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대학로 | 이홍도 / 극작가
나는 대학로에 5년째 살고 있고 여전히 대학로를 서울에서 가장 좋아한다. 처음 서울에 올라온 건 스무 살 때. 대학 시절에는 학교 근처의 동작구와 관악구를 다녔다. 신촌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신촌에서 연애하고 신혼집까지 얻는 경우도 있다는데, 나는 이상하게 학교 근처 동네에는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대학로에 갔다. 대학로는 뉴욕 브로드웨이와 비교해도 특별한 면이 있다. 브로드웨이는 메인 극장이 20개 정도고 오프브로드웨이와 오프-오프브로드웨이 극장들은 뉴욕의 다른 지역으로 많이 흩어졌다. 반면 대학로는 200개가 넘는 극장이 한 지역에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데 이는 전 세계적으로 아주 드물고 독특한 경우다.
30대 초반이 된 지금. 대학로를 걸어다니는 20대를 보면서 10년 전 어설펐던 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대학로를 찾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더 좋은 동네를 못 가는 이들이 대학로에 오는 것 같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로 물가가 다른 동네보다 더 싼 것도 아니다. 경험도 정보도 부족한, 갓 상경한 20대들이 ‘대학로’라는 이름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이곳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대학로는 오래된 번화가지만 다른 동네에 비해 알짜배기 식당도 별로 없다. 20대 초반의 나이에만 갈 법한 얄팍한 콘셉트의 가게들이 많다. 그럼에도 내가 대학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향수다. 내가 꿈꾸고 웃고 사랑했던 기억이 낡은 골목 곳곳에 서려 있다. 대학로는 다른 서울 동네처럼 풍경이 휙휙 바뀌지 않는다.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듯한 오래된 노포들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느낀다.
대학로는 이름 그대로 대학생이 군집한 동네다. 때가 되면 떠날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건 오래된 극장과 가게들뿐이다. 근사하다고 할 수도, 특별하다고 할수도 없지만, 나는 그런 대학로의 모습이 좋다.
“그럼에도 내가 대학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향수다.
내가 꿈꾸고 웃고 사랑했던 기억이 낡은 골목 곳곳에 서려 있다.”
② 낙성대 | 차주현 / 엔터테인먼트 뮤직 콘텐츠 담당자
나는 소주를 좋아한다. 물론 맥주도 잘 마신다. 그런 내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술집은 낙성대에 있다. 가게 이름은 ‘락앤롤’. 락앤롤은 오래된 LP 바다. 일단 락앤롤에는 정말 LP가 많다. 신청곡을 받는데 거의 웬만한 노래는 다 LP로 구비하고 있다. 가게 이름을 의식해서인지 손님들도 최신 한국 발라드나 K-팝보다 엘비스 프레슬리, 섹스 피스톨즈, 라디오헤드 등 로큰롤 밴드 음악을 주로 신청한다.
요즘 인스타그램에선 오래된 노포나 빈티지한 인테리어의 음식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로큰롤은 인스타그램 친화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걸 의도하고 꾸린 공간은 아니다. 매장 안에는 10석 정도 갖춘 바가 있어 혼자 찾기에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이곳에서는 레드락 생맥주를 판다. 분위기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마시는 생맥주는 다른 술집의 생맥주와 달리 늘 특별하게 느껴진다.
서울의 동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사람 사는 동네와 놀러 가는 동네. 낙성대는 전자에 해당한다. 근처 서울대입구역 쪽으로 가면 젊은 대학생과 사장들이 모여 만든 번화가 ‘샤로수길’이 있지만, 내 취향은 인헌시장 쪽에 가깝다. 낙성대는 오래된 동네다. 아파트보다는 빌라가 많고, 대형마트보다 동네 슈퍼마켓과 편의점이 많다. 특히 인헌시장 근처에는 블로그 리뷰를 찾아볼 수 없는 가게들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다.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충실하게 제 몫을 해내는 가게가 많다는 뜻이다.
밤 10시 넘어 낙성대역 근처를 산책하다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젊은 부부인지 오래된 커플인지 알 수 없는 잠옷 차림의 남녀들이 많다는 것. 그중에 평생 낙성대에서만 살아오신 듯한 어르신도 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이상한 안도감이 든다. 그 기분은 ‘서울에 있다’보다 ‘푸근한 마을에 온 것 같다’는 기분에 가깝다. 내가 느낀 낙성대는 오래됐지만 불편하지 않고, 특별하진 않지만 지루한 법이 없는 동네다. 그런 낙성대를 나는 무척 좋아한다.
