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거 영화 전문 잡지의 취재 기자였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관계자와 이야기하며 기사를 작성하고, 영화제에 가서 영화를 보고, 기자회견을 듣고, 수상작을 점치는 일 등이 내 직업이었다. 부산, 전주, 부천 등의 국내 영화제는 물론이고, 칸, 베니스, 베를린 등의 해외 유수 영화제도 개막일부터 폐막일까지 눌러앉아 있었다. 오래전 이야기다. 까르띠에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희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영화산업의 상징적인 인물에게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이 있어요. 예전에 영화 기자도 하셨고 하니 저희와 함께 베니스에 가실래요?” 영화 관련 업을 내려놓은 지 십수 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 말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이후 이 글에 등장할 영화음악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음악을 맡은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이란 제목처럼. 맞다. 영화제는 세상 그 어떤 페스티벌보다 더 흥분되고, 열정적이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내게는 유독 그렇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기덕 감독의 <빈 집>이 베니스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을 때. 나도 거기에 있었다. 2004년 베니스국제영화제였다. 정확하게 19년 만에 나는 베니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까르띠에가 메인 스폰서로 참여한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를 위해. 특히 까르띠에가 3년 전부터 마련한 특별한 시상식 ‘까르띠에 글로리 투 더 필름메이커 어워드(Cartier Glory To The Filmmaker Award)’에서 어떤 인상적인 인물이 상을 받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말이다.
CINEMA LOVES CARTIER
이쯤에서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까르띠에가 왜 영화제에?’ 이에 대한 답은 역사를 거슬러 논해야만 할 것 같다. 일단 까르띠에는 베니스국제영화제와 2021년부터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고작 3년의 인연을 가지고 역사를 논한다고?’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분명 있을 터다. 아니다. 브랜드는 1926년, 그러니까 거의 한 세기 가까이 영화와 연결고리를 이어왔다.
첫 시작은 배우 루돌프 발렌티노 주연의 <더 선 오브 더 셰이크>였다. 배우가 직접 감독에게 탱크 워치를 착용한 채 출연하게 해달라고 이야기한 게 시작이다. 이후 영화가 까르띠에를 사랑하게 된 전설이 시작된다. 프랑스 출신 아티스트이자 감독인 장 콕토가 자신의 연출작 <미녀와 야수>(1952)를 위해 까르띠에에게 주연 배우 조제트 데이의 (주얼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다이아몬드 눈물을 제작 의뢰한 것이 바로 그 전설의 시작이다. 1946년의 일이다. 덧붙여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그레이스 켈리는 마지막 출연작 <상류 사회>(1957)에서 모나코 레니에 왕자가 선물한 반지를 착용했다. (브랜드와 영화의 인연을 기술하기에는 너무 많아서 이쯤에서 마무리하겠다.) 이렇게 까르띠에는 영화의 역사에 주얼리 앤 워치 브랜드로서는 굉장히 굵은 족적을 남겼다.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을 상영한 1895년을 영화 역사의 시작으로 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렇다면 까르띠에는 거의 영화 역사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브랜드가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손을 맞잡는 건 그리 의외도 아니다. 아니 당연하다고 해야 할 거다. 이런 부연 설명이 굳이 없어도 되겠지만 일말의 의문조차 해소할 목적으로 장황하게 기술했다. 각설하고 나는 까르띠에와 함께 (지극히 개인적 경험으로) 19년 만에 다시금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입성했다. 십수 년의 간극은 만조로 인해 침수된 산 마르코 광장 등 다소 생경한 이미지를 경험하게 했지만, 리도섬에서 개최되는 베니스국제영화제의 면면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패기 있고 열정적인 영화 잡지 기자였고, 지금의 나는 조금 노쇠했다는 것 정도만 빼면 말이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 곳곳에는 까르띠에가 메인 스폰서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표식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스폰서라면 당당할 만도 했다. 아니 자본력에 의거한 거만함보다는 영화 역사와 함께한 인연에 의한 견고함을 느꼈다고 할까? 동시에 영화를 비롯한 예술과 문화에 브랜드가 얼마나 세심한 배려와 경의를 표하고 있는지가 마음속 깊이 와닿았다.
