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아 이번 출장은 네가 간다.” 어느 날 선배가 나에게 말했다. 드디어 내가 첫 출장을 가는구나. 많은 이들이 패션 매거진 에디터의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되는 경로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일 거다. 나 역시 그렇기에 회사에 입사한 후 출장에 대한 갈망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뉴욕을 배경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앤드리아의 모습이 로망으로 자리 잡은 탓이다. 물론 출장에서 잔뜩 고생에 절여진 채 돌아오는 선배의 모습을 보며 현실은 낭만과 사뭇 다름을 깨달았지만.
그래서 어딜 가는 걸까. 미국도 좋고 유럽도 좋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아시아권 나라도 많았다. 결정된 첫 출장의 목적지는 방콕. 아쉬운 마음이 슬쩍 들었다. 어떤 출장인가요? “페라리에서 F80을 아시아 최초로 보여주는 행사를 연대. 거길 가는 거야.” 함께하는 브랜드가 페라리라면 말은 달라진다. 목적지가 대수일까. 수없이 가본 일본이어도 좋았다. 페라리가 보여줄 그 무언가가 너무나 궁금했다.
“ 우니베르소 페라리는 77년 이상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온 페라리의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과 혁신적인 기술,다이내믹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특별한 행사입니다.”
페라리의 세계
‘우니베르소 페라리’는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호주, 한국을 거쳐 방콕에서 전 세계 네 번째로 개최하는 행사였다. 우니베르소는 이탈리아어로 ‘세계’를 뜻한다. 이름처럼 페라리가 구축해온 세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로, 전설적인 클래식 모델부터 최신형 모델까지 한데 모은다. 2023년에는 서울에서 아시아 최초로 개최했는데,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담은 차량을총 22대 선보였다.
일반 소비자를 위한 입장권은 판매 1분 만에 매진되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도착한 겨울의 방콕은 무덥지 않았고 적당한 온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서울은 기온이 뚝 떨어져 한창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기에 후덥지근한 공기가 반갑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다음 날 아침, 행사는 태국 엠스피어 UOB 라이브에서 열렸다. 엠스피어는 현재 방콕에서 가장 트렌디한 백화점이다. 로비에는 각국 기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모여 있었다. 드디어 전시장 문이 열리고 베일에 감춰진 자동차 한 대가 드러났다.
이어서 페라리 최고마케팅 및 커머셜 책임자 엔리코 갈리에라가 등장했다. “우니베르소 페라리는 77년 이상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온 페라리의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과 혁신적인 기술, 다이내믹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특별한 행사입니다.” 간략한 소개 후 본격적으로 F80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됐다.
F80이라는 공도 위의 악동
F80은 1984 GTO, 2016 라페라리 아페르타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슈퍼카다. 2024년 10월 17일 마라넬로에서 최초로 공개했다. 가격은 한화 약 53억원. 799대 한정으로 출시했다. V6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탑재했는데 이는 페라리가 그간 F1과 WEC에서 축적한 모터스포츠 기술의 집합체다. 실제로 F80은 페라리의 로드카 중 가장 높은 출력을 자랑한다.
V6 트윈 터보 엔진에서 900마력을, 전방 차축과 후방 엔진에 위치한 전기모터에서 300마력을 발휘한다. 시스템 합계 출력 1200마력. 차량 내 모든 전기 부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개발부터 생산까지의 모든 과정을 최초로 마라넬로 본사에서 직접 진행했다. 훌륭한 엔진이지만 V12 엔진이 페라리의 상징적인 파워트레인인 점을 고려하면, 최상위 라인 슈퍼카 F80에 V6 엔진의 사용은 의아함을 남긴다. 특히 이전에 선보인 푸로산게와 12칠린드리 역시 V12 엔진을 탑재했기에 더욱이 그렇다.
“ 특수 제작된 고성능 탄소섬유를 사용해 경량화한 차체와 전후면 모두공기역학에 초점을 맞춘 설계, 모터스포츠 기술로 중무장한 엔진의 결과다.속도에 대한 페라리의 진심이 느껴진다.”
“‘어떤 파워트레인을 사용할 것인가?’는 F80을 설계하며 가장 많이 고민한 질문이었습니다. 결국 V6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장 높은 성능을 제공할 수 있는 엔진이기 때문입니다.” V6는 F1에서 모든 팀이 사용하는 엔진이다. 최근 르망 24시에서 두 번 우승했던 499P 차량 역시 V6 엔진을 사용했다. 리터당 300마력을 내뿜는 기술은 어떠한 제조사도 달성하지 못했던 페라리의 성과다.
F80은 경주용 차의 영혼을 담은 로드카였다. 내부 기술뿐 아니라 디자인 역시 그렇다. 갈리에라가 언급한 핵심 요소는 세 가지. 첫 번째는 캐빈이다. 운전석과 동승석의 공간을 이전 모델보다 50mm 좁게 만들었다. 레이싱카에 사용하는 모노코크 형태의 2인승 구조다. 두 번째는 동적리어 윙이다. 주행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경우 자동으로 펼쳐지며 공기역학 성능을 최적화한다. 세 번째는 과거의 상징적인 슈퍼카 F40에서 영감받은 측면 패널이다. 설명을 들으며 기대는 점점 더 커졌다.
드디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고 사람들의 몸이 일제히 앞으로 쏠렸다. 베일이 걷혔다. 짙은 레드 컬러의 F80이 웅장한 위엄을 뽐내며 나타났다. 연신 셔터 소리가 울려퍼지고 감탄과 박수가 쏟아졌다. 외관은 페라리가 기존에 고수하던 디자인과는 사뭇 달랐다. 투박하고 터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보통의 차들 사이에서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디자인도 스펙도 위압적이었다. 공도에서 F80을 만난다면 도망쳐야 할 것 같다. 전면부 디자인을 살펴보면 보닛은 12칠린드리처럼 검은 패널로 마감했다.