“내가 느낀 낙성대는 오래됐지만 불편하지 않고,
특별하진 않지만 지루한 법이 없는 동네다.”
⑥ 망원동 | 배수용 / 목수
망원동에 산 지 올해로 9년째다. 행정구역상 합정동에 산 적이 있지만, 거리나 생활반경를 따지면 망원동으로 봐도 좋은 동네다. 20대 초반 음악하는 형들을 따라 영문도 모른 채 망원동 반지하방에 자리 잡았다. 반짝이는 날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편의점 음식만 먹던 때도 있었고, 하루에 한 끼만 먹은 날도 적지 않다.
좋은 날도 많았다. 우연히 마주쳐 연애까지 하게 된 여자가 마침 망원동에 살았고, 지금은 그 여자와 망원동에서 아들을 함께 기르고 있다. 그러니 망원동을 내 20대의 희로애락이 깃든 곳이라 해도 좋겠다.
아이를 낳고 깨달은 사실이 있다. 망원동에는 제대로 된 인도가 없다. 골목 어귀에서는 늘 차가 튀어나오고, 보도블록은 좁고 울퉁불퉁하다. 유모차를 끌고 나서야 망원동의 불편함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망원동은 놀기 좋은 동네다. 그 이유 중에는 사람도 있다.
망원동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크게 세 부류다. 백팩에 키링을 달고 다닐 듯한 귀여운 20대 커플들. 수염이 많고 왠지 서핑을 좋아할 것 같은 히피 스타일의 30대 커플들. 평생을 망원동에서 살아온 듯한 과일 장수 스타일의 어르신들. 하나같이 무해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망원동에는 유흥가라고 할 만한 거리가 없어 밤에도 조용히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다들 아시다시피 망원동에는 카페가 많은데, 성수동이나 한남동처럼 대형 카페는 거의 없다. 대부분 적은 예산을 들인, 주인의 특색이 드러나는 개성적인 카페들이다. 노트북을 켜고 오랫동안 카페에서 작업할 일이 없는 내게는 망원동 카페의 작고 불편한 의자도 감점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가게마다 조금씩 다른 인테리어와 가구를 들여다보는 게 내게는 직업적으로 더 도움이 된다.
“유모차를 끌고 나서야 망원동의 불편함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망원동은 놀기 좋은 동네다.”
경의 중앙 한남오거리 | 전진오 / 스타일리스트
한남동은 우리나라에서 비싼 동네 중 하나지만, 한남오거리는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오늘의 한남동으로 변모하기 전 한남동의 모습을 간직한 동네가 한남오거리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친근한 느낌이 있는데 나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맛집도 많다. 한남오거리에 자주 들르기 시작한 건 ‘한남동한방통닭’ 때문이었다. 이곳 한방통닭이 끝내준다. 하지만 이영자가 다녀간 뒤로 사람이 너무 많아져 가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요즘은 ‘넘버원양꼬치’와 ‘24시뼈다귀감자탕’을 자주 간다. 한 달에 못해도 두 번씩은 간다. 아내랑 데이트를 하거나 지인들과 모임이 있을 때면 무조건 한남오거리다.
한남동을 좋아하는 사람과 한남오거리를 좋아하는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내 기준에 ‘뭘 좀 아네’ 하는 사람들은 후자다. 소주 마실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될까?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면 폼 잡고 칵테일 마시는 사람보다, 감자탕에 소주 마시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
한남오거리에는 멋쟁이도 많다. 근처 이태원에도 멋쟁이는 많지만 둘 사이에 차이점은 있다. 브랜드로 비유하자면 한남오거리는 더 로우다. 정체성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오직 원단과 패턴으로만 승부하는 브랜드다. 이태원은 발렌시아가다. 10m 멀리서 봐도 어떤 브랜드인지 알 수 있다. 누가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남오거리와 이태원은 그만큼 다르다.
만약 10년 전 내게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를 물었다면 신사동이라 답했을 것 같다. 신사동 가로수길은 옷가방을 한가득 싸 들고 서울 곳곳을 다녀야 하는 스타일리스트에게는 휴게소이자 전초기지 같은 곳이다. 일하고 먹고 일하고 노는 것까지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요즘 강남은 아주 꽉 막혔다. 내가 강남에서 나고 자라서 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일 때문에 청담동에 갈 일이 많은데 갈 때마다 ‘삭막한 동네군’ 싶다. 일단 나 같은 일반인이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없다. 심지어 김밥천국도 안 보인다. 한방통닭 때문에 한남오거리를 좋아하게 된 사람으로서, 김밥천국 하나 없는 동네는 전혀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한남동으로 변모하기 전
한남동의 모습을 간직한 동네가 한남오거리라고 생각한다.”