CARTIER LOVES CINEMA
까르띠에와 함께한 베니스국제영화제 기록의 시작은 영화제 전야부터 기술해야 할 것 같다. 일종의 ‘까르띠에 나이트’와 같은 파티 ‘까르띠에 셀레브레이션’이 그것. 이 이벤트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온 이들을 위한 파티였다. 조촐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조촐하지 않았다. 먼저 재즈 밴드가 무대에 올랐다. 갑자기 너무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영화 <라라랜드>의 타이틀곡 ‘City Of Stars’였다. 누군가 등을 지고 밴드를 지휘하고 있었다. 바로 <위플래쉬> <라라랜드> 등으로 국내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저스틴 허위츠였다.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아닌 소규모 악단을 지휘하는 저스틴 허위츠라니! 약 1시간가량 지속된 그와 밴드의 협연을 관람하는 내내 까르띠에라는 브랜드의 또 다른 위용을 경험했고, 그 시간 자체의 의미는 실로 컸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밤늦게 저스틴 허위츠의 등을 바라보다 맞은 아침, 우리는 까르띠에와 영화제 측이 공동으로 주최한 특별한 마스터클래스에서 다시금 그를 만났다. ‘영화의 예술과 기술(The Art and Craft of Cinema)’을 기념하는 마스터클래스였다. 올해 마스터클래스에는 영화감독 데이미언 셰젤의 <위플래쉬> <라라랜드>는 물론 그의 2022년작 <바빌론>에서까지 합을 맞춘 음악감독 저스틴 허위츠가 함께했다. 우리는 박찬욱 감독과 그의 음악 동료 조영욱 음악감독의 대담을 국내 영화제에서 만나본 바 있다. 이것도 훌륭한 이벤트인데, 데이미언 셔젤과 저스틴 허위츠라니. 또 그들의 친밀성을 농후하게 드러내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는 자리라니.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문득 까르띠에 회장 겸 CEO 시릴 비네론이 이 마스터클래스를 두고 언급한 표현이 떠올랐다. “베니스에 대한 메종의 지원과 헌신은 영화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를 초대하여 베니스 문화생활에도 기여하고자 합니다”라는 것. 까르띠에가 베니스라는 역사적 공간에 헌사하는 애정은 비단 영화제라는 이벤트 하나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까르띠에는 단순한 영화제 파트너십에만 그치지 않는다. 베니스의 유명 오페라하우스인 라 페니체 극장과 협업하며 지속적 후원을 한다. 동시에 베니스의 상징적 공간인 베르데 극장과 베네데토 마르첼로 음악원의 복원 및 리노베이션 작업도 지원하고 있다. 이 말은 영화제에 자본을 대고 브랜드를 위한 홍보에 치중하는 게 전부가 아님을 의미한다. 사실 브랜드 홍보를 한다고 해도 나무랄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국제 영화제는 세계 유수 기업들의 지원금으로 행사 자체를 꾸려나가고, 자신들에게 도움을 준 기업이 이벤트 기간에 마음껏 홍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비즈니스 논리를 따르니 말이다. 하지만 짧은 베니스 일정에서 내가 가늠할 수 있었던 건, 까르띠에의 본질은 여기에만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CEO 시릴 비네론의 언급에서 이해할 수 있듯, 브랜드는 베니스라는 지정학적 공간이 가진 국제 문화유산의 가치를, 그리고 역사적 범주에서 ‘아트 앤 컬처’를 지키고 보전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이러한 브랜드의 노력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데, 특히 한국에서는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목표로 활동하는 아름지기의 기획 전시를 오랫동안 후원해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CARTIER GLORY TO THE FILMMAKER AWARD
드디어 메인 이벤트다. 까르띠에와 함께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온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을 참관하고, 취재하는 게 본연의 목적이다. 바로 ‘까르띠에 글로리 투 더 필름메이커 어워드’. 지난 몇 년간 팬데믹은 전 세계의 국경을 봉인했고, 또 심지어 당연히 열려야만 했던 여러 이벤트를 ‘비대면, 비공식’이라는 미명 하에 통제해왔다. 엔데믹을 맞은 지금 나는 드디어 베니스의 리도섬에 위치한 팔라초 델 시네마의 살라 그란데 극장에 당도했다. 살라 그란데는 전통적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의 메인 상영관이다. 이곳에서는 온갖 레드 카펫 행사가 펼쳐지고, 수많은 취재진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눈부시게 밝은 태양 아래 영롱하게 자리한 붉은 카펫이 찬란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웨스 앤더슨 감독에게 트로피를 건넬 것이라 했다. 이쯤에서 다 함께 ‘꺄악’ 하고 소리를 질러야 하지 않을까? 영화 좀 본다는 이들에게 스타로 칭송받는 감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웨스 앤더슨이니까. 저 멀리는 <로얄 테넌바움>(2002),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2004), <다즐링 주식회사>(2007)에서부터 가깝게는 <프렌치 디스패치>(2021),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에 이르기까지. 웨스 앤더슨은 21세기 영화 관객에게 가장 추앙받는 연출가 중 한 명임에 틀림없다. 그의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관통하는 (성인을 위한) 동화적 판타지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그런 그에게 까르띠에의 상징인 빛나는 팬더 흉상 트로피를 안긴다고 했다. 이런 그를 소개하기 위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알베르토 바르베라가 단상에 섰다. “그는 단 하나의 프레임으로도 독창적이고 명확한 스타일을 전하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라고 했다. 맞장구를 칠 수밖에. 뒤이어 까르띠에 CEO 시릴 비네론이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는 우리를 자신만의 서정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지극히 인간적인 세계로 데려갑니다. 그는 끝없는 창의성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인본주의적 관점을 지속적으로 선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창조해내는 세계는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곳처럼 느껴집니다”라고 했다. 다시 한번 맞장구를!
