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장에 살아남은 스위스의 고급 기계식 시계 브랜드는 모두 저마다 특수한 고민을 안고 있다. 잘되면 잘돼서 고민, 안 되면 안돼서 고민이다. 시계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다 비슷해 보이는 물건들을 신나서 비싸게 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어느 정도 그런 면도 있지만) 세상은 냉정하다. 공짜는 없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쉬운 성공은 없다.
튜더의 자랑이자 고민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시계 브랜드와 사실상 한 몸이라는 것이다. 튜더는 롤렉스의 자매 브랜드다. 처음부터 롤렉스 제품의 확장성을 높이려 만들어졌고, 그 결과 롤렉스보다 조금씩 미묘하게 사양과 가격을 낮추며 시장에 진입했다. 이걸 낭만적인 말로 표현하면 ‘롤렉스는 점잖은 맏이인데 튜더는 활기찬 막내’ 같은 게 된다. 언젠가 만난 어느 시계 애호가는 조금 더 직설적인 말로 표현했다. “롤렉스에서라면 못 할 온갖 일을 튜더로는 해보는 거죠.” 뭐든 두 가지는 확실하다. 롤렉스와 튜더는 뭔가를 공유하는 동시에 방향성이 확실히 다르다.
튜더와 롤렉스의 차이 중 하나가 라인업 수다. 롤렉스가 새로운 라인업을 내는 데 굉장히 보수적인 데 비해 튜더는 상당히 많은 라인업을 낸다. 컬래버레이션이나 더블 네임, 한정판 전략도 둘은 완전히 다르다. 롤렉스는 2023년인 작년에야 브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한정판을 냈다. 브랜드 정책이 덜 엄격하던 1990년대를 지난 뒤에는 자사의 이름 외에 다른 걸 다이얼에 새기지 않는다(예전에는 도미노피자 로고도 새겼다).
반면 튜더는 멋진 공식/비공식 컬래버레이션 경력이 잦다. 2023년에는 지금 상당히 각광받는 뉴욕 패션 브랜드 로잉 블레이저와 협업한 시계를 냈다. 공식 판매는 아니지만 에드 시런이 자신의 월드 투어 콘서트 답례품을 튜더 시계로 정하기도 했다. 그는 튜더 블랙베이 다이얼의 6시 방향에 ‘디바이드’ 투어 나눗셈 로고를 그리고 케이스백에 감사 인사를 새겼다. 롤렉스는 브랜드 이미지가 굉장히 강한 만큼 여러 이유로 라인업을 보수적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다. 튜더는 확실히 여러 면에서 유연하다.
유연한 튜더는 2023년 8월 또 한 번 유연한 신제품을 선보였다. 베이스 모델은 튜더의 다이버 시계인 펠라고스 FXD, 협업 파트너는 알링기 레드 불 레이싱이다. 알링기 레드 불 레이싱은 스위스의 고성능 레이싱 요트팀, 이 시계는 제품 면에서도 의미 면에서도 상당히 흥미롭다. 라인업 면에서, 소재 면에서, 캐릭터 면에서.
알링기 레드 불 레이싱은 스위스의 요트팀이다. 여기서 요트는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무동력 요트를 말한다. 무동력 요트는 전통적인 서양인의 극기 스포츠이자 럭셔리 스포츠인데, 이를 이해하려면 서양인의 럭셔리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동양의 호사가 단순히 극진한 환대 정도에 머무르는 반면, 서양 문명에서 럭셔리는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도전 그 자체다. 그 도전과 성취에 바치는 트로피가 럭셔리 굿즈라는 세계관이 분명히 있다.
