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사에서 온 초대장
‘뭘 보여주고 싶은 걸까?’ 롤스로이스의 신형 컬리넌을 만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섬으로 가는 것이었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생각했다. ‘내가 만일 자동차 브랜드 홍보 담당자라면 어디에서 초청장을 보낼까?’ 물론 전 세계 어느 도시든 후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브랜드가 롤스로이스라면 이비사가 1순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비사는 이베리아반도에서 동쪽으로 79km 떨어진 지중해의 작은 섬이다. 수억원짜리 롤스로이스 십수 대를 바다 건너로 옮기는 것도 일일 테지만, 그보다 ‘클럽의 성지’로 각인된 이비사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더욱 이해가 안 됐다. 롤스로이스는 화려함을 겉으로 드러내기보다 차에 탄 사람만이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브랜드니까. 궁금한 마음에 검색창에 ‘Ibiza’를 넣자 가장 먼저 따라붙는 단어는 역시나 ‘Club’이었다. 하지만 롤스로이스는 전 세계 어디로든 기자와 오너들을 초대할 수 있다. 누구라도 그곳에 가고 싶어 할 테니까. 인천에서 출발해 18시간이 지나니 이비사 공항에 도착했다. 이비사 성 근처의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EDM 베이스 사운드가 새벽까지 호텔 창문을 광광 울려댔다. 신형 컬리넌을 만나기까지는 아직 하루가 남아 있었다.
엄청나게 조용하고 믿을 수 없게 부드러운
이비사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 일정은 이비사 북동쪽에 위치한 식스센스 호텔로 이동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호텔까지는 팬텀을 타고 이동할 겁니다.” 지난밤 공항으로 마중 나온 롤스로이스 아시아 커뮤니케이션 담당인 유키 상이 웃으며 말했다. 잠시 후 좁은 골목을 뚫고 거대한 차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팬텀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영국 악센트가 진하게 밴 말투로 인사를 건네며 뒷문을 열었다. 그는 신기할 정도로 구김 없는 순백색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물론 셔츠 가슴 한편에는 롤스로이스 ‘RR’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백색 신사는 선글라스를 고쳐 쓴 뒤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 “목적지까지는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매직 카펫 라이드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죠.” 롤스로이스는 고유의 승차감에 ‘매직 카펫 라이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승차감은 설명하기 모호한 부분이다. 직접 타보기 전에는 가늠할 수 없고, 승차 후에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의 총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롤스로이스는 고유명사까지 붙여가며 고유의 승차감을 무기로 만들었다.
식스센스로 향하는 길은 꽤 다양했다. 섬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산 하나를 넘어야 했고, 섬 곳곳에는 회전교차로가 있었다. 그 덕분에 직진 코스부터 ‘S’자로 굽이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반복하며 승차감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뒷자리에서 느낀 팬텀은 믿을 수 없이 부드러웠다. ‘믿을 수 없이’라는 수식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마치 관성과 중력을 지운 듯한 기분. 운전석의 백색 신사와 감탄사를 주고받던 중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차가 터무니없이 조용하다는 것. 커다란 창문 틈으로는 바람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요철음도 눈치챌 수 없었다. 운전석과 저 멀리 환희의 여신상 사이에 거대한 V12 엔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적막 역시 비현실적이다.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창문 너머 에메랄드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색 신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롤스로이스는 아주 편안한 차죠. 동시에 아주 운전하기 쉬운 차이기도 합니다. 내일 컬리넌을 타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거예요.”
컬리넌이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
노을빛으로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릿해질 무렵, 우리는 행사장으로 모였다. 컬리넌 시리즈 II 프레젠테이션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총괄 엠마 베글리의 인사로 시작했다. “여러분께서 이비사에 몇 번이나 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처음 와봤습니다. 사실 저희 팀이 이비사로 오자고 했을 때 조금 놀랐어요. 적어도 영국에서 이비사는 명성이 있거든요. 무슨 명성인지는 아시죠?(웃음)” 엠마 역시 이비사를 클럽과 파티의 섬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 있는 말씨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비사에는 양면이 있어요. 환락의 섬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럭셔리한 라이프스타일이 깃든 섬이기도 하죠. 저희 고객들은 초고액 자산가입니다. 이비사에 집을 두고 오가는 분들이 있어요. 미국 소프트웨어 회사 임원이면서, 이비사에서 DJ로 활동하는 고객도 있고요.”