트로피를 수여하기 위해 웨스 앤더슨에 앞서 한 남자가 등장했다. (개인적으로) 환호를 질렀다. 바로 영화음악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였다. 그는 수많은 영화음악을 만들었지만 웨스 앤더슨과 함께할 때 가장 빛나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동시에 금세기 최고의 영화음악가 중 한 명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와 감독의 관계는 앞서 언급한 데이미언 셔젤과 저스틴 허위츠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와 웨스 앤더슨은 <문라이즈 킹덤>(2012)에서 인연을 시작했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프렌치 디스패치>를 함께했다. 이런 그가 “현대 창작물에 대한 까르띠에의 강한 열정을 보여주는 활동이며, 영화 산업에 특별한 공헌을 한 이에게 수여하는 상”의 수상자로 웨스 앤더슨을 호명했다. 살라 그란데 극장의 내부는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내 웨스 앤더슨에게 트로피가 수여되었다. 그는 위키피디아에 등재된 ‘위대한 영화감독’의 이름을 줄줄이 나열하며 이런 이름에 자신이 함께 있어도 괜찮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농담 속에는 마치 자신의 영화처럼, 역사와 세상에 대한 일종의 성찰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짧은 수상 소감은 되려 보는 이로 하여금 한 번이라도 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해냈다. 마치 자신의 영화들 속 페이소스처럼.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웨스 앤더슨은 자신의 신작(극장 개봉작이기보다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더 원더풀 스토리 오브 헨리 슈거>를 출품했다. 로알드 달의 (단편보다는 조금 분량이 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웨스 앤더슨 특유의 장기가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조금 더 연극적 비중이 크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있을 수 있으니 보는 이의 판단에 맡기겠다.
베니스에서의 3일. 어쩌면 내 인생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짧다면 짧지만, 황홀했던 나날들. 그렇게 까르띠에와 함께한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일정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번 일정 중 흥미로웠던 건, 바로 경쟁 부문 출품작인 <가여운 것들(Poor Things)>의 공식 상영에 참석했다는 거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더 랍스터>로 쇼크를 전했던 그리스 출신의 촉망받는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이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나는 까르띠에가 특별히 마련한 공식 상영 전 레드 카펫을 밟을 수 있었다. 수많은 취재진이 플래시 세례를 퍼붓고 있는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보는 경험. 사실 이건 숱하게 영화제를 취재 다니면서도 쉬이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순간이었다. 취재를 할 땐 나 역시 그 취재진의 한 명이었으니까. 참, 개인적으로 <가여운 것들>은 감독의 놀라운 초기작 <더 랍스터> 관습의 답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아무튼 이 상영을 마지막으로 베니스는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이번 취재 일정 내내 마음 한편에 자리한 건, 하나의 브랜드가 예술과 문화를 대하는 진정성이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의 마음으로, 역사를 이해하며, 그 역사를 동시대와 미래 세대에게 온전하게 전하려 노력하는 모습들. 그래서 그들의 진심이 외부자의 시선으로 동참한 나에게까지 전해진 것. 까르띠에라는 브랜드의 진심이 내게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베니스국제영화제 중 ‘까르띠에 글로리 투 더 필름메이커 어워드’ 취재는 성공적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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