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바쁜 일정 사이에서 오랜만에 여유가 생겼다고 들었어요.
촬영이 없으니까 그렇긴 한데, 영화 기획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있어서 나름 계속 공부하면서 정신없이 보내고 있어요.
<헌트> 때부터 그렇게 생활한 건가요?
<헌트> 시나리오를 4년 동안 썼거든요. 그러면서 세어보니까 작품을 7개 했더라고요. 그러니까 촬영 없으면 시나리오만 쓰는 생활을 계속했죠. 이런 걸 하면 좋겠다는 여러 아이템이 생겨서 계속 쓰고 있어요.
여러 가지일 테지만, 어떤 이야기인지 미리 귀띔해줄 수 있나요?
얘기할 순 없지만 장르도, 이야기도 다양해요. 그래서 계속 쓰고 있죠.
만나면 이걸 먼저 물어보고 싶었어요. <오징어 게임> 이후로 전 세계가 집중하고, <스타워즈> 시리즈도 찍었잖아요. 그 3년여 동안 사람들은 많은 게 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스스로 어떻게 느끼나요?
생활은 변한 게 없어서 솔직히 잘 못 느껴요. 촬영장 가기 전에 준비하고, 현장에 가서 촬영하고, 남는 시간 있으면 시나리오 쓰고, 또 촬영 준비하고 촬영하고. 보통 제 생활을 잘 모르시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스타워즈> 시리즈 찍으러 해외 나가고 홍보하러 계속 해외에 왔다 갔다 하니, 어떻게 보면 화려할 것 같죠. 남들 안 하는 일을 하니까 좀 더 좋게 보일 수 있지만, 생활 면에선 똑같아요. 다만 좋은 기회가 와서 저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하는 건 많이 바뀐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촬영할 땐 똑같아요.
새로운 환경으로 바뀌니 이전 작업과 마음가짐이나 기분이 달라지거나 그러진 않나요?
사람 사는 동네는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것 같아요. 미국이든 영국이든 한국이든, 영화 만드는 프로세스가 똑같아서 생활적으로 느끼는 건 별로 없어요. <스타워즈> 시리즈니까 촬영 현장이 좀 더 스케일이 크다거나 하지만, 생활 면에서 차이를 느끼는 건 별로 없어요. 이런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달라진 게 없다고 하면 좀 실망하실까 싶지만, 그게 사실이니까요.
일희일비하지 않는 차분함은 성격의 영향인가요?
아무래도 제가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까 그런 점이 있죠. 저도 젊었을 때는 이렇게 느끼지 않았어요. 스케일이 큰 영화를 했다든가 하면 내가 이런 걸 했어! 하거나 관객이 천만 명이 들었다면 천만 영화다! 하면서 기분이 막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죠. 하지만 그건 기분일 뿐이지 당시를 되돌아 생각하면 바뀐 건 별로 없어요.
새로운 영역을 선택하거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더 좋아지기도 하잖아요. 물론 예전부터 톱스타였지만.
어차피 배우는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만 연기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누가 나를 선택해주느냐는, 정말 어떻게 보면 운명과도 같은 사건이에요. 더 유명해졌다고 해서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온다고 생각하기에도, 그럴 가능성이 좀 더 있긴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거든요. 시나리오는 좋았는데 결과물이 안 좋았던 작품도 있고, 시나리오는 좀 미흡했는데 결과물이 굉장히 잘 나온 작품도 있으니까요.
<에콜라이트>를 보면서 감회가 남달랐어요. 광선검 든 이정재라니. 신선하고 놀라우면서 어떤 면에서 촬영하면서 외로웠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죠. 준비해야 할 게 너무 많았어요. 무술도 영어도 연습해야 하고, 또 대본도 계속 봐야 하니까요. 그것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해서, 외롭다 이런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어요. <에콜라이트>든 <오징어 게임>이든 그 무엇이든, 규모가 작은 영화에 참여할 때도 준비할 게 너무 많아요. 대사만 외운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서 봐야 할 것도 많고요. 그다음에 또 다른 건 뭐 없을까 찾아야 하고, 시간 남으면 운동도 해야 하고. 촬영하면서 운동하지 않으면 체력이 떨어져요. 보통 촬영을 한 4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오징어 게임 2>는 거의 1년 동안 촬영했는데, 중간중간 계속 운동해줘야 체력이 안 떨어지죠. 후반에 체력이 달리면 집중력이 떨어지거든요.
전 세계적인 관심과 화려해 보이는 면모는 주변 시선일 뿐이네요. 배우 이정재는 그냥 하던 대로 한다고 들립니다.
기쁘다기보다 그냥 하나의 작품이죠.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다른 장르의 작품이라고. 저도 이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까, 관객을 실망시켜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커요. 그게 할리우드 작품이든, 아니면 글로벌 시장을 아우를 수 있는 <오징어 게임>이든, 아니면 국내에서만 공개되는 작품이든 결국 관객에게 보여줘야 하는 작품이니까요. 국내 작품이든 해외 작품이든 그런 점은 크게 중요하진 않아요.