그녀는 롤스로이스가 단순한 제품 이상이라고 말했다. 차를 파는 것보다 고객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걸 위해서는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을 경험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컬리넌은 롤스로이스에게 아주 중요한 차입니다. 가장 수요가 많은 롤스로이스고, 오너의 평균연령을 낮췄죠. 또한 직접 운전하는 고객의 비중을 높였고, 더 많은 여성 고객을 끌어들였어요.” 그 이유는 명확하다. 컬리넌은 고객이 원해서 만든 차이기 때문이다. 컬리넌은 ‘매직 카펫 라이드를 즐길 수 있는 SUV’와 ‘어떤 곳에서도 운전할 수 있는 롤스로이스’를 목표로 탄생한 차다. 실제로 롤스로이스는 지난해 전 세계에 6032대를 판매했다. 119년 브랜드 역사상 가장 큰 숫자였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컬리넌이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 될 겁니다
다음 날 아침 호텔 주차장 앞에는 형형색색의 컬리넌 시리즈 II가 대기하고 있었다. 내게 배당된 컬리넌은 올리브와 황금색이 절묘하게 섞인 차. 번쩍이는 판테온 그릴 옆에는 어제 본 백색 신사와 똑같은 옷차림의 영국인 신사가 서 있었다. 그가 물었다. “롤스로이스를 운전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고, 그는 웃으며 답했다. “완벽하네요. 그렇다면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 될 겁니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크다’였다. 호텔을 빠져나가는 길은 결코 좁지 않았지만 조수석은 이미 도로 밖으로 튀어 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자동차라기보다 바퀴 달린 요트를 도로에서 타는 기분에 가까웠다. 팬텀 뒷좌석에서 느낀 매직 카펫 라이드는 신형 컬리넌 운전석에서도 여전했다. 놀라운 건 페달에 닿는 감각이다. 보통의 자동차는 급하게 출발하거나 멈출 때 앞뒤로 쿨럭거리는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 발끝 신경을 곤두세우고 페달을 세밀하게 밟아야 한다. 하지만 컬리넌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마치 운전자 머릿속에 있는 간격과 속도를 미리 읽고 그저 페달을 밟기만 하면 알아서 차가 멈추고 움직이는 느낌이다. 팬텀을 몰던 백색 신사의 말이 떠올랐다. “롤스로이스 이즈 소 이지 투 드라이브.”
직선 도로가 나오자 정숙성보다는 힘을 느껴보고 싶었다. 컬리넌에는 6.75L V12 엔진이 올라간다. 엔진은 ZF 8단 기어와 맞물려 최고 600마력의 출력을 낸다. 그 힘을 좀 더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는 운전석 뒤편 기어 레버에 달린 ‘로’ 버튼을 누르면 된다. 로 모드로 바뀌면 보닛 안에 잠들어 있던 엔진이 보다 깊은 배기음을 내기 시작한다. 발에 닿는 감각 역시 바뀌는데, 가속페달을 90% 이상 밟을 때 기어 변속은 50% 더 빨라진다.
200만 번의 바느질
컬리넌 시리즈 II의 앞자리와 뒷자리를 오가며 느낀 인상은 명확하다. 이 차는 공산품이 아닌 수제품이라는 것.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헤드레스트, 도어, 시트에 새롭게 적용된 패턴이었다. ‘플레이스드 퍼포레이션’이라 불리는 패턴은 0.8mm, 1.2mm 크기의 구멍을 1만7000개 조합해 완성된다. 롤스로이스 굿우드 본사 위에 떠 있는 구름을 형상화한 모양이라고 한다. 물론 고객이 원한다면 자신의 반려견이나 가장 좋아하는 꽃을 새길 수도 있다. 컬리넌 시리즈 II에는 시트에 가죽 대신 직물 소재 ‘듀얼리티 트윌’을 적용할 수 있다. 이 역시 예술의 경지다. 듀얼리티 트윌에 새긴 그래픽은 롤스로이스 창립자 찰스 롤스와 헨리 로이스의 이름에서 따온 ‘RR’ 엠블럼을 새롭게 형상화한 것. 의미도 특별하지만 제작 과정은 더욱 특별하다. 차 한 대에 들어가는 듀얼리티 트윌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 220만 개의 스티치, 18km의 실을 사용한다. 굿우드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만들기 때문에 약 20시간이 소요된다. 차 실내 곳곳에는 나무와 스테인리스 스틸이 사용된다. 운전석 오른편의 공조기를 손으로 쓸어내리면 실로폰을 연주하는 듯한 소리가 나는데, 각 소리는 음악가들의 테스트를 거쳐 완성됐다고 한다. 청감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차에서 연주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롤스로이스의 설명이다. 롤스로이스의 시그너처로 자리매김한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는 기대만큼 근사했다. 실내 지붕 전체를 뒤덮은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는 가죽에 800~1600개의 구멍을 뚫고, 각 구멍에 광섬유를 넣어 만들어진다. 롤스로이스 직원들은 광섬유가 가죽 표면을 뚫고 나오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검수한다고. 출발 전 영국인 인스트럭터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롤스로이스를 갖는다는 의미
롤스로이스 컬리넌은 아주 비싼 자동차다. 비싼 것으로 유명할 만큼 비싸다. 하지만 롤스로이스가 왜 비싼지, 전 세계 갑부들이 수억원을 지불하고 기나긴 대기 시간을 인내하면서도 이 차를 왜 손에 넣으려고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롤스로이스는 자신만의 럭셔리를 정립하고, 그걸 현실화하기 위해 남들이 상상하지 못 할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는다. 이것이 롤스로이스가 한 세기 넘도록 지켜온 철학이자, 그들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다.
호사품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 않다. 당장 내일 컬리넌이 이름을 따온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눈치조차 못 챌 것이다. 하지만 럭셔리의 가치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하는 것. 효율성보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 누군가의 눈에는 낭비로 보일 수 있는 것을 낭만으로 여기는 것. 그 정점에 있는 롤스로이스는 AI 시대에도 여전히 손으로 붓칠을 하고, 나무를 깎고, 실을 바늘에 꿰어가며 차를 만든다. 그렇게 롤스로이스는 지난 한 세기를 보내왔고, 다음 세기에도 그럴 것이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