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의 로얄 살루트 21년
장준환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1987>에는 위스키가 여러 번 나온다. 극중 첫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은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문성근)과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 박처원(김윤석)이다. 술집에서 만난 두 사람은 민주화 운동가 김정남을 간첩으로 몰아가기 위한 ‘김정남 간첩단 사건’ 파일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나눈다. 이때 술상에는 빨간색 술병이 놓여 있었다. 곧장 이어지는 장면은 똑같은 술병을 비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부장 최환(하정우)은 검사실 한편에 모셔둔 위스키를 힙 플라스크로 옮긴다. 그는 힙 플라스크에 떨어진 위스키 한 방울까지 핥아 먹는다. 두 술은 모두 로얄 살루트 21년이다.
로얄 살루트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도자기 병이다. 영국산 코니시 점토로 형태를 빚고 유약을 두 겹 바른 뒤 1000℃ 넘는 고온에서 두 번 구워 완성한다. 여기까지만 보통 5일 걸린다. 사진과 영화 속 술은 병 색이 다르다. 영화에 나온 루비색 술병은 1984년 처음 도입됐다. 이때부터 로얄 살루트 21년 시그니처 블렌드는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 총 3가지 색상으로 출시되다 2019년부터 로얄 블루로 통일됐다. 디테일도 달라졌다. 영화 속 술병에는 말에 올라탄 기사가 새겨졌다. 지금은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사자와 왕관을 새긴다.
<타짜>의 조니워커 블루 레이블
“아무거나 주세요, 비싼 걸로. 비싸고 양 적은 거 있잖아.” 영화 <타짜>에는 중요한 만남이 몇 번 있다. 주인공 고니(조승우)는 조직폭력배 곽철용(김응수)과의 첫 ‘섰다’ 대결에서 승리하고 동료 고광렬(유해진)과 술을 마시러 간다. 두 사람이 밤늦게 찾아간 술집은 세란(김정난)과 화란(이수경)이 운영한다. 고광렬에게 주문을 받은 세란은 화란에게 묻는다. “비싼 걸로 달래. 테이블에다 돈도 쫙 깔더라니까? 뭐 주지? 비싸고 양 적은 거 뭐 있을까? 발렌타인 줄까?” 화란이 답한다. “쪼니워커 블루.” 세란이 발렌타인 몇 년을 고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화란은 고급 위스키를 아는 사람 같다.
조니워커 블루는 조니워커 라인업 중 최상위 위스키에 해당한다. <타짜>의 배경보다 4년 앞선 1992년 처음 출시된 스카치위스키로, 디아지오가 보유한 희귀한 위스키들을 블렌딩하여 완성된다. 오늘날 조니워커 블루의 파란색 패키지 상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Our blend cannot be beat(우리의 블렌드를 이길 수 없다).” 조니워커 블루가 ‘비싸고 양 적은’ 위스키로 유명한 건 아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급 위스키로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화란이 조니워커 블루와 함께 건넨 계산서에는 1백50만원이 쓰여 있었다. 원래 가격은 40만원이지만 화란은 ‘따따블’을 적용했다.
<헤어질 결심>의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
‘짙어지는 의심 깊어지는 관심.’ 영화 포스터에 적힌 말대로다. 박찬욱 감독의 11번째 장편영화 <헤어질 결심>은 유부남 형사가 산 정상에서 일어난 변사 사건을 수사하다 사망자의 아내에게 의심과 관심을 품으며 시작된다. 산 정상에서 떨어져 죽은 남자의 이름은 기도수(유승목)다. 기도수는 살아생전 남들이 좋다는 건 다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산에 오르는 길에 아크테릭스 재킷을 입고 백팩도 같은 브랜드로 맞추고 이어폰은 슈어를 꼈다. 롤렉스 데이-데이트도 찼다. 기도수는 위스키도 좋아했다. 산 정상에서 힙 플라스크를 꺼내 인생 마지막 위스키를 마셨다. 위스키의 이름은 카발란이다.
카발란은 박찬욱 감독이 좋아하는 술로도 알려졌다. 카발란 최초의 증류주는 2006년 3월 처음 만들어졌다. 카발란 증류소에서는 싱글 몰트위스키만 만든다. 역사는 스코틀랜드 위스키 브랜드에 비해 짧지만 벌써 맛을 인정받아 전 세계 60개 넘는 국가에 수출한다. 그중 박찬욱 감독이 선택한 위스키는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 싱글 캐스크 스트렝스’다. 긴 이름으로 설명했듯 위스키 원액은 스페인산 올로로소 셰리 와인 캐스크에서 숙성된다. 덕분에 와인처럼 진한 루비색을 띤다. 알코올 함량은 58.6%로 이번 기사에 모은 네 위스키 중 가장 도수가 높다.
<기생충>의 발렌타인 30년
<기생충>은 가난한 식구가 부잣집에 위장 취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두 가족의 겪차는 먹고, 입고, 사는 곳 모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 초반 반지하방에 사는 기택(송강호) 가족은 방역차 연기를 마시며 피자 박스를 접는다. 네 식구는 피자 박스를 접고 받은 돈으로 “일부 핸드폰 재개통, 쏟아지는 와이파이를 축하하며” 발포주를 마신다. 맥아 함량이 10% 미만인 술을 발포주라고 한다. 국산 맥주의 평균 맥아 함량은 60~70%다. 발포주는 맥주와 맛이 비슷하지만 맥아 함량이 적은 만큼 더 싸다. 기택 가족이 마신 필라이트는 500mL한 캔에 1천6백원이다.
기택 가족은 가난해도 다 계획이 있다. 아들부터 딸, 아빠, 엄마까지 전부 돈 많은 박 사장(이선균) 집에 취직한다. 박 사장 식구가 캠핑으로 집을 비우자 기택 식구는 저택에서 술판을 벌인다. 이때 거실에 깔려 있던 술 중 하나가 발렌타인 30년이다. 발렌타인 30년은 30년 이상 숙성한 위스키들을 섞어 만든다. 그중에는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 증류소에서 수급한 위스키도 있다. 발렌타인 30년은 완성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그 양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술병 라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마스터 블렌더가 지닌 기술의 증거.’ 가격은 1백만원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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