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린 토요일 저녁이면 너나 할 것 없이 TV 앞에 앉았다. <무한도전>을 보기 위해서다. 학교에서는 “어제 무도 봤어?”라는 말로 대화가 시작됐고, 방송에 나온 유행어는 곧 모두의 것이 되었다. 방송이 끝나면 실시간 검색어 1위는 <무한도전>이 장악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온갖 ‘무도 짤’과 패러디 영상이 쏟아졌다. <무한도전>은 곧 대한민국 청춘의 공용 유머 코드였고, 단순한 예능을 넘어서 한 시대를 아우르는 감각을 형성한 문화 현상이었다.
어느덧 <무한도전>이 종영한 지 7년이나 지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한도전>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개념을 정착시키며 한국 예능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방송 프로그램으로서의 유산은 현존하는 모든 예능 프로그램에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의 명장면은 지금도 쇼츠 영상이나 ‘짤’들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소비된다. 각종 사회 이슈가 생길 때마다 ‘없는 게 없는 무한도전’이라며 과거 에피소드들을 발굴하는 현상도 건재한 영향력의 방증이다. 이처럼 예능을 넘어 대한민국 방송 문화 전반에 큰 파급력을 끼친 <무한도전>이 남긴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그 시절 TV 앞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무도키즈’다. ‘무도키즈’란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무한도전>을 보며 성장한 청년 세대를 의미한다. 이들은 단순한 시청자를 넘어 <무한도전>의 유머 코드와 도전 정신을 내면화하며 10대, 20대를 보냈다.
2025년, 그 시절 TV 앞에 앉아 있던 ‘무도키즈’는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됐다. <무한도전>을 보고 방송계에 관심이 생겨 연예인이 되거나 제작자가 된 사례는 심심치 않게 듣지만, <무한도전>의 영향력이 방송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듯 ‘무도키즈’도 방송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무한도전>이 남긴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무한도전>이 심어준 도전 정신과 유머 감각을 가슴에 품은 ‘무도키즈’는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메달리스트 무도키즈
<무한도전> 팬이라면 큰 감동을 줬던 스포츠 특집들을 기억할 것이다. 특히 조정, 아이스하키, 복싱 등 비인기 스포츠 종목을 다룬 특집은 해당 종목만의 묘미를 알리면서 대중의 관심도를 대대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이 바로 봅슬레이에 도전한 ‘마지막 1분 특집’이다. 이 방송으로 인해 당시 환경이 열악했던 봅슬레이 종목이 크게 조명받았고, 훗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봅슬레이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로도 이어졌다.
실제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은메달리스트인 김동현 전 선수는 2009년 당시 “<무한도전> 멤버들과 함께 국가대표 도전에 나선 순간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2018 평창 특집’에서 어엿한 최고참 선수가 돼 다시 멤버들을 만났을 때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무한도전>이 심어준 도전 정신과 믿음,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은메달을 따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무한도전> 20주년을 맞이한 현재 그는 선수를 은퇴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무도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청각장애가 있어도 국가대표가 될 수 있구나” “포기하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됐다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받고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다방면에서 청각장애인에 대한 사회 인식을 개선하고 스포츠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피지컬: 100> 시즌 2에 참가한 것도 청각장애인을 비롯해 도전을 마주한 사람들이 본인처럼 용기 내 한계에 도전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한편 김동현 선수와 함께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종목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원윤종 전 선수는 2009년 <무한도전> 방송을 본 이후에 봅슬레이 선수가 됐다. 그는 ‘마지막 1분 특집’에서 진지하게 스포츠에 도전하고 감동을 선사하는 <무한도전> 멤버들을 보면서 감명받았고, 조금은 늦은 나이에 봅슬레이 국가대표에 도전할 용기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는 실제 국가대표 선수가 돼 ‘2018 평창 특집’에서 <무한도전> 멤버들과 함께 훈련하는 순간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지난해 13년 이어온 선수 생활을 마치고 공식적으 은퇴했다. 이젠 선수들을 지원하고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하는 스포츠 행정 활동에 새롭게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선수일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한 사람의 <무한도전> 팬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여전히 유튜브 등에 올라오는 콘텐츠를 즐겨 보고 있다”며 “방송은 오래전에 종영했지만 저를 포함한 대중은 지금도 <무한도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무한도전> 사랑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
