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만 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고, 그 안에서 최고가 되는 것.
이것이 롤스로이스가 전 세계 부호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프랑스 니스 코트다쥐르 공항에서 차로 두 시간. 그곳에 샤토 라 코스트(Château La Coste) 와이너리가 있다. 제대로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이곳에 찾아간 이유는 하나다. 롤스로이스 고스트 시리즈 II를 타는 것. 처음에는 의아했다. 자동차와 와인을 한데 엮기는 쉽지 않으니까. 막상 도착해보니 샤토 라 코스트는 단순한 와이너리가 아니었다. 포도밭과 밤나무 숲 곳곳에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조각 작품이 세워져 있었다. 와이너리 전체가 마치 데이미언 허스트를 위한 신전 같았다. 미술과 건축에 관심이 있다면 더 많은 것들이 눈이 들어온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대한 거미 조각상,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성당, 장 누벨이 설계한 와인 저장고. 또 한 번 의구심이 들었다. 거장들의 작품이 즐비한 이곳에서 자동차가 존재감을 드러내기는 여간 어렵지 않을 텐데. 샤토 라 코스트에서 맞이한 첫 번째 저녁. 신형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 건축가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아트 갤러리로 향했다.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건 굿우드에서 날아온 롤스로이스 디자이너 사이먼. 그는 영국식 억양이 짙게 밴 인사말과 함께 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3-펜 스트로크. 저희의 원칙이자 철학입니다.” 모든 롤스로이스는 옆에서 볼 필요가 있다. 지붕, 측면, 하단. 롤스로이스 외장 디자인은 세 개의 선으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롤스로이스는 하나의 덩어리, 즉 조각품과 같다는 뜻이다. 눈앞에 롤스로이스가 있으면 관찰보다 감상을 하게 된다. 크롬을 휘감은 판테온 그릴, 대시보드에 트로피처럼 자리한 작은 환희의 여신상, 별똥별이 떨어지는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 거대한 벌집 모양으로 세공한 22인치 휠. 다른 브랜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소다. 고스트 1세대는 2009년 처음 출시됐다. 2020년에는 고스트 2세대가 공개됐고, 지난 10월 부분 변경을 거쳐 ‘고스트 시리즈 II’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사이먼이 강조한 변화 중 하나는 헤드라이트다. 기존 ‘ㄷ’자 형태에서 ‘ㄱ’자 형태로 간결해졌다. 새로운 헤드라이트는 판테온 그릴과 높이를 맞춰 더 장엄한 인상을 풍긴다.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확인하고 싶은 질문은 따로 있었다. 과연 내가 여력이 된다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이 차를 살까?
가장 운전하기 쉬운 롤스로이스
다음 날 아침, 샤토 라 코스트의 맨션 앞에는 형형색색의 고스트가 세워져 있었다. 운전할 차를 고르는 건 선착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보라색 고스트로 달려갔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 질문이 떠올랐다. 롤스로이스를 보라색으로? 한국에서 타기에는 너무 과하지 않나? 아무리 차를 많이 보유했어도 이 색깔을 고를 수 있을까? 그러던 중 한 롤스로이스 직원이 다가왔다. “제대로 골랐네요. ‘보라카이 블루’예요. 필리핀 보라카이 섬의 일몰 색깔을 입힌 겁니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흰색과 검은색 차로 가득 찬 올림픽대로가 수묵화라면, 롤스로이스는 전 세계의 일몰 색을 차에 입힐 수 있는 인상주의 화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고스트를 운전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한 가지를 가정해보기로 했다. 뒷자리에 귀한 손님이 탔다고 생각하자. 고스트는 컬리넌과 더불어 직접 운전하는 오너 비중을 높인 모델이다. 그럼에도 롤스로이스는 여전히 앞자리보다 뒷자리가 중요할 것이다.
주행 코스는 엑상프로방스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길로 이어졌다. 도로 곳곳에는 높은 방지턱과 로터리가 많았다. 고스트는 롤스로이스에서 가장 작은 차지만, 여전히 전장은 5545mm나 된다. 9인승 카니발보다 390mm나 더 길다. 무게는 2490kg. 그런 고스트를 이끌고 한참 달리다 문득 깨달았다. 이 차는 정말 운전하기 쉽구나. 롤스로이스는 승차감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그 승차감을 ‘매직 카펫 라이드’라 부를까. 하지만 롤스로이스가 운전하기 쉬운 차라는 인식은 적다. 가장 놀라운 건 오른쪽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고스트는 운전 습관을 미리 계산이라도 한 듯, 아무리 급하게 페달을 밟았다 떼도 속도계 바늘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고스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승차감을 완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전하기 쉬운 차를 만드는 거라고.
성능이 아닌 의미를 사는 것
고스트 시리즈 II는 총 3가지 버전으로 만들어진다. ‘고스트’ ‘고스트 익스텐디드’ ‘블랙 배지 고스트’. 두 번째로 시승한 모델은 블랙 배지 고스트였다. 고스트와 블랙 배지 고스트의 가장 큰 차이는 두 가지다. 컬러와 성능. 판테온 그릴과 환희의 여신상이 블랙 크롬을 입는다. 엔진은 같다. 두 모델 모두 6.75L 트윈 터보 V12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다. 하지만 블랙 배지는 29마력 더 높은 600마력의 힘을 낸다. 2505kg짜리 거구의 자동차를 4.7초 만에 시속100km까지 닿게 한다. 소리도 확연히 다르다. 가속페달을 깊숙이 밟으면 훨씬 깊은 엔진 소리를 쏟아내며 민첩하게 바퀴를 굴린다. 롤스로이스에서도 ‘달리는 재미’를 원한다면 블랙 배지가 답이다. 자동차 가격이 5억원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성능이 아니라 의미를 사는 것이 된다. 롤스로이스는 그 의미를 만드는 방식도 특별하다. 고스트 시리즈 II 시트에는 대나무섬유로 만든 ‘듀얼리티 트윌’을 적용할 수 있다. 왜 대나무인지가 중요하다. 롤스로이스 창립자 헨리 로이스는 프랑스 남부 코트다쥐르에 겨울 별장이 있었고, 그 인근에 대나무밭이 펼쳐졌다고 한다. 후대의 롤스로이스 직원들은 이 사연을 놓치지 않고, 대나무로 새로운 소재를 개발했다. 만드는 방법도 특별하다. 듀얼리티 트윌을 차 실내 전체에 적용하려면 220만 개의 스티치와 18km의 실이 필요하다.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20시간. 여기에 새겨진 고유한 문양은 롤스로이스 창립자인 찰스 롤스와 헨리 로이스 이니셜 ‘R’을 서로 연결해 완성했다. 이것 역시 코트다쥐르에 있던 세일링 요트의 밧줄에서 영감받았다고 한다. 고스트를 타는 내내 롤스로이스 직원 누구도 차의 성능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차가 왜 만들어졌는지,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그 변화가 왜 필요했는지 설명했다. 롤스로이스는 왜 이토록 완벽에 집착할까. 남들은 엄두조차 못 낼 일을, 달리는 성능과는 무관한 요소를 만드는 데 노력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할 수 있으니까. 자신들만 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고, 그 안에서 최고가 되는 것. 이것이 롤스로이스가 전 세계 부호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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