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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책이 할 수 있는 것

이 매혹적인 논픽션을 읽으며 책 고유의 매력을 생각했다.

UpdatedOn July 03, 2024

노마드

앤서니 새틴, 까치글방

며칠 전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끼리 모인 자리에서 ‘IP’가 화제에 올랐다. ‘IP 관련 문의가 많아서 고민’이라는 어떤 소설가 이야기였다. 여기서 IP는 지적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일련의 이야기 줄거리와 주요 세부 설정이다. 소설 영화화에서 이루어지는 판권 계약이 한 예다. 작가에게 중요한 건 소설 자체고 IP는 그 소설에서 빼낼 수 있는 영양분 같은 추출물이다. 작가는 종합적인 뭔가를 만들고 싶은데 시장 수요는 뼈대와 엑기스에 몰린다. 사소한 이야기 같지만 작가 본인의 정체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생각할 요소가 많은 주제였다.

<노마드>도 ‘IP로 팔리겠는데’ 싶었다. IP와 판권 개념은 소설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해외에는 유명 논픽션으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만드는 경우도 많다. <노마드>는 영상으로 만들어질 가치가 충분하다. 이 책의 주제를 요약하면 ‘유목민에게도 특유의 문화가 있으며 그들의 문화적 특징도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유목민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정착해서 기록과 자료를 남기는 문명에서는 기록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논지를 확인하기 위해 온갖 기록과 사람을 찾는 모험을 떠난다.

누군가 <노마드>의 영상화를 꿈꾸며 IP를 사도 영상화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책이 영상보다 우월하다는 게 아니다. 비용 문제다. <노마드> 같은 내용을 책으로 쓰는 것과 영상 제작은 품이 완전히 다르다. 전 세계를 돌며 전문가를 만나고 유적을 찾은 뒤 주요 부서와 협력해 그림이나 사진을 받아서 책 한 권으로 구성하는 일은 물론 기술적으로 쉽지 않겠으나 소요 인원이 적다. 극단적으로는 작가 한 명이 해도 되니까 영상화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적다. 영상화는 생각보다 어렵고 품이 많이 든다. 비용 면에서 이런 조사와 통찰의 기록은 책으로 나오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내 직업도 이것저것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어 페이지에 풀어놓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우와 재미있다’와 ‘이 재미있는 걸 영상화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겠지’라는 생각이 번갈아 들었다. <노마드>의 주제를 전하기 위해 저자는 동서양 곳곳을 찾아다닌다. 터키의 마을을 이야기하다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발표한 ‘유목민 유전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스케일을 책으로 구현하는 것과 영상화로 구현하는 건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영상 소스를 하나 얹는 것, 좋은 음악을 삽입하거나 적절한 효과음을 넣는 건 책을 만들 때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즉 말하자면 시청자와 독자는 다른 종류의 수용자다. 독자는 책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읽고 자기 안에서 여러 상상을 하는 나름의 요령을 익힌 자다. 자기 자신이 디바이스. 시청자는 조금 다르다. TV를 보는 방법도 따로 있겠지만 책과 비교했을 때 영상은 모든 게 다 내 밖에서 플레이되고 있다. 나는 큰 생각 없이 모니터나 TV 속 영상만 쳐다보고 있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이해된다. 영상과 문자에 우열은 없지만 문자가 조금 더 읽기 힘들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책 읽기는 한 번 익혀두면 여러모로 효율적이고 교양 있는 취미가 될 수 있다.

이달 <노마드>를 읽으면서도 책 읽기를 취미 삼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선진 논픽션의 경향 중 하나는 참신한 주제와 다양한 자료다. 놀라운 논리와 가설을 만들고 싶다면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학제별 자료를 찾거나 취재 경험을 만든다. 그래서 독서가 재미있다. 다양한 사실을 끌어모아 결론에 이르는 저자만의 지적 여정과 이야기는 아직 세상에 너무 많다. 그 궤적을 따르는 게 독자의 기쁨이자 독서의 기쁨이다. 독자 수가 아무리 줄어도 <노마드> 같은 책이 주는 원초적인 기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하야부사

    쓰다 유이치, 동아시아

    하야부사는 일본어로 매다. 세계 최초로 지구보다 멀리 떨어진 천체에서 표본을 채취하고 회수하는 데 성공한 탐사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하야부사 2가 지구에서 3억 킬로미터 떨어진 소행성에 착륙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기까지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책이다. 우주 탐사 실무 이야기가 책의 주 내용이고, 하야부사 2의 업적은 전 세계 과학자들이 함께 기뻐한 인류의 업적이지만, 책을 만드는 내 입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이 책이 읽기 쉽다는 것이다. 이 책은 과학에 대해 잘 몰라도 최대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편집되었다. 그 결과 ‘전인미답의 작전 수행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런 게 과학 강국의 비결이자 기초과학의 힘 같기도 하다. 한국에서 이런 책을 더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 책의 역사

    다카미야 도시유키, AK커뮤니케이션즈/DCW

    미래가 궁금할 때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여러 고민과 해결은 생각보다 흔한 일일 수 있고, 과거를 돌아보면 오히려 미래를 상상하기 더 쉬워진다. <책의 역사>는 그 면에서 책의 미래가 궁금할 때 읽어보면 좋다. 책에 따르면 인간과 책의 역사는 ‘필사본에서 인쇄본으로’ 발전했다. 개별 책을 만드는 과정이 간소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면, 인쇄본이 정착하자 기술 흐름에 역행하는 필사본이 유행하기도 했다. 저자는 중세 영문학과 서적사 전공자답게 다양한 중세 유럽 자료를 바탕으로 책과 독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읽다 보면 인류가 참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 내 걱정 같은 건 큰 의미 없다는 안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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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박찬용
Photography 이준형

2024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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