이 마시는 날이 있죠. 오늘 섹스할 거라는 보장이 없을 때. 술이 있으면 어느 정도 가능성도 올라가니까요.” 윤지성은 지략가였다. 섹스를 할지 안 할지 모르는 여자와만 술을 마신다. “그나마 레드와인은 종종 마십니다. 화이트와인은 너무 깔끔해.” 윤지성은 나와 만날 땐 소주만 찾은 남자다. 왜 여자와는 소주를 마시지 않을까? “소주는 오히려 긴장감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확 취하니까. 그 알싸한 알코올 향 때문에 더 정신을 붙들게 되는 거죠. 하지만 와인은 ‘맛’이 있지 않습니까? 와인은 긴장감을 풀어줘요. 와인 자체의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주와 달리 와인은 인테리어 소품이 되거든요.”
윤지성이 말을 덧붙였다. “답을 정정하겠습니다. 저는 사케로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뜨겁게 마실 수 있는 술 중에 가장 대중적인 주종이 사케인데, 사케를 마시면 몸이 ‘알아서’ 달아오릅니다. 내가 상대를 달아오르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굳이 나서서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실내에서 마시는 사케는 조금만 마셔도 금방 뜨거워집니다. 무엇보다 제 경험상 사케는 마셔본 여자보다 안 마셔본 여자들이 많습니다. 호기심으로 쉽게 시작할 수 있죠. 마시면 자기 몸이 달아오른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입니다.”
사케를 마신다면 주로 일식당에 가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한식은 마늘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부담스럽습니다.” 일식엔 와사비가 있지 않습니까? “와사비는 늘 따로 나오잖아요. 마늘은 음식이랑 섞여 나오니 따로 빼내기가 힘들어요.” 그럼 섹스 전 식사는 일식이 최고겠군요 “사실 저는 배가 고프지만 않으면 됩니다. 배고프면 잘 서지도 않고, 힘만 듭니다.” 그럼 밥 먹지 않고는 안 합니까? “그건 또 아닙니다.”
취준생 유하경은 전날 소개팅을 했다. 기존에 만나던 남자와는 99일째 되던 날 헤어졌다. “이성적으로는 끌렸지만, 대화가 안 통했어요. 100일을 넘겨버리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느낌이라 그전에 말했죠.” 유하경은 철학과를 졸업했다. 실제로 철학적이고 친절하기까지 해서 인터뷰에 적극적이다. 이른 오후에 전화를 받은 유하경은 방금 일어난 참이었다. 그는 전날 사케와 와인을 마시고 숙취가 심하다고 했다. 섹스는 하지 않았다고. 유하경의 숙취 덕에 수월하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알코올 향의 키스를 좋아해요. 저는 술 마시고 하는 섹스를 즐겨요.” 알코올 향이 나려면 도수가 좀 있어야겠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셔요. 근데 저는 와인이 더 좋아요.” 왜일까? “위스키는 금방 취해요. 나는 대화하는 게 좋은데. 어차피 결국 섹스겠지만요.” 기억나는 대화 주제가 있나요? “와인의 3분의 1을 마실 때까지는 요즘 사는 얘기를 하고, 3분의 2를 마실 때는 자신의 속얘기, 혹은 좀 더 깊은 취향, 관심사, 철학 얘기를 하죠.” 그럼 남은 3분의 1은? “그래서 나랑 잘래?”가 되죠. 아무래도 대화하고 나면 좀 더 달아올라요. 마시고 바로 하면 달아오르기도 전에 끝나버리니까. 그래서 좀 더 길게 대화할 수 있는 와인이 좋아요.” 유하경은 혼자 사는 나를 부러워했다. “저도 제 집에서 술 먹고 싶어요. 본가라 그런 걸 못하고. 안전하고 문란하게 살려면 자취해야 하는데···.”
상대가 나를 가볍게 보진 않을까 걱정하진 않습니까? “저를 지적으로 보는 상대도 있고, 가볍게 보는 상대도 있어요. 나를 가볍게 볼 땐 ‘길티 플레저’처럼 해방감이나 일탈감에 젖어 오히려 섹스가 더 편하게 느껴져요. 그런 의미에서 술 마시고 하는 걸 더 즐겨요. ‘있어빌리티’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되잖아요.” ‘있어 보임’과 책임감(Responsibility)’를 합친 신조어란다. ‘있어 보여야 하는 책임감’이라. 나는 질문을 이어갔다. 섹스 전 선호하는 음식도 있습니까? “메뉴는 상관없지만, 이자카야 분위기가 좋아서 섹스할 상대와는 자주 이자카야에 갑니다. 저녁이면 아무리 관리해도 화장이 뜨잖아요. 곧 섹스할 상대와 새하얀 형광등 아래에서 식사하고 싶진 않아요. 이자카야에서는 옆사람과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작은 접시에 작은 음식을 먹잖아요. 자연스레 몸이 닿게 되고, 스마트폰은 보여주기 애매하니 안 보게 되고, 상대방에 더 집중하게 되죠.”
나의 자취 생활이 부럽다던 유하경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자취방에 놀러 온 남자에게는 어떤 술을 권할 것 같습니까? “집에서 마시다 남겨둔 위스키를 줄 거 같아요. 새 와인 따는 건 괜히 생색내는 것 같고. 간단한 캔맥주 정도도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술이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섹스할 건데.” 나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전날 소개팅은 잘됐냐고 물었다. “아니요. 제가 두부상인데 남자도 두부상이라 싫었어요. 나는 아랍상이 좋은데. 어제는 이자카야에 가고 와인까지 마셨는데도 영 마음이 안 생겼네요. 틴더를 해볼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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