수인 분당 압구정 로데오 | 김영민 / 사진가
압구정이 요즘 20대 사이에서 ‘핫플’이라지만 내게는 여전히 마음의 고향이다. 압구정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고 군대 갈 때까지 압구정을 떠난 적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압구정에는 소위 ‘힙한’ 것들이 많았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2000년대 압구정은 힙합의 본거지였다. 강북에서 스키니 팬츠를 입고 다닐 때, 압구정에서는 스트리트 브랜드의 통 넓은 바지를 입었다. 당시 압구정에 있던 캠프, 오일, 아폴로, 블리츠, 러벤 같은 편집숍에서는 한국에서 못 구하는 아이템들을 볼 수 있었다. 요즘 친구들에게도 익숙할 카시나 역시 그 무렵 압구정에 들어섰다.
압구정이 빨랐던 건 패션만이 아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압구정에 문을 연 맥도날드 1호점은 나와 친구들에게 생일 파티 하는 장소였다. 새로운 카페가 생겼다고 친구 따라 들어간 카페는 나중에 알고 보니 스타벅스였다. 그 스타벅스는 우리나라 34호점인데, 지금은 서울에만 약 600개가 있다.
작년에는 슈프림이 압구정에 문을 열었다. 전 세계에 슈프림 매장이 있는 동네는 20곳이 안 된다. 슈프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징적인 일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내가 가는 압구정은 오래된 식당과 술집들이다. 그중 하나는 ‘뱃고동’.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로 가장 자주 찾는 가게다. ‘호화반점’에도 추억이 있다. 지금은 발레파킹이 되는 식당이지만, 어렸을 때는 배달로 시켜 먹던 집이다. 호화반점 자장면 맛은 신기할 정도로 그대로다.
압구정은 한때 망하다시피 했다가 최근 다시 뜨고 있다. 요즘 친구들은 내가 압구정을 찾는 이유와는 다른 이유로 압구정을 찾는다. 사람이 많아져서 불편한 점도 있지만 고향 같은 동네가 관심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기대하는 건 딱 하나다. 20년 후에도 뱃고동, 호화반점처럼 추억을 더듬으면서 찾을 수 있는 가게들이 있었으면 한다.
“요즘 친구들은 내가 압구정을 찾는 이유와는 다른 이유로 압구정을 찾는다.
사람이 많아져서 불편한 점도 있지만 고향 같은 동네가 관심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③ 세곡동 | 이상휘 / 유튜브 채널 <자동차 읽어주는 남자> 운영자
세곡동은 강남구에 들어가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강남이 아니다. 세곡동을 색깔로 표현하자면 초록색이다. 일단 공원이 아주 많다. 세천공원, 행복어린이공원, 도담어린이공원, 쉼표소공원, 은곡마을공원 등등 걸어서 10분 거리 안에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강아지 산책시키는 사람도 엄청 많다. 길을 걷다 보면 1분에 한 마리씩 마주친다. 견주는 대부분 젊은 부부나 50대 이상의 노부부다. 이리저리 고개를 둘러보면 테라스 딸린 고급 주택도 눈에 들어온다. 동네 전체에 차분하고 평온한 기운이 맴돈다. 분주해 보이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하나같이 여유 있어 보이는 사람들뿐. 그런 풍경 속에서 연인과 걸으면 ‘우리도 언젠가 저렇게 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지도 모른다. 나 역시 세곡동을 함께 걸었던 연인과 그런 이야기를 나눴고 지금은 부부가 됐다.
내가 세곡동을 찾는 이유 중에는 셀프 세차장도 있다. 주말 아침 차를 끌고 나와 꼼꼼히 세차를 마치고 커피 마시는 게 나의 주말 행복 중 하나다. 세곡동은 차도 안 막힌다. 일 때문에 시승차를 끌고 서울 도심을 달리다 보면 꽉 막힌 도로를 헤쳐나가는 게 업무 시간을 아주 많이 차지한다. 서울에는 교통체증 때문에 가고 싶지 않은 동네들이 있는데, 세곡동은 그 반대 이유로 자주 찾게 되는 동네다. 주차 걱정도 없다. 세곡동에 가면 작은 카페 골목을 찾는데 도로 한쪽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세곡동에는 유흥 거리가 없다. 지금도 세곡동을 자주 들르지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먹자골목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술을 좋아한다면 아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차를 끌고 세곡동을 찾는 입장에서 단점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먹거리다. 데이트 코스라면 괜찮은 디저트 가게 두엇쯤은 있는 게 좋은데 그런 점이 아쉽긴 하다. 그럼에도 추천할 만한 빵집은 있다. 세천공원 옆에 있는 ‘은곡빵집’. 우유식빵, 플레인바게트, 치아바타로 유명하다.