“우리 주변에서도 ‘무도키즈’의 삶에 <무한도전>이
현재진행형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삶은 <무한도전>과 함께
우리 주변에서도 ‘무도키즈’의 삶에 <무한도전>이 현재진행형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대기업 보험사 18년 차인 윤관수 씨는 2010년 대학 시절 매주 챙겨 보던 <무한도전>의 ‘카레이싱 특집’ 시청 중 “온몸이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그는 운전면허도 없었지만 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운전의 매력을 알게 됐고, 그래서 굳이 어렵다는 1종 수동 면허를 땄다. 그때부터 언젠가는 스포츠카를 타고 서킷 주행을 경험해보고 싶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취업과 결혼, 아이들이 생기는 삶의 이벤트가 쉼없이 이어져 ‘무도키즈’의 꿈은 흐릿해지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자라고 생활이 안정되자 문득 잊고 있던 꿈이 생각났다. 2022년, 또 다른 ‘무도키즈’인 아내의 응원에 힘입어 ‘아빠의 현실 스포츠카’ 현대 아반떼 N을 구입해 이제야 수동 운전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 출퇴근에도 아반떼 N을 이용하고, 주말에는 서울 경기 근교에서 레이서 감성을 즐기기도 한다고. 윤관수 씨가 대학 시절 TV를 보며 느꼈던 ‘짜릿함’은 이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이제 슬슬 서킷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아빠의 (무한)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무한도전>은 때로 사람들 간의 인연을 연결해 삶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추억의 가수들을 소환해 폭발적 반응을 일으킨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은 폭넓은 시청자층에게 지지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2018년 방영된 ‘토토가3 - H.O.T.’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를 지배했던 아이돌 그룹 H.O.T.의 완전체 재결합 무대를 실현해 큰 화제를 모았다. 이러한 소식은 당연히 17년 동안 H.O.T.를 그리워했던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팬들에게 H.O.T.는 학창 시절 그 자체였기에, 재결합 소식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추억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강릉에서 서울을 오가며 열심히 클럽 H.O.T. 활동을 한 당시 중학생이던 장다혜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중학생 시절 함께 H.O.T.를 좋아하던 (다행히 최애가 겹치지 않는) 친구들과 셋이 늘 붙어 다녔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2001년 H.O.T.가 갑작스러운 해체를 발표하자 이들은 충격에 빠졌고, 이후 “해체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눈물이 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갔다. 그리고 저마다 학업과 직장때문에 먼 곳으로 흩어지면서 연락도 뜸해졌다. 하지만 ‘토토가3 - H.O.T.’ 소식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눈물이 핑 도는 감동과 함께 H.O.T.만큼이나 그리웠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들은 아니나 다를까 서로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 사이 한 친구는 결혼해서 엄마가 됐고, 한 친구는 회사를 다니다가 사업가가 됐다. 하지만 17년 만에 흰색 풍선을 들고 모인 세 사람은 여전히 중학생 때처럼 엉엉 울고 또 응원 구호를 외치며 ‘토토가3 - H. O.T.’를 ‘열청’했다. 그리고 그날을 계기로 모임은 다시 시작돼 7년째 이어지고 있다. <무한도전>이 어쩌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친구들을 되찾아준 셈이다.
<무한도전>의 영향에 대해 묻는 필자의 질문에 많은 ‘무도키즈’가 자신의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간증’을 이어갔다. <무한도전>이 “학창 시절부터 사회 초년생이 되기 전까지 성장기를 함께해온 친구 같다”고 이야기하는 29세 회사원 이건휘 씨는 박명수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너무 늦었다”는 명언을 되새기며 얼마 전 이직에 도전해 새로운 업계에 발을 디뎠다. “<무한도전>이 삶의 가치관을 만들어준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 27세 학원 강사 한지연 씨는 댄스, 클라이밍 등 역동적인 활동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민원인과의 씨름이 일상인 34세 공무원 박애란 씨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멤버들을 보며 “힘든 순간도 비극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무한도전> 20주년, 종영한 지 7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무한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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