그 면에서 요트는 영원한 럭셔리 스포츠다. 바다는 늘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하다. 그 안에서 제한된 규칙을 지키며 팀플레이로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이야말로 서양식 엘리트 스포츠의 조건이다. 위험과 극복, 규칙과 창의성. 알링기는 그중에서도 남다르다. 알링기의 고향 스위스는 바다는 없고 호수만 있다. 스위스인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첨단 소재와 설계 등 공학적 방법론을 통해 민물에서 개발했는데 바다에서도 잘 달리는 요트를 만들었다. 알링기는 2003년 아메리카스컵에 데뷔하자마자 우승하는 등 눈에 띄는 성과를 많이 거뒀다.
알링기는 스위스의 요트팀인 만큼 많은 시계 브랜드가 알링기와 함께했다. 오데마 피게의 로얄 오크 오프쇼어, 위블로의 킹 파워,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등 각 브랜드를 대표하는 라인업에서 알링기 팀과 협업하며 시계를 출시했다. 튜더 펠라고스 FXD ‘알링기 레드 불 레이싱 에디션’ 역시 이 영광의 흐름을 계승하는 시계다.
서양 문명에서 럭셔리는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도전 그 자체다.
그 도전과 성취에 바치는 트로피가 럭셔리 굿즈라는 세계관이 분명히 있다.
펠라고스 FXD ‘알링기 레드 불 레이싱 에디션’
레퍼런스 M25707KN-0001 케이스 지름 42mm 케이스 소재 카본 콤퍼짓 스트랩 줄리앙 포레 블루 패브릭 스트랩 무브먼트 MT5602 기능 시·분·초 표시 구동 방식 오토매틱 시간당 진동수 2만8800vph 한정 여부 없음 가격 521만원
알링기의 이름을 새긴 시계들은 모두 남다른 소재를 사용했다. 시각적으로 검은색 무광 소재. 이는 알링기 요트에 쓰인 카본을 뜻한다. 알링기는 탄소 합성 소재, 티타늄, 스테인리스스틸을 조합해 선체가 수면 위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기 때문이다. 튜더 펠라고스 FXD 알링기 레드 불에도 이 아이디어가 반영되었다.
튜더 펠라고스 FXD 알링기 에디션은 의미 부여에 따라 여러 면에서 특별하다. 일단 오데마 피게부터 오메가까지 이어지는 ‘알링기 시계’의 멋진 전통을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기존 튜더 펠라고스 FXD에서 볼 수 없던 케이스 소재를 적용한 것도 매력적이다. 특히 사진에는 없지만 라인업 최초로 펠라고스 FXD에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적용한 시계도 출시했다.
이 시계의 도화지 역할을 하는 펠라고스 FXD도 남다른 사연이 있다. 펠라고스는 이들의 다이버 시계 라인업, FXD는 ‘고정되었다’는 뜻의 픽스드(Fixed)를 뜻한다. 시계의 케이스와 스트랩을 이어주는 부분인 ‘러그가 고정되었다’는 뜻이다. 펠라고스 FXD는 1950년대 프랑스 해군 잠수부대의 시계로 개발되었다. 튜더는 더 튼튼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시계의 러그와 케이스를 일체화한 케이스를 만들었다. 기능을 위해 만든 디자인이 훗날 컬트가 되어 2021년 부활했다. 튜더 특유의 실험적인 행보가 드러나는 시계라 할 수 있다.
더 실험적인 건 케이스 소재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시계의 색은 무광 검정이다. 스틸 케이스에 별도 코팅을 한 게 아니라 원래 이 색이다. 카본이 들어간 플라스틱계 화합물인 카본 콤퍼짓으로 케이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카본 콤퍼짓 케이스인 덕에 일반 펠라고스보다 더 가볍고, 금속이 아닌 만큼 특별판인데 가격까지 조금 더 저렴하다. 시계의 무게감이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만으로도 매력적일 만큼 무게가 가볍다.