<오징어 게임> 이후 이정재 님의 활동 중 가장 인상적인 건 <헌트>를 만든 일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전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영화 제작은 이 나이에 제가 할 만한 캐릭터를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했어요. 싱어송라이터를 보면서 저분들은 직접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고 노래도 하는데 배우는 그럴 수 없을까 했죠. 해외 사례는 많잖아요. 그 질문에서 시작했죠. 그래도 시나리오와 감독을 정해서 내가 출연할 생각이었지 감독까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헌트>의 어떤 점이 감독까지 이끌었나요?
전부터 스파이물을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관상 > 찍고 나서 한재림 감독이 스파이 영화 좋아하세요? 묻더라고요. 스파이 영화 안 좋아하는 남자 배우가 있나? 했더니 지금 스파이 영화 기획하는데 시나리오를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좋다, 우리 호흡 잘 맞았으니 재밌게 또 찍어봅시다 했죠.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더라고요. 물어보니 잘 안 풀려서 그냥 안 하기로 했대요. 그래서 아쉽다 그러고 있었는데, 영화 하시는 지인이 시나리오 판권이 하나 나왔는데 보지 않겠느냐고 판권이 하나 나왔는데 보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한재림 감독이 하려다가 안 한 거예요. 제목이 ‘남산’이었어요. 봤더니 한재림 감독이 왜 안 하겠다고 했는지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너무 많은 부분을 고쳐야 하는데 수정이 쉽지 않은 요소가 있었어요. 남북 간의 문제, 국내 정치적인 문제, 시대극이니 예산 문제 등등.
역시 포기한 건 다 이유가 있었군요.
‘남산’에는 액션이 많지 않았는데, 어차피 1980년대를 재현하려면 예산이 많이 들어가니 차라리 예산을 더 쓰고 액션 분량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게 또 제일 어려운 요소가 됐고요. 그래도 왠지 좋은 작가, 좋은 감독과 함께한다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보고 먼저 판권을 샀죠. 그런데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자 만나 같이 하자고 했는데 다들 풀기 어렵다고 거절하더라고요. 한 6개월 쓰다가 포기한 감독님들이 되게 많았어요.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한번 써봐야겠다는 약간의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쳤는데, 그러면서 시작했죠.
독수리 타법을 딛고 감독까지 됐네요. 지금은 많이 늘었겠네요.
이젠 뭐 국문, 영문 자유롭게.(웃음)
그렇게 연출을 맡아 완성해서 영화제까지 갔어요.
감사하게도 결과가 좋았죠. 아무래도 영화 하는 사람들은 영화제에 가고 싶다는 바람이 항상 있어요. 입 밖으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번 영화는 영화제 안 가나 이런 생각을 하죠. <헌트> 만들 때도 칸영화제에 출품하고 싶었어요. 갈등을 멈춰야 한다는 주제라면 서양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영화제에 낼 생각으로 프로덕션 기간을 역순으로 맞췄어요. 5월에 촬영해 10월에는 무조건 끝내고, 후반 작업은 다음 해 2월까지 끝내려고 했죠. 칸에서 받아주셔서 홍보에도 많은 도움이 됐죠. 무엇보다 우성 씨와 같이 칸에 갈 수 있어 개인적으로 굉장히 뜻깊은 일이었어요. 각자 참여한 작품이 칸에 가는 일은 있어도 같이 가는 일은 쉽지 않거든요. 같이 간다는 게 저한테는 큰 의미였어요.
데뷔작이 의미도 있고 결과도 좋아서 오히려 다음 작품이 부담스러울 수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래도 잘 만들 수 있는 주제, 또 잘 만들 수 있는 시나리오가 중요하니까 그걸 갖추지 않으면 촬영에 들어가지 않죠.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많은 것을 충족해야 하니까 그냥 열심히 쓰는 거죠.
얘기를 듣다 보니 긴 세월 꾸준히 좋은 필모그래프를 유지한 비결이 좋은 판단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그리고 그 판단 기준은 저에겐 무조건 관객이에요. 저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관객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요즘에 제일 힘들게 생각하는 건 뭔지,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건 뭔지, 가장 재미있게 생각하는 건 뭔지 그것만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죠. 제 기분과 제 상황에 집중하면 판단을 잘 못할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맡은 배역으로 그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했네요.
지금까지 배역을 고를 때 전에 해본 캐릭터, 장르, 스토리 이런 걸 웬만하면 겹치지 않게 하려고 했어요. 관객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좋아하니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새로움을 담은 작품이 뭐가 있을까 그거부터 보죠. 그리고 지금 관객들은 어떤 장르를 즐겁게 볼까. 서스펜스일까 유머러스한 것일까. 그런 사회적인 흐름이나 분위기도 굉장히 중요하죠. 역할을 선택하는 기준이 관객이기에 어떻게 보면 심플하죠.
