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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처럼 되고 싶었다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은 생각한다. 어떤 남자로 살 것인가. 시대마다 길잡이가 되어준 이들이 있었다. 1960년대의 신성일이, 1970년대의 이소룡이, 1980년대의 주윤발이, 1990년대의 기무라 타쿠야가 그랬던 것처럼. 21세기에도 계보는 이어진다. 우리가 꿈꾼 그때 그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

UpdatedOn April 07, 2025

“<멋진 하루> 속 하정우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남자였다.
어쩌면 멋진 남자가 되는 것보다, 미워할 수 없는 남자가 되는 게 훨씬 멋진 일 아닐까.
하정우를 보며 생각했다.”


1990년대생인 내게 처음으로 남자의 길을 가르쳐준 건 두 태식이다. <해바라기>의 오태식과 <아저씨>의 차태식. 김래원은 돌아온 남자였다. 감옥에서 돌아온 남자. <해바라기>를 좋아했지만, ‘오태식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죄인이었으니까. 영화는 가석방된 오태식이 버스를 타고 자신이 살던 동네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딘가 어리숙한 그는 늘 몸에 메모장을 지니고 다닌다. 소망보다 다짐에 가까운 문장들. ‘호두과자 먹기’ ‘대중목욕탕 가서 목욕하기’ ‘선물하기’ ‘배 터지게 콜라 마시기’ ‘머리 염색하기’ ‘소풍 가기’. 오태식은 그저 남들처럼 사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 꿈은 이뤄질 리가 없다. 세상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

그런 오태식이 멋진 남자로 남은 건,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다짐 역시 실패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해바라기>는 새드 엔딩으로 끝난다. 오태식이 지키려 했던 사람들, 오태식으로부터 그들을 빼앗은 사람들, 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오태식까지 모두 죽는다. 하지만 우리는 ‘10년 동안 울면서 후회하고 다짐했던’ 오태식의 마지막 절규를 따라 하며 깨달았다. 무언가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가 멋진 남자라고. 김래원을 만난 적이 있다. 인터뷰이로 만난 그는 길을 가다 주저앉은 적이 있다고 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어서. 김래원은 촬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신이 품었던 감정을 떨치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 작품이 <해바라기>다. “<해바라기>에서는 지키고 싶은 가족을 잃고 자기 삶마저 포기하는 인물을 연기했잖아요. 그 감정을 고스란히 겪으면서 제 안에 무언가가 뿌리내리지 않았나 싶어요.” 그 시절 오태식은 우리뿐만 아니라 김래원에게도 깊은 뿌리를 내렸다.

영화 <아저씨>는 2010년 개봉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상영 등급은 청소년 관람불가였다. 하지만 검은색 정장에 권총을 든 원빈 포스터를 보자마자 ‘어떻게든 이 영화는 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와 친구들은 청소년처럼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복 차림으로 영화관에 도착하자 매표소 직원은 의심조차 하지 않고 티켓을 건넸다. 그리고 2시간 뒤,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생각했다. ‘나도 확 밀어버려?’ <아저씨>에서 원빈이 선보였던 ‘바리깡’ 신은 내게 <지구용사 벡터맨> 이후 가장 충격적인 ‘변신’ 장면이었다.

원빈은 남겨진 남자였다. 한때 차태식에게도 지키고 싶은 이들이 있었지만 모두 빼앗겼다. 아마도 차태식은 자신도 따라 죽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죽은 듯 살아간다. 차태식이 멋진 남자인 건 자신의 힘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칼 한 자루만 쥐여주면 범죄 조직 하나쯤은 순식간에 괴멸시킬 수 있지만, 동네 시장에서는 소시지를 만지작거리다 핀잔을 듣는 사람이었다. 원빈을 흠모한 적은 없다. 그는 유니콘에 가까웠으니까. 얼굴 랜덤 돌리기를 100번 해도 원빈 얼굴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차태식은 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2년 뒤 해병대에 지원한 것도 얼마간 차태식을 닮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물론 그곳에서 차태식의 단검술을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하정우는 미워할 수 없는 남자였다. 지금 인터넷에 ‘하정우 대표작’을 검색하면 몇몇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용서받지 못한 자> <추격자> <국가대표>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베를린> <암살> <신과 함께> <1987> 등등. 모두 훌륭한 영화지만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건 <멋진 하루>다. 하정우가 연기한 ‘병운’은 ‘지질남’ 그 자체였다. 직업도 잔고도 없는 그는 경마장을 배회하다 자신을 찾아온 전 여자친구 ‘희수(전도연)’와 조우한다. 그리고 발 앞에 떨어지는 한마디, “돈 갚아”. 헤어진 연인에게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면 ‘돈 갚아’ 아닐까. 병운은 기죽는 법이 없었다. 그는 1년 전 희수에게 빌린 350만원을 갚기 위해, 또다시 하루 종일 돈을 꾸러 다닌다. 그런 병운은 태평하기만 하다. 희수가 “너란 사람이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가 없다” 타박하면, “내가 조금 단순한 건 사실인데,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을걸?” 답하는 남자. “네가 상처 같은 거 받아본 적은 있어?” 질책하면, “너 끈 풀렸다 야. 누가 너 생각하나 본데?” 너스레 떠는 남자. <멋진 하루> 속 하정우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남자였다. 어쩌면 멋진 남자가 되는 것보다, 미워할 수 없는 남자가 되는 게 훨씬 멋진 일 아닐까. 하정우를 보며 생각했다.

