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송경원
<씨네21> 편집장
처음으로 데이비드 린치 영화를 보았을 때 느꼈던 감상이 궁금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았을 때, 내심 ‘이게 뭐지?’ ‘내가 뭘 본 거지?’ 되묻고 싶었습니다. 전혀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꺼내면 무시당할까 봐 괜히 이해한 척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게 실수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잘못된 만남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부터 집요하게 파고들어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게 데이비드 린치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답이 없는 영화니까요. 이해할 수 없음을 향한 통과의례 같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데이비드 린치 영화’ 세 작품을 꼽는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멀홀랜드 드라이브>. 좋아해야 하는 영화였습니다. ‘BBC가 선정한 위대한 영화 100편’ 중 1위,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2000년대 결산 1위 등 모두가 인정한 걸작이니까요. <이레이저 헤드>. 포스터에 반해서 뒤늦게 찾아 본 영화입니다. 초현실주의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접속하는 영화적 체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사구>. 원래 원작 소설도 좋아하고, 최근 드니 빌뇌브 버전의 <듄>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데이비드 린치의 기괴함과 비정형적인 매력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원작 초월 대신 자신의 세계관을 투영한 고집에 매료되었습니다. 기괴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괴작이랄까요.
영화는 시나리오, 촬영, 음악, 연출, 편집 등 많은 요소가 모여 완성되죠. 그중 데이비드 린치의 탁월한 점은 무엇일까요?
이 모든 걸 분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말하면 촬영을 중심으로 한 이미지화가 린치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린치의 미학은 추함과 불안정성에서 나오는데 그걸 탐미적인 영역까지 끌어올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체의 고통과 변질을 영화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이니까요. 편집은 이 작업을 최종적으로 하나의 덩어리로 뭉치는 행위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종의 인상주의 화가 같은 화풍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린치의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는 1977년 개봉 첫날 관객이 25명에 불과했다고 하죠. 당시 ‘괴작’이라 평가받던 그의 영화가 훗날 재평가받은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데이비드 린치를 두고 대개 컬트 영화의 대부로 일컫는데,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는 컬트 영화의 형태는 사실 데이비드 린치로부터 출발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럽 영화의 스타일(대표적으로 독일 표현주의 같은)을 차용하는 동시에 할리우드의 심부를 건드리는 형식도 변주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연상되는 뿌리는 많은데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창조해낸 거죠. 대체할 수 없는 상상력, 신경증적인 아름다움은 오랜 기억으로 남아 결국 사람들이 다시 찾아 볼 수밖에 없는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특정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작품이 된 거죠.
오늘날 ‘포스트 데이비드 린치’라고 할 수 있는 젊은 감독은 누가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누가 그 자리에 와도 비교되지 않을 겁니다. 누구도 그 자리에 앉고 싶지도 않을 거고요. 그를 수식할 딱 한 단어를 고르자면 ‘유일무이’입니다. 그럼에도 ‘흉내 낼 수 없는 개성’과 ‘악몽의 외면화’라는 차원에서 같은 방향을 지향하는 창작자를 떠올린다면, 아리 에스터 감독을 꼽을 수 있겠네요. 하지만 다시 강조하건대 누구도 컬트를 지향하진 않습니다. 심지어 데이비드 린치 본인조차도요. 그는 자신이 있는 자리가 항상 영화의 중심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죠.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조각. 난잡한 꿈의 조각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화를 인과의 사슬로 연결하려고 합니다. 개연성을 따지고, 미학을 논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죠. 린치의 영화는 우리가 중심이라 믿는 것에서 해방되어 어떤 흐름도 없이 자유롭게 배회합니다. 그의 영화에서 어떤 스타일이 느껴지면, 그건 단지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불균질과 비대칭, 비정형, 통제되고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이야말로 그가 발을 걸친 영역이라 믿습니다.
데이비드 린치는 <광란의 사랑>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멀홀랜드 드라이브>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시네필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감독이기도 한데요. 감독으로서 데이비드 린치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해야 할까요. 영화언어의 외곽을 넓히기도 했지만, 정상과 비정상, 자연스러움과 기이함의 이분법적인 경계를 허문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영화적 상상력은 어떤 형태로든 표현될 수 있으며, 어떻게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인 셈이죠.
막연한 질문입니다만, 좋은 영화감독은 어떤 감독이라고 생각하세요?
보편타당하게 좋은 감독이란 없습니다. 만약에 존재한다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감독 혹은 아무것도 아닌 애매한 감독입니다. 좋다는 건, 평가가 아닌 관계의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감독이 있을 뿐이죠. 단지 그 누군가의 범주가 얼마나 되는지의 차이입니다. 그저 제 협소한 기준에서 좋은 감독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감독’입니다.