일반적인 배우의 관점과는 시야가 다릅니다. ‘자신’이 아닌 ‘관객’에서부터 출발하니까요. 명확하면서도 넓게 바라보네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만 하다 보면 비슷한 연기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비슷한 것을 관객은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여러 브랜드에서도 소비자가 뭘 좋아하는지 리서치해서 그에 부합하는 제품을 만들잖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측면에서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어떤 장르, 어떤 영역이라도 충분히 잘 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밑에 깔려 있어야 가능하겠네요.
자신감은 없어요. 솔직히 두렵죠. 잘 못하면 어떡하지. 이거 내가 해본 적이 없는데 할 수 있나. 이런 두려움이 더 많죠. 80%는 그렇다고 봐요. 그래도 20%의 가능성을 믿고 한 번 더 시도할 수 있는 부분이 뭘까 계속 찾아보는 거죠. 그렇게 계속 연습하면서 20%에서 30%를 넘어서 80%까지 늘려가는 거죠. 그런 작업을 해야만 자기 역량도 조금씩 더 키울 수 있는 거고, 그걸 보는 관객들도 재미를 느낄 수 있죠.
듣다 보니까 이정재 님의 필모그래피에서 화제가 되고 다시 보게 되는 몇몇 캐릭터가 떠오릅니다. 그런 판단으로 도달한 캐릭터구나 하면서요.
멀리서부터 얘기하면 <신과 함께>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나서 그럼 다음에 뭐 할까 하다가 <사바하>의 박 목사를 했죠. 박 목사가 약간 유쾌한 캐릭터거든요. 헐렁헐렁한 목사에서 정의를 실현해보고자 하는 정치인의 모습으로 가는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해 <보좌관-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했죠. 정직하고 바른 정치인에서 다음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듣도 보도 못한 킬러 레이로 이어지고. 레이 비주얼은 함께 일하는 스타일리스트와 같이 만든 거예요. 레이에서 또 다르게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다가 <오징어 게임>의 아주 소시민적인 성기훈으로, 거기에서 <헌트>의 안기부 1차장으로.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죠.
하나하나 절묘한 판단의 결과네요. 그러고 보면 자기 관리가 탄탄하다고 느껴져요. 필모그래피뿐 아니라 브랜드 모델로서 화보도 꾸준히 찍고요.
연기자로만 사는 것과 연기자로 살면서 이런 브랜드 홍보 모델도 한다는 건 조금 달라요. 연기는 굉장히 잘하시지만 브랜드 홍보 모델이 아닌 분들도 있죠. 브랜드 홍보 모델도 선택받아야만 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선택받기 위해 나는 어떤 모습을 꾸준히 보여줘야 할까, 이것도 사실 고민 중 하나죠. 공식 석상 같은 데 가더라도 신경 쓰려고 해요.
<오징어 게임 시즌2> 관련해서 이렇게 물어보려고 했어요. 2편을 앞두고 설렘일까 부담일까 뭐 이런 질문이었는데, 얘기해보니 일단 손을 떠났으니 크게 신경 안 쓸 듯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와서는 크게 신경 안 쓰죠. 촬영할 때만 신경을 어마어마하게 쓰죠. 꼭 <오징어 게임>이 아니고 다른 작품이어도 신경을 어마어마하게 쓰니까. 그것도 적당히 긴장해야지 너무 잘하려고 많이 긴장하면 또 이상하게 나와요. 적당함을 유지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가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죠. 어떤 게 최선인지 파악해서 결정한 부분을 또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촬영하는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스태프들과 상의했겠어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 촬영했으니 이제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건 홍보만 남았죠. 어떻게 봐주실지 하는 기대와 두려움은 사실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제 손을 떠났다고 보는 거죠.
이것이 오랫동안 해온 관록이겠군요.
일하면서 연륜이 생긴 거죠.
가벼운 질문을 해볼까요? 목소리 톤이 멋있다는 얘기가 많은데 원래 톤인가요? 노력한 결과인가요?
관객들은 목소리 톤이 좀 낮으면 신뢰감을 더 느끼는 것 같아요. 신뢰를 줄 수 있는 캐릭터의 톤은 조금 낮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소리 낼지 연습했죠.
그 톤이 일상에서도 묻어나게 된 건가요?
그럴 수밖에 없죠. 발성 연습은 항상 해요. 촬영장 가기 전에 30분 거리든 1시간 거리든 차 안에서 계속 연습하죠.
그럼 노력하면 누구나 좋은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
100%예요. 얼마큼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서 딕션이나 톤이 바뀌죠.
마지막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행복하신가요?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런 시간이 별로 없어서 죄송스럽죠. 그런 아쉬움은 있어요. 그것만 아니면 뭐 그래도 전 행복하죠. 일을 좀 줄이면 행복해지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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