“서울에는 교통체증 때문에 가고 싶지 않은 동네들이 있는데,
세곡동은 그 반대 이유로 자주 찾게 되는 동네다.”
⑧ 석촌동 | 조한솔 / ‘이케아’ 비주얼 머천다이저
잠실에서 갈 만한 동네는 두 곳이다. 석촌동과 방이동. 나는 만나는 친구에 따라 둘 중 한 곳을 정한다. 동네 친구와 저녁 먹고 가볍게 술도 할 생각이라면 석촌동. 멀리서 온 친구와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신다면 방이동이다. 석촌동은 마름모꼴로 생겼다. 한 번 마름모꼴 안에 들어가면 다른 동네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지하철역은 마름모 양 가장자리에 있고, 큰길마다 다니는 버스 노선도 제각각이다.
석촌동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다면 불편한 교통은 특별한 문제가 안 된다. 일단 석촌동에는 할 게 많다.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맛집은 없지만, 젊은 사장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꾸미고 준비한 가게들이 골목마다 가득하다. 다른 동네는 몇 번 가면 거기가 거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적어도 석촌동은 아직 내게 찾아갈 곳이 많은 동네다.
지리적인 장점도 있다. 석촌동에는 언덕이 없다. 블록식으로 구성된 석촌동은 애초에 길 찾기 쉬운 동네지만, 오르막길이 없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때도 체력적인 부담이 적다. 그 덕분인지 강아지 산책시키는 사람도 정말 많다. 강아지 구경은 나의 서울 동네 구경 중 큰 즐거움이다. 카페 창문 너머로 열심히 냄새를 맡고 다니는 강아지들을 보다 보면 함께하는 친구와 대화가 끊겨도 어색할 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개팅 장소로도 추천하고 싶다.
실제로 석촌동에는 커플들이 많다. 카페, 맛집이 생기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데이트 코스로 정체성을 굳힌 듯하다. 그런데 성수동이나 홍대에서처럼 ‘나 오늘 데이트한다!’ 하는 느낌의 커플들은 별로 없다. 원피스보다는 스웨트 셔츠가 많은 동네랄까? 모자 쓴 사람들도 많다. 그래도 데이트하러 오는 동네니 아무 모자나 쓰는 분위기는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발렌시아가 모자를 쓴 사람은 없었지만, 아크테릭스, 슈프림, 디젤 모자를 쓴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석촌동에는 할 게 많다.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맛집은 없지만,
젊은 사장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꾸미고 준비한 가게들이 골목마다 가득하다.”
② 신당동 | 정명우 / ‘웨슬리 바버샵’ 원장
신당동은 신기한 동네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는데 가게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다. 독특한 가게도 많다. 신당동은 과거에 무당집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로 겉모습은 무당집처럼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막상 들어가면 이자카야 스타일의 술집인 경우도 봤다.
10년 전 내게 신당동은 떡볶이 먹으러 가는 동네였다. 떡볶이 골목의 인기는 여전하지만 더 깔끔해졌다. 지금은 떡볶이가 당기지 않는 날에도 신당동을 찾는다. 기분은 내고 싶은데 사람 많은 곳은 싫고, 맛있는 건 먹고 싶은데 뭘 먹을지 모를 때 가는 곳이 서울중앙시장이다. 시장에 가면 커플 모임, 남자 모임, 여자 모임, 중년 모임 등 다양한 모임을 볼 수 있다. 그 다양함 속에 뭔지 모를 안정감이 있다.
사실 남자들끼리 모이면 한남동이나 성수동에 가기 애매하다. 두 동네는 ‘데이트 코스’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반면 신당동은 동네 사람들과 놀러 온 사람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해방촌 신흥시장과 용산 이촌시장도 자주 가는 편이다. 신당동에서 추천하는 식당은 ‘하니칼국수’. 노포 분위기의 칼국숫집인데 알곤이칼국수와 하니 보쌈 조합이 끝내준다. 뭘 먹을지 모르겠다면 서울중앙시장으로 가면 된다.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면 놀기는 좋은데 살고 싶지 않은 동네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을지로, 홍대, 이태원이 그렇다. 신당동은 놀기도 좋고 살기도 좋은 동네다. 가장 큰 이유는 교통. 2호선과 6호선이 있고, 서울 중심에 위치해 다른 동네를 오가기도 좋다. 내게 해당되는 장점은 아니지만 신당동에는 초중고등학교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당장 학교를 보낼 자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술집보다 학교가 많은 동네에 살고 싶다.