도어는 버터플라이 형태로 하늘을 향해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열린다. 문이 열리는 모습이 <트랜스포머>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투박해 보이지만 차체 무게는 겨우 1525kg. 후면부 역시 여섯 개로 나뉜 디퓨저와 리어 윙을 통해 최대의 다운포스를 만들어낸다. F80의 0-100km/h 가속 성능은 2.15초에 불과하고 최고속도는 350km/h에 달한다. 특수 제작된 고성능 탄소섬유를 사용해 경량화한 차체와 전후면 모두 공기역학에 초점을 맞춘 설계, 모터스포츠 기술로 중무장한 엔진의 결과다. 속도에 대한 페라리의 진심이 느껴진다.
F80을 감상한 후 옆쪽 문을 열자 거대한 전시 공간이 펼쳐졌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레이싱카 F1-2000이다. 미하엘 슈마허에게 세 번째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안겨준 차량이다. 안쪽으로는 앞서 말한 499P와 데이토나 SP3, SF90 XX 스트라달레, 푸로산게, 296 GTB, 12칠린드리가 늘어서 있었다.
내 마음을 빼앗은 건 로마 스파이더. F80이 남성향 차량이라면 로마 스파이더는 여성향 차량이 확실했다. 출장을 함께한 차량 리뷰 유튜버 심은별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차 중 가장 사랑하는 차’로 로마 스파이더를 꼽았다. 은은한 색채와 유려한 곡선. 여심을 훔치는 차 앞에 나란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전설적인 클래시케 모델로는 308 GTB와 출시 50주년을 맞은 F50을 만날 수 있었다.
“ 이유는 명확합니다. 럭셔리 산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뛰어난 제품뿐만 아니라 우수한 경험도 함께 제공해야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죠. 페라리는 고객이 서로교류하며 각자의 경험을 우리의 트랙 위에서 공유할 수있는 플랫폼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엔리코 갈리에라와의 대담
갈리에라와 인터뷰하기 위해 대기실로 향했다. 무대 아래에서 만난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페라리가 오늘날까지 ‘우니베르소 페라리’와 같은 프로그램에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와 중요성에 대해 물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럭셔리 산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제품뿐만 아니라 우수한 경험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죠.
페라리는 고객이 서로 교류하며 각자의 경험을 우리의 트랙 위에서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자동차 제조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브랜드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페라리는 실제로 고객에게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세계 곳곳의 드라이브 코스를 함께 돌거나 오너가 참여할 수 있는 레이싱 경기를 연다. 의류 브랜드를 론칭해 컬렉션을 선보이는 것 역시 그 일환이다. 자동차 브랜드를 넘어 문화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입지를 공고히 해나간다.
매혹적인 브랜드가 된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요인은 당연히 제품입니다. 자동차 산업은 효율성을 추구하기에 모듈화된 부품을 여러 차량에 적용하죠. 하지만 페라리는 각각의 차량이 특화된 부품을 갖춰야 한다는 철학을 고수합니다. 성능을 우선하는 페라리의 일관된 제품 개발 전략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생각합니다.”
그가 두 번째로 꼽은 요소는 페라리의 고객층이었다. 페라리 팬은 전 세계 수백만 명에 달한다. 페라리에 열광하는 이들은 경제적 능력을 갖춘 부유층뿐 아니라 구매 능력이 없는 이들도 포함한다. 그들과는 경주를 통해 소통한다. 페라리는 자동차 제조보다 레이싱을 먼저 시작했고 레이싱팀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역사가 자동차 브랜드 페라리의 역사보다 더 오래됐다. “두 그룹의 조합이 페라리를 독특하게 만듭니다. 비록 페라리를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페라리를 꿈꾸는 사람과, 페라리를 소유할 수 있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 모두에게 페라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빨간 열기의 밤
전시가 종료된 저녁 7시경, 디너가 있었다. 낮과는 180도 다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이들이 홀을 가득 메웠다. 끝없이 늘어선 테이블과 음식 그리고 샴페인. 그야말로 만찬이다. 식사의 시작과 함께 자선 경매가 개최됐다.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을 목적으로 하는 경매였다. 클래시케 모델을 직접 주행해볼 수 있는 코르소 필로타 클래시케 티켓, 페라리가 운영하는 카발리뇨 레스토랑 식사권 등 페라리와 관련된 물품이 나왔다.
옥션의 열기가 무르익어갈 때쯤 샤를 르클레르의 레이싱 장갑이 나왔다. 여기저기 패들이 올라가며 가격은 끊임없이 치솟아 2만8500유로, 한화 약 4300만원에 이르렀다. ‘장갑이 그랜저 가격이네 저걸 어떻게 사’라고 생각할 때쯤 옆 테이블에 앉은 이가 가볍게 패들을 올렸다. 가뿐한 몸짓이었다. ‘세상은 넓고 부유한 이들은 많구나’ 생각하며 조용히 와인을 홀짝였다.
직접 만나본 페라리는 자동차를 넘어선 하나의 상징이었다. 뜨거운 질주를 가능케 하는 성능,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디자인 그리고 경험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철학까지. 방콕에서 보내는 며칠 동안 나는 페라리가 소수의 부유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에게 꿈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브랜드임을 느꼈다.
출장을 마치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나 역시 가질 순 없어도 이미 페라리의 팬이 되었다는 것. ‘페라리의 세계’는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모두에게 숨겨둔 낭만을 다시 부르는 열쇠다. 이 여정은 언젠가 내 마음속 또 다른 도전에 시동을 걸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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