류승범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고백하자면 학창 시절 남자 아이돌을 싫어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을 질투했다. 내가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남자들이 아니었으니까.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에 나올 것만 같은 이목구비, 동북아시아인의 체형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신체 비율. 내 학창 시절을 관통했던 ‘2세대 아이돌’은 ‘잘생긴 남자’에 대한 거부감만 키웠다. 그러던 와중에 <주먹이 운다>를 봤다. 류승범은 여기서도 양아치였다. <품행 제로>에서 불량 학생이었다면, <주먹이 운다>에서는 그냥 깡패였다. 결국 소년원에 들어간 류승범은 복싱을 배운다. 그 시절 류승범의 눈빛에 서렸던 독기를 잊지 못한다. 류승범이 하는 건 다 따라 하고 싶었다. 오래 다니지도 못할 복싱장에 등록했고, 네이버 검색창에 ‘주먹이 운다 류승범 머리’를 검색하기도 했다. <주먹이 운다>가 개봉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은 안다. 류승범이 멋있었던 건 류승범이니까 가능하다는 걸.

한석규는 다정한 남자였다. 지금도 왜 그때 그 영화를 봤는지는 모른다. 추석 연휴였고, 친척집에도 가지 않은 무료한 저녁이었다. 할 일 없이 넷플릭스 영화 목록을 넘기던 중 ‘그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8월의 크리스마스>. 몇 년 전 군산 여행에서 들른 ‘초원사진관’ 때문에 언젠가 한번 봐야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전형적인 신파극일 것 같아 미루던 차였다. 쓸데없는 기우였다. 경상도 남자 중고등학교에서 10대 절반을 보내면 이상한 편견이 생긴다. ‘상냥한 남자=느끼한 남자.’ 한석규는 달랐다. 그는 화가 나면 언성을 높이기보다 숨을 죽이는 남자였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있어 보이는 말’보다 ‘함께 웃을 수 있는 말’을 하는 남자였다. 그중 최고로 기억하는 건 목욕탕 앞 장면이다. 한석규와 심은하는 놀이동산에 간다. 거기서 청룡열차도 타고 아이스크림도 나눠 먹지만 한석규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헤어지기 아쉬웠던 두 남녀는 동네 운동장에서 숨이 턱끝에 찰 때까지 달리고 목욕탕에 간다. 목욕탕 입구에서 먼저 나와 기다리던 한석규는 심은하에게 몰래 사둔 귤을 건네며 말한다. “너 이거 먹을래?” 그때 지었던 한석규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아, 다정한 남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없구나.

유해진은 맛있게 먹는 남자였다. 어릴 때부터 식탁에서 늘 들었던 말이 있다. ‘잘 먹는 애들이 성격도 좋다.’ 유해진이 스크린에서 나와 만재도로 향했을 때, 우리는 뒤늦게 인간 유해진의 진가를 목격했다. 만재도는 에덴동산 같았다. 바깥양반이 사냥해오면, 안사람이 그 사냥물로 음식을 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따뜻한 음식을 나눠 먹는 곳. 유해진이 매일 낚시에 성공한 건 아니다. 그는 주방에서 핀잔이 쏟아질 때마다 너털웃음을 지었고, 어떤 음식이 나와도 밥그릇을 깨끗이 비울 줄 알았다. 유해진에게서 닮고 싶은 건 순박함이다. 한 인터뷰 자리에서 유해진은 진행자가 “순박함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아닙니까?”라고 질문하자 대답 대신 얼굴을 붉히는 남자였다. 유해진에게서 보았던 순박함은 흉내 낼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가 보여준 ‘무해함’은 본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남자로 살다 보면 결정해야 될 때가 온다. 어떤 남자로 살 것인가. 여전히 그 정답을 찾고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간 남자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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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주현욱

202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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