“신당동은 동네 사람들과 놀러 온 사람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다.”
② 연희동 | 박은비 / ‘크림’ 콘텐츠팀 인턴
연희동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고즈넉함과 세련됨. 연희동은 높은 건물이 없는 주택가다. 연희동 주택들은 오래됐지만 낡고 지저분한 인상을 풍기지 않는다. 주택가처럼 보이는 건물 곳곳에는 카페와 음식점이 있다. 가장 자주 찾는 카페는 ‘다크에디션커피’. 이 동네의 터줏대감 같은 가게로, 이곳 드립커피는 ‘인스타그램 업로드용 카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한 풍미를 낸다.
친구들을 연희동에 데려갈 때면 ‘일본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높이가 낮고 깔끔한 주택가의 모습에서 일본을 느끼는 것 같다. 나 역시 동의한다. 단, 도쿄가 아닌 후쿠오카. 도쿄는 어떤 동네를 가든 사람이 많고 번잡하지만, 후쿠오카는 일본 특유의 정갈함이 있으면서도 차분한 인상을 풍긴다. 후쿠오카에 갔을 때 ‘연희동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연희동에는 특징이 또 있다. 큰 개가 많다. 마당이 있는 주택이어서인지 다른 동네보다 대형견을 확실히 많이 키운다. 그중에서도 골든레트리버가 많은데, 골든레트리버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펫 프렌들리 카페도 많아서 길에 보이는 아무 카페나 들어가도 강아지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다.
패션도 조금 다르다. 말하자면 연희동 스타일은 연남동에서 조금 힘 빠진 느낌이다. 내가 느끼기에 홍대는 늘 과하다. 색깔이든, 액세서리든, 메이크업이든. 연남동에 갔다 연희동에 들르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확실히 연희동 패션은 미니멀하다. 반지 두 개 낄 걸 하나만 끼고, 단추 세 개 풀 걸 두 개만 푸는 식으로. 연희동에서 아쉬운 건 딱 하나다. 주차. 주택가다 보니 주변에 공영주차장이 없다. 가까운 전철역이 없는 것도 아쉽다. 교통만 해결된다면 훨씬 더 자주 찾을 동네다. 지금은 못해도 한 달에 세 번은 연희동에 간다.
“패션도 조금 다르다. 말하자면 연희동 스타일은 연남동에서 조금 힘 빠진 느낌이다.”
⑥ 이태원 | 엄지원 / <하입비스트 코리아> 크리에이티브 스트레티지스트
친구들을 만날 때면 늘 이태원에 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친한 친구들 대부분이 이태원 근처에 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태원 근처’다. 경리단, 해방촌, 한남동에 사는 거지, 정확히 이태원 안에 집을 얻은 친구는 한 명도 없다. 우리 모두 이태원에서 시끌벅적하게 놀지만, 그 시끌벅적함 때문에 이태원에 살고 싶지는 않다. 노는 동네가 아닌 사는 동네라면 술집이나 클럽보다는 밥집 수가 중요할 텐데, 그런 점에서 이태원은 탈락이다.
이태원은 패션 스타일이 확실하다. 일단 바지통이 아주 넓다. 남녀 불문이다. 상의와 하의에 주머니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소재도 약간 다른데 근처 한남동은 니트웨어가 많이 보인다면, 이태원은 폴리에스테르 소재의 옷이 눈에 띈다. 또 한남동에는 코트 입은 사람이 많다면, 이태원은 패딩 점퍼 비율이 높다. 그 밖에도 모자 쓴 사람, 반지와 목걸이를 많이 한 사람도 이태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지금은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이태원에 간다. 이태원 패션이 좋아서는 아니다. 친한 친구들 대다수가 이태원에서 음식점을 하거나 클럽을 운영 중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사실 이태원 일대만큼 쇼핑, 먹거리, 놀거리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접한 동네가 많다는 것도 이태원의 장점이다. 보통 이태원에서 하루를 보낼 때면 낮에는 이태원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저녁은 한남오거리에서 먹고, 다시 이태원으로 돌아가 클럽을 도는 식이다.
클럽 음악도 다르다. 요즘 이태원은 하우스 테크노의 경향이 짙다. 반면 압구정은 힙합이 강세다. 이태원은 외국인이 많다면 압구정은 유학생이 많은 느낌이다. 홍대는 잘 가지 않는다. 거긴 평균 나이대가 너무 어리다. 클럽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이태원 일대만큼 쇼핑, 먹거리, 놀거리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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