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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채우는 이야기

문학 작품 속 내기의 대상, 살인의 장치, 삶의 지향점이 된 와인들.

UpdatedOn June 04, 2024

책이 가득 쌓인 골방,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와 술 한잔. 그 가운데 고뇌에 빠진 작가. 실제 그들의 삶이 어떠했든 고전 문학을 쓴 문인이 가진 이미지는 대체로 이렇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작가는 애주가였다. 올라오는 취기가 복잡한 단상을 정리해주듯, 와인 한잔도 이야기의 길라잡이가 되어 생각의 파편들을 매끄러운 길로 이끌었다. 이때 작가의 앞에 놓였던 술은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조금 더 부드럽고 감성적인 건 단연 와인이다. 문인들의 삶과 함께했으니, 그들의 작품에서 수많은 포도주를 만날 수 있는 건 당연지사. 작가와 함께 명작의 집필을 돕고, 또 그 이야기 속에 스며든 서포터이자 서브라이터에 관하여.

<맛> 로알드 달 | 샤토 브라네르 뒤크뤼

“이게 뭐냐? 이건 귀여운 샤토 브라네르-뒤크리요.”

로알드 달은 영국 아동 문학계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로 불린다. 영화로도 친숙한 <마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원작 소설을 집필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추리, 미스터리 장르에서 빛을 발한다.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MWA)가 수여하는 ‘에드거 앨런 포 문학상’을 두 차례 수상한 이력도 있다. 작가의 단편 소설 <맛>에서 와인은 내기의 주인공이다. 이야기는 마이크 부부가 유명 미식가인 리처드 프랏에게 포도주의 품종과 빈티지를 맞추는 내기를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프랏이 오감을 통해 추리해 나가며 서로의 자존심을 건 승부 끝에 정답을 도출해 낸 와인이 바로 ‘샤토 브라네르 뒤크뤼 1934 빈티지’다. 그는 “이건 아주 상냥한 포도주야. 새침을 떨고 수줍어하는 첫 맛이야. 부끄럽게 등장하지.”하며 운을 띄운다.
상냥한 포도주란 대체 어떤 맛일까. 샤토 브라네르 뒤크뤼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 생 줄리앙에서 생산된다. 남쪽으로는 퀴삭, 북쪽으로는 포이약으로 이어지는 포도밭의 중간에 위치한다. 그래서인지 이 와인은 순박하지만 견고한, 반전된 매력을 동시에 지녔다. 체리와 블루베리의 농익은 달큰함 뒤로 스파이시한 다크 초콜릿 향이 숨어있다 고개를 든다. 보르도의 특성상 일조량이 풍부해 타닌의 맛도 두드러진다. “두 번째 맛에서는 약간의 교활함이 느껴져. 또 좀 짓궂지. 아주 약간의 타닌으로 혀를 놀려.”라는 소설 속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과하게 진하거나 달지 않다는 점이다. 화려한 풍미를 과감하게 뽐내는 와인들 가운데 고목처럼 꼿꼿하게 근본을 지키며, 천천히 이야기 보따리를 풀 듯 매력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샤토 브라네르 뒤크뤼는 상냥한 포도주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맛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끼기 좋다. 

<아몬티야도 술통> 에드거 앨런 포 | 아몬티야도

“히! 히! 히! 그렇네, 아몬티야도 포도주를 마시면서 말이야.”

<빅 픽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세 가지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와인이다. 추리 소설의 창시자로 통하는 에드거 앨런 포는 작품 곳곳에서 와인을 사건의 장치로 사용했다. 1846년 출간된 그의 단편 <아몬티야도 술통>에서 아몬티야도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트리거가 되는 셰리 와인이다. 소설엔 첫 장부터 분노에 가득 찬 주인공 몬트레소르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을 모욕한 포르투나토에게 복수하기 위해 값비싼 아몬티야도 포도주로 꾀어내 살인을 저지른다. 주인공은 보란 듯이 벽돌을 쌓아 쇠사슬로 묶인 포르투나토가 갇혀있는 지하 창고를 막는다. 정신을 잃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르투나토는 아몬티야도 와인을 갈망한다.
“페니실린이 병자를 치료할 수 있다면, 스페인 셰리는 죽은 이를 살려낼 수 있다.” 세균학자인 알렉산더 플레밍은 셰리 와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아몬티야도는 피노 스타일로 양조된 와인을 7년가량 숙성시킨 후 브랜디를 섞어 완성한다. 색은 짙은 갈색을 띄며 첫맛은 씁쓸한 약 맛이 느껴진다. 파삭한 산미가 휘몰아친 후에는 고소한 견과류의 여운이 남는다. 드라이한 피니시 덕에 식전주로 훌륭하다. 위에 언급한 세균학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포르투나토가 마지막 순간에 부르짖은 것은 와인이 아닌 구원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후의 죽음> 어니스트 헤밍웨이 | 샤토 마고 & 샤토 오 브리옹

“사람의 몸은 모두 그럭저럭 시들어져서 죽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샤토 마고나 오 브리옹을 완전히 향락하는 즐거움을 나에게 줄 입맛을 가지고 싶다."

문학과 와인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 있다.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의 삶을 요약하자면 술과 모험으로 가득했던 20세기 완벽한 인사이더. <오후의 죽음>은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던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논픽션이다. 그는 스페인 산 페르민 축제에 방문해 투우를 즐기며 글을 써 내려갔다. 작품에서 헤밍웨이는 “사람의 몸은 모두 그럭저럭 시들어져서 죽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샤토 마고나 오 브리옹을 완전히 향락하는 즐거움을 나에게 줄 입맛을 가지고 싶다.“라고 말한다. 찰나인 삶에서 오직 와인을 즐기기 위해 자신의 미각을 개발하고 싶어 한 것이다. 그에게 와인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삶의 지향점이었다.
샤토 마고와 샤토 오 브리옹은 프랑스 보르도 5대 샤토 와인이다. 특히 샤토 마고는 헤밍웨이의 ‘애착 와인’이다. 사랑하는 손녀의 이름을 ‘마고 헤밍웨이’로 지었을 정도. 마고는 보르도 지역의 마을 이름인데 주변 지역보다 고도가 조금 높아 와인에서 독특한 산미를 느낄 수 있다. 잘 익은 블랙커런트와 가죽, 토바코의 깊은 향은 풍만한 여운을 선사한다. ‘보르도 와인의 여왕’이라는 애칭만큼이나 비단 같이 부드러운 타닌의 질감 또한 매혹적이다.
샤토 오 브리옹은 5대 와인 중 유일하게 메독 지역이 아닌 보르도 남부인 그라브 지역에서 생산된다. 1423년부터 포도를 재배하여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샤토이기도 하다. 샤토 오 브리옹에 코를 갖다 대면 거친 나무의 향기가 파고들고, 이어서 농익은 체리와 자두의 달착지근한 맛이 혀를 적신다. 작은 와인병에 거센 역경과 달콤한 순경을 오가는 삶을 응축해 놓기라도 한 걸까. 월요일, 오늘 밤에는 샤토 오 브리옹을 마시며 <오후의 죽음>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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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editor 유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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