편집장님께서 바라본 데이비드 린치는 어떤 감독입니까?
앞선 질문에서 충분히 답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한 단어로 축약하면 ‘유일무이’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당신이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죠. 실은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말이죠.
“데이비드 린치를 두고 대개 컬트 영화의 대부로 일컫는데,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는 컬트 영화의 형태는 사실 데이비드 린치로부터 출발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2 멜트미러
뮤직비디오 감독
감독님의 대표작으로는 에스파 ‘Whiplash’, 실리카겔의 ‘NO PAIN’ ‘APEX’ ‘Mercurial’ 뮤직비디오가 떠오르는데요. 그중 데이비드 린치의 영향을 받아 완성한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린치에게 받은 영감은 간접적인 형태로 드러낼 때가 많지만, 아예 마음먹고 그를 투영한 작업도 있어요. 밴드 실리카겔의 ‘APEX’ 뮤직비디오인데요. 그 장면은 3분 48~57초 구간에 등장합니다. 시퀀스 전체의 무드를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를 떠올리며 촬영하고 편집했어요. 악몽 같은 질감, 실제 임신한 배우의 등장, 시네마를 향한 직설적인 투영 등등. 하지만 <인랜드 엠파이어>만큼 더 거칠게, 화이트 밸런스를 무너뜨리진 못했답니다. 그게 살짝 아쉬워요. 더 과감하게 할걸···.
데이비드 린치는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 수록곡 ‘The Ghost of Love’를 직접 부르는가 하면, 다수의 앨범을 낸 뮤지션이기도 하죠. 린치가 만든 음악으로 직접 뮤직비디오 작업을 한다면 어떤 곡을 고르고 싶으세요?
가장 마음이 끌린 곡은 ‘Falling’입니다. 린치가 안젤로 바달라멘티, 줄리 크루즈와 함께 만든 앨범 <Floating into the Night>의 수록곡인데요. 린치가 뛰어난 프로듀서인 동시에 탁월한 작사가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곡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가사에 집중하며 영상을 연출하는 방식은 늘 피해왔지만, 이 곡만큼은 듣는 이들이 가사를 가장 먼저 인지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싶어요. 정말 차분하게 마음을 도려내는 가사거든요. 제가 해야 할 일은 가사 속 칼날을 더 날카롭게 벼리는 것이겠죠.
린치는 엑스 재팬, 인터폴, 나인 인치 네일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만든 뮤직비디오의 뛰어난 점은 무엇일까요?
애니메이터로 경력을 시작해서일까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린치는 단일 프레임을 날것 자체로 자주 드러냅니다. 영상 창작자로서 기피하고 싶은 순간을 작업에서 가감 없이 드러내버리죠. 영상은 결국 이미지의 연속임을 꽤 선명하게 인정합니다.
데이비드 린치가 완성한 뮤직비디오와 앨범을 추천한다면, 각각 어떤 작품을 고르실지도 궁금합니다.
뮤직비디오는 엑스 재팬의 ‘Longing ’를 추천하고 싶어요. 이유는 너무나 기이해서. 린치의 저서 <꿈의 방>을 보면 요시키와의 협업에 대한 흥미로우면서도 황당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차분한 언어로 쓰여 있어 그렇지, 뮤직비디오 작업자인 저로서는 읽기만 해도 진땀이 나더라고요. 수락하기도 전에 협업을 공표해버리는 클라이언트, 터무니없이 짧은 제작 일정, 숏으론 좋지만 연결하면 엉망이 되는 소스들, 요시키의 기묘한 비전과 양보 없는 아집까지. 최종적으로 린치는 촬영 소스만 넘겨주고 프로젝트를 하차하죠. 결국 ‘Longing ’는 온전히 요시키의 의지대로 완성되었어요. 말인즉슨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그래픽 스타일과 편집 방식은 린치가 구현한 린치가 아닌, 요시키가 원한 린치풍의 이미지였던 거죠. 요시키의 시선으로 바라본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린치다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진짜 린치의 소스를 활용해서 구현하는, 가짜 린치의 작업이라니. 너무 기이하지 않나요? 앨범은 줄리 크루즈의 <Floating into the Night>를 추천합니다. 특히 이질적인 사운드 디자인의 관점에서 3번 트랙 ‘I remember’를 추천드려요.
감독님께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데이비드 린치 영화 세 작품만 골라볼까요?
