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스승님으로 모시는 분이 몇 명 있다. 한 분은 도쿄에 사는 한국인이다. 그에게 시계를 보는 심미안과 열린 자세를 배웠다. 그는 바쉐론 콘스탄틴과 예거 르쿨트르와 파네라이가 있고, 그런 걸 차고 환기도 안 되는 고깃집에서 고기를 굽는 멋도 있다. 돈과 상관없는 교양을 추구하는 재미를 알아서 직업과 전혀 상관없는 미술책을 보고, 그러면서도 가라테 유단자다. 시계는 내 직업의 일부이자 그의 취미의 일부이니 만나면 자연히 시계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지난 연말에 봤을 때 그는 처음 보는 시계를 차고 있었다.
“무브먼트 완성도도 높고 크로노그래프 기능도 있어요”라는 말로 소개하는 그 시계는 시계 담당 에디터인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스위스에서 새로 설립된 독립 시계 브랜드 제품이었다. 정식 홈페이지도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크라우드펀딩으로 구매했다고 한다. 약간 놀랐지만 그는 바쉐론 콘스탄틴의 높은 세공 기준과 빈티지 공작기계로 만든 무늬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다. 그 눈으로 고른 시계는 역시 훌륭했다. 확실히 가격을 뛰어넘는 세공과 무브먼트 설계를 갖췄다. 그래서 값은 200만원대. 시계를 인지도로 사는 사람이라면 놀랄 가격(‘듣보’ 시계가 그 값이라니)이었다. 시계의 스펙을 아는 사람에게는 다른 의미에서 놀랄 가격이었다(그 스펙이 그 가격에 구현 가능하다니). 나는 그의 구매를 납득했다.
그처럼 독립 시계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시계 애호가들이 늘고 있다. 인터뷰로 만난 스위스의 시계 프로페셔널들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좋아하는 브랜드로 독립 시계 브랜드의 이름을 대곤 한다. 독립 시계란 무엇일까? 정의로만 따지면 ‘그룹에 속하지 않은’ 시계다. 요즘 시계들은 거의 스와치, 리치몬트, LVMH, 케링 등 대형 패션 그룹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다만 이런 개념이라면 그룹에 속하지 않고 운영되는 파텍 필립이나 쇼파드도 일종의 독립 시계가 된다. 이 기사에서 말하는 독립 시계는 새로운 시계를 만드는 소규모 신생 독립 브랜드라 생각하면 된다. 음악으로 치면 인디, 뮤지컬이라면 오프 브로드웨이.
독립 시계의 매력을 요약하면 개성과 가격이다. 그룹에 속해서 전 세계로 팔리는 시계는 어떤 의미로든 다듬어질 수밖에 없다. 큰 시장을 위해서는 타협하는 게 맞다. 독립 시계는 반대로 강렬한 개성이 있다. 시간을 보여주는 공학적 방법부터 미적인 디자인까지. 기성 럭셔리 손목시계보다 저렴한 가격도 매력이다. 직접 만들어 바로 팔다 보니 럭셔리 그룹사의 고급 시계보다 월등히 저렴할 수 있다. 백화점 브랜드에서 5천만원짜리 시계에 들어가는 세공이 2천만원짜리 독립 시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독립 시계는 의외의 신흥 투자처로 기능한다. 인기가 생기면 2차 시장에서 프리미엄이 붙는 건 독립 시계도 마찬가지다. 소규모 독립 시계는 애초부터 시계의 수가 적으니 프리미엄이 더 커진다. 이제는 구할 수도 없는 전설의 독립 시계 필립 듀포가 대표 사례다. 실제로 해외 애호가 중에서는 가격 상승분을 예상하고 입도선매하듯 유명 독립 시계 브랜드의 시계를 사는 사례가 있다.
그러나 독립 시계의 진짜 매력은 교양으로서 시계를 즐긴다는 점이다. 취미로의 기계식 손목시계는 인류 기계 문명의 정신을 이어가는 공학적/공예적/지적 유희다. 새롭게 설계한 무브먼트, 일부러 옛날 방식으로 진행하는 디테일 마무리, 오늘날의 레디메이드 럭셔리 비즈니스 발상으로는 넣을 수 없는 디테일과 순수, 독립 시계에는 그런 게 아직 남아 있다. 돈도 뽐내기도 아닌, 손목 위의 동전만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교양 기계공학과 금속공예가 어우러진 시계의 세계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에게 독립 시계는 마지막 남은 오아시스 같은 것이다.
내가 지켜보는 독립 시계도 있다. 취리히의 올렉 앤 와즈다. 이 브랜드의 멋은 1000m 방수다. 1000m까지 방수가 되는 시계를 갖춘 브랜드는 많지 않다. 있다 해도 1000m 방수 시계는 평균 기천만원은 줘야 한다. 올렉 앤 와즈의 1000m 방수 시계는 2024년 2월 현재 한화로 약 200만원, 주요 브랜드가 출시하는 1000m 방수 시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이다. 나는 이제 이런 시계가 좋다. 언젠가 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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