주요 부품마다 소재가 다르다는 점은 이 시계의 숨은 재미 요소다. 이번 시즌 알링기 팀이 탑승하는 AC-75가 카본 콤퍼짓, 티타늄, 스틸을 각 부위에 쓴 것처럼 튜더 펠라고스 FXD 알링기 레드 불 레이싱 에디션 역시 영리하게 소재를 섞었다. 케이스는 탄소 합성 소재. 베젤과 크라운은 티타늄. 레드 불 레이싱의 로고를 새긴 케이스백은 스테인리스스틸이다. 기능과 무게와 가격 사이에서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
알링기 요트의 색을 잘 이식한 배색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AC-75의 주된 색은 레드 불이 즐겨 쓰는 짙은 남색과 방점을 찍는 빨간색이다. 다이얼과 스트랩의 색 배합도 그를 따른다. 주된 색은 남색, 초침과 스트랩 끝부분 등 눈에 띄는 곳에 적당한 빨간색. 사실 역대 알링기 시계는 완성도와 의미를 떠나 일상에 차기엔 디자인이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는데 튜더의 알링기 시계는 일상에서 차기에도 훌륭하다. 밝은 파란색 광택을 내는 슈퍼 루미노바 역시 따로 언급할 가치가 있을 만큼 멋지다.
도전적인 소재와 색을 섞은 이 시계의 근본은 튼튼하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롤렉스와 튜더의 가장 큰 실력은 만듦새 자체다. 시계에 탑재된 무브먼트 MT 5602는 COSC 인증을 받아 정확성과 내구성이 입증된 무브먼트다. 완전히 태엽을 감았을 때의 동력 잔량(파워 리저브)도 70시간이나 되어 며칠 안 차도 안심이다. 방수 성능은 다이버 시계라는 이름에 걸맞은 200m. 베젤은 다이버 시계의 기준 대신 프랑스 해군과 함께했다는 원래의 콘셉트에 충실한 양방향 회전 베젤이다. 베젤이 돌아가는 느낌도 견고하다.
그 결과 이 시계는 지금의 고급 시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매력을 지닌다. 지금 이 가격에 이 정도로 도전적인 콘셉트와 편안한 착용감과 청량한 색감을 갖춘 시계는 없다. 이 시계에 관심이나 욕구가 없다면 모를까 한번 이 시계에 눈이 간다면 다른 시계로 대체할 수 없다. 동시에 강렬한 매력은 그만큼 리스크가 될 수도 있다. 남과 다르다는 건 한국에서 좋은 일이 아니다. 아무리 매력 있는 시계에 대해서도 한국 시장은 보수적이다. 이 시계의 매력과 별개로 이 시계가 어느 정도 인기를 얻을지는 미지수고 게다가 지금은 불경기다.
그러나 세상 어딘가의 안목 좋은 누군가 이걸 세 번째 시계로 택해줬으면 좋겠다. 첫 시계를 적당히 무난한 것으로 하고 두 번째 시계를 심심할 정도로 단정한 걸 골랐다면, 세 번째 시계 정도에는 조금 도전적인 선택을 해도 좋다. 요즘은 도전 자체에 치중하느라 완성도나 가격 대비 구성이 애매한 시계도 왕왕 있지만, 적어도 튜더 시계에 대해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튜더는 롤렉스와 한 집안이고, 롤렉스계 시계의 큰 매력은 디자인도 재판매 가치도 아닌 성능 자체다. 무브먼트는 정확하고 케이스는 튼튼하다. 착용감은 편안하고 시간은 잘 보인다. 이 기본을 해내는 게 결코 쉽지 않음을 안다면 이 시계에 한번쯤 더 눈길이 갈 것이다.
끌림 요소
+ 길거리에서든 동창 모임에서든 확실히 보장될 희소성
+ 카본 콤퍼짓 소재로 구현된 압도적 경량
+ 스위스 시계의 느끼함과 달리 경쾌한 색감
망설임 요소
- 역대 알링기 시계는 모두 재판매 가치가 낮아짐
- 카본 콤퍼짓을 강화 플라스틱이라 본다면 상당히 비싼 가격
- 러그가 고정된 만큼 상당히 줄어드는 스트랩 호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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