첫 번째는 <알파벳>. 저의 원초적인 페티시를 건드린 최초의 경험이었어요. 그로테스크, 정적인 인물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이미지만으로 전달되는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때의 감각을 자양분 삼아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광란의 사랑>.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영화예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연출이 다소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린치의 판단에 애착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성향을 넘어선 부자연스러운 일탈을 경직된 감각으로 밀어 넣고 마침내 깊게 안도하는 것 같아 좋습니다. 린치의 필모그래피에서 이런 감각을 공유하는 영화는 <광란의 사랑>뿐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린치의 가장 감각적인 시퀀스 역시 <광란의 사랑>에 있습니다. 침대 위에서 발을 구르는 룰라의 줌인부터 세일러가 스래시 메탈 밴드를 자신의 반주기로 전락시키며 감미로운 사랑 노래를 부르는 시퀀스는 늘 전복적인 감흥을 전해줍니다. 마지막으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꼽겠습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최고작이자, 진정한 클래식이라고 생각해요. 그간 쌓아온 발상의 모티브가 단단히 정제되어 있고, 미스터리한 미덕을 잃지 않으며, 상자를 중심으로 짜인 내러티브의 대칭 구조도 완벽하죠.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모방하거나 훔쳐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마음속 깊이 애착을 품게 되는 영화입니다.
같은 영상 제작자로서 가장 배우고 싶은 데이비드 린치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자신의 표현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 대범함. 그 대범함을 결국 테크닉으로 납득시키는 재능이 아닐까 해요. 무엇보다 린치는 탁월한 사운드 디자이너이기도 했는데요. 늘 불균질하고 이질적인 방식의 사운드 디자인을 활용해 감상자가 수용할 수 있는 감각의 평균을 넓혀왔죠. 대범한 독창성으로 감상자의 감각 평균치를 넓히는 것. 모든 창작자가 원하지만 아무나 해낼 수 없는 탁월하고 존경스러운 부분이죠.
데이비드 린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린치는 창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것을 받아들이고 꿋꿋이 나아가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더불어 속사정을 드러내지 않는 완벽한 구조적 설계의 흔적 역시 린치의 특별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데이비드 린치 작품에는 기이한 캐릭터들이 매번 등장하죠. 그중 가장 매력적으로 느낀 캐릭터를 고른다면 누구인가요?
개인적으로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가장 사랑하지만, 린치가 만든 거대한 세계관 한가운데서 본다면 역시 로라 던을 떠올릴 수밖에 없죠. 린치의 페르소나였던 배우니까요. 로라 던이 맡은 여러 캐릭터 중에서도 <광란의 사랑>에 등장하는 룰라를 고르고 싶네요. 룰라는 모든 감각을 열어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모든 감각을 닫아버린 사람입니다. 린치가 빚어낸 수많은 캐릭터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특이한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감독님께서 지켜본 데이비드 린치는 어떤 예술가였습니까?
데이비드 린치는 어떤 장르의 문법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신을 입증해낸 드문 작업자였습니다. 말로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늘 결과물의 언어로 화답했던 진심 어린 창작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린치는 어떤 장르의 문법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신을 입증해낸 드문 작업자였습니다.
말로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늘 결과물의 언어로 화답했던 진심 어린 창작자였다고 생각합니다.”
3 윤철희
<꿈의 방> <데이비드 린치> 번역가
데이비드 린치의 회고록 <꿈의 방>과 <데이비드 린치>를 번역하셨죠. 그중 가장 흥미롭게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단일 에피소드가 아니라, 데이비드 린치를 유명하게 만든 장편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를 만드는 과정 전체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이레이저 헤드>의 제작 기간은 5년이나 되는데, 그 기간 동안 린치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터라 제작비 조달에도 애를 먹었습니다. 제작진은 영화를 촬영할 여건이 조성될 때마다 모여 촬영한 후 언제 있을지 모를 다음 촬영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습니다. 린치는 촬영장 세트를 지어놓은 마구간에서 기거하기도 했고,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유명한 주연 배우는 언제 촬영에 들어가더라도 차질이 없도록 5년간 그 헤어스타일을 유지했습니다. <이레이저 헤드>는 이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5년이라는 시간을 들이는 걸 마다하지 않는 린치의 뚝심과 고집, 그런 감독을 위해 혼신을 다한 출연진과 제작진의 정성과 헌신에 감탄하게 되는 작품이죠. 그 과정을 소재로 촬영해도 린치의 작품 세계에 잘 어울리는 영화가 나올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많은 영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고른다면 어떤 장면입니까?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클럽 실렌시오’ 장면입니다. 극장, 객석에 앉은 두 여주인공,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립싱크하는 가수, 그러다 쓰러진 가수를 가차 없이 끌고 나가는 남자들. 이 장면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타인’이 관객이 된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운명이 부르는 노래에 맞춰 입을 벙긋거리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쓰러지더라도 운명이라는 잔인한 노래는 결코 멈추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죠. 물론 린치는 제 생각을 듣더라도 ‘옳다, 그르다’ 한마디도 안 할 테지만요. <블루 벨벳>의 오프닝도 좋아합니다. 새하얀 나무 울타리와 빨간 장미, 푸른 잔디로 상징되는 미국의 평온함이 보여요. 동시에 낭만적인 삶도 작은 균열로 순식간에 붕괴될 수 있고, 미국의 이상적인 삶 밑바닥에는 무시무시해 보이는 개미들이 바글거리는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퀀스입니다. 같은 영화의 ‘인 드림스(In Dreams)' 시퀀스도 좋아합니다. 온갖 기괴한 요소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고 로이 오비슨의 음악을 접착제 삼아 연출해낸 부조리극 같은 장면은 기기묘묘하면서도 대단히 매혹적이라서 눈을 떼기 힘듭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세 장면은 각각 ‘Crying’의 스페인어 버전, ‘Blue Velvet’ ‘In Dreams’ 등 당대의 명곡이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군요.
데이비드 린치는 각종 기행을 일삼는 사람이었지만, 주변에선 그를 ‘기이할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두 권의 책을 번역하면서 느꼈던 인간 데이비드 린치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린치는 흔히 ‘기인( )’ ‘괴팍한 예술가’ 하면 떠올리게 되는 특징을 죄다 갖춘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챙기려 애쓰는 등 따스한 면모를 갖춘 인물이기도 했죠. 엑스 재팬이 의뢰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면서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와 여성 편력 등의 흠결이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린치는 살아생전 창작 비결로 ‘명상’을 꼽았죠. 명상 교육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기도 했고요. 그는 일상과 영화 속에서 어떻게 명상을 활용했는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데이비드 린치의 명상’에 대해서는 ‘사이비’라 부를 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린치가 그걸로 남에게 해를 끼쳤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무턱대고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명상이 그의 창작 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접하면서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반응하는 현실 세계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활동인 명상을 통해 현실 세계를 바라본 결과로 흔히 얘기하는 ‘Lynchian(린치풍)’ 영화가 탄생하는 게 아닐까 짐작하고만 있습니다.
데이비드 린치가 50년 넘게 영화를 만들며 꼭 지키려고 했던 점은 무엇일까요?
‘최종 편집권(Final Cut)’이었을 거라 짐작합니다. <사구>는 최종 편집권을 갖지 못한 탓에 네 시간짜리가 두 시간짜리 영화가 돼버렸고, <블루 벨벳>도 상당 부분 잘려 나가는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린치는 자신이 구상한 세계를 고스란히 구현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종 편집권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내려 했을 텐데, 그가 <멀홀랜드 드라이브> 이후로 대형 스튜디오로부터 제작비를 받은 장편 영화를 만들지 못한 데는 이 점이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합니다.
영화감독으로서 데이비드 린치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앞서 ‘Lynchian’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영화 역사에서 특정 감독의 이름이 그가 구현하는 세계를 지칭하는 형용사로 사용되는 경우는 몇 되지 않습니다. 린치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꿈(악몽)’처럼 느껴지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세계를 작품으로 빚어낸 것. 동시에 상당한 규모의 지지자들을 얻으면서 그런 감독의 반열에 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꼭 보아야 할 린치의 대표작을 고른다면 어떤 작품일까요?
최고의 린치 영화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라고 생각합니다. 줄거리를 설명하는 게 무의미한 영화인데요. 끊임없이 등장하는 기괴하면서도 인상적인 요소들이 린치의 독특하고 뛰어난 연출력덕에 묘하게 맞물리면서 딱히 뭐라 설명하기 힘든 섬뜩한 분위기를 빚어내는 영화입니다. 언어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영화도 관객의 뇌리에 강렬한 낙인을 찍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다음으로는 <블루 벨벳>을 꼽겠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한 삶의 배후에는 잘린 귀, 우글거리는 개미, 가학·피학적인 섹스와 잔인한 폭력 같은 불안하고 불쾌한 것들이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데이비드 린치 영화’는 기괴하고 난해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린치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앞서 이야기했듯 데이비드 린치는 악몽의 세계를 강렬하고 인상 깊은 시각적·청각적 이미지로 구현하면서도, 그 이미지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역량을 가진 감독이었습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창조한 감독이기 때문일 겁니다.
데이비드 린치는 어떤 감독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데이비드 린치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와 비슷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흑백필름, 컬러필름, 디지털카메라 같은 여러 매체, 장·단편 영화와 TV 드라마, 인터넷 클립 등의 다양한 형식, 음악과 회화, 판화, 만화, 칼럼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넘나들면서 각각의 형식·매체·분야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내놓은 다재다능한 예술가입니다.
“데이비드 린치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꿈(악몽)’처럼
느껴지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세계를 작품으로 빚어낸 것.
동시에 상당한 규모의 지지자들을 얻으면서 그런 감독의 반열에 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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