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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꿈의 공장’인 건 맞지만, 그 공장은 거의 백인을 위해서만 기계를 돌린다. 아주 가끔 아시안을 위해 전원을 켜기는 하지만, 기계를 좀 더 오래 돌리려면 확실한 패스권이 필요하다. 무술을 잘하는 황비홍이 되든가, 하필 쫙 찢어진 눈이 포인트든가, 아니면 ‘아시안 돌’처럼 생겨 페티시를 자극하든가. 그렇다면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잘나가는 드라마 <로스트>에 출연 중인 김윤진의 패스권은 뭔지 따져보자. 무술을 잘하기엔 몸의 근육이 충분치 않고,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시안 돌’로 밀기엔 키가 너무 크다. 그녀는 스스로 ‘절실함’이 그 패스권이라고 했다. ‘연기가 아니면 죽을 것 같다’는 절실함에 연기를 시작했고 ‘그때가 아니면 할리우드에 갈 결심을 못 내릴 것 같다’는 절박함에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이 자리에 있다. 그녀의 이름은 골든글로브·선댄스 등 굵직한 영화제 초대장 리스트에 빠짐없이 올라 있고, 그녀의 홍보 담당자는 쇄도하는 세계적인 잡지 인터뷰 문의에 골치를 썩는다. 〈로스트〉 촬영이 없는 날에 하와이를 빠져나가면 귀신같이 알고 파파라치가 붙고, 유명 감독으로부터 끊임없이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다. 한국에 앉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흐뭇한 일이다. 왠지 나와 그녀만 아는 은밀한 언어인 듯, 외국 드라마에서 당당히 우리나라 말로 대사를 읊을 때나 ‘게이샤’ 역할이라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한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골든글로브에서 ‘한국인인 게 자랑스럽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을 때…. 뭐랄까, 전교 1등을 하는 누나를 둔 말썽쟁이 동생이 된 느낌이랄까? 남자 잡지를 위해 처음으로 섹시한 포즈를 취했다. 조금 쑥스럽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레나>는 영국 잡지지만 미국에도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다. <아레나>란 얘기를 듣고는 ‘믿을 수 있겠다’며 승낙을 했다. 스스로 팬이던 잡지가 한국에 론칭한다니 축하할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스타일리스트가 가져온 옷을 보니 눈앞이 깜깜해지더라. 어떤 화보에서도 이 정도의 노출을 허락한 적이 없었으니까. 불안해 하는 나를 위해 한 컷 한 컷 찍을 때마다 포토그래퍼가 사진을 보여줬는데 야하게 보이지 않는 섹시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많이 마른 것 같다. SAG(미국배우조합) 시상식 땐 과로로 입원해 참석도 못했다고 들었는데 건강은 괜찮은지. 지금도 감기에 걸린 것 같은데…. “시차가 큰 미국과 한국을 다니면서 일을 한 것이 잠깐 탈이 난 것 같다. 지금은 가볍게 감기에 걸렸을 뿐, 완전히 회복했다. 한국에서 활동했을 때도 몸은 말라 있었다. 얼굴이 워낙 통통해서 티가 안 났을 뿐(웃음). 골든글로브에서 TV시리즈 부문 작품상을, SAG 시상식에선 앙상블 연기상을, 아시안 엑셀런스 어워즈에서는 아시안 최우수 TV 여우상을 수상했다. 이 정도면 할리우드도 당신을 인정했다고 본다. 국내 팬은 당신의 성공을 축하하고 있는데, 당신 스스로도 성공했다고 자축하는지? “나에게서 성공은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처음 할리우드에 와서 데모 테이프를 들고 오디션을 하러 다닐 때 난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성공은 연기력을 인정받고, ‘연기파 배우’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수준에 오르는 거였다. 〈로스트〉라는 작품 하나만 심판대에 오른 상황이다. 아직 성공을 얘기하기엔 멀어도 한참 멀었다.” 수상 소감이나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에 대한 코멘트를 잊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코멘트가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 정착하는 데 방해가 될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 “솔직했을 뿐이다. 할리우드에서 혼자 직접 부딪쳐야 했던 나에게 한국에서의 커리어와 팬의 성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할리우드 내에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원론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 캐스팅을 받을 때마다 내가 맡을 역할의 비중을 증가시키기 위해 설득하는 일도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이고.” SAG에서 TV 드라마 부문 여자 연기상을 받은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가 “아시아계 동료 모두와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할리우드 내에서 아시아계 배우끼리 돈독하게 지내는 편인가? “알다시피 〈로스트〉 촬영은 하와이에서 이뤄진다. 하와이에 거의 갇혀 지내며 촬영을 진행하는 상황인 데다, 휴가 땐 한국에 돌아가 영화 촬영과 홍보 작업을 해야 했다. 할리우드에 갈 시간조차 없는 상황이다. 물론 기회가 된다면 이들 모두와 가깝게 지내고 싶다.” 어느 인터뷰에서 ‘숀 펜이 청혼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답한 적이 있는데 그가 당신의 이상형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굉장한 재능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 내 이상형이다. 굳이 배우로 따지자면 숀 펜이 그 이상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였다.” <USA투데이>가 당신이 3년간 사귄 한국인 남자친구가 있다고 보도했는데 사실인가? “전혀 사실 무근이다. 와전돼 보도된 내용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드는 남자를 아직 못 만났다는 얘긴지. “이성적으로 끌리는 남자가 아니라 참 멋있다고 생각되는 남자를 만난 적은 있다. 선댄스 영화제에 갔다가 파티에 참석하게 됐는데 테렌스 하워드를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눴다. 그는 〈로스트〉의 마이클 역에 오디션을 봤다가 떨어졌다면서, 출연하지 못해 너무 아쉽다고 얘기했다. 하워드는 <4브라더스>와 <허슬&플로우> 등의 영화를 찍은 후 〈로스트〉에 나온 배우보다 더 유명해졌다.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성공이 빛나려면 더욱 겸손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끝난 후 열린 파티에는 프로듀서나 에이전트가 우르르 오기 때문에 파티라기보다는 일의 연장선 같다. 하지만 선댄스 영화제 파티는 동료끼리 사적인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여서 참 좋았다.” 6월부터 빌리 밥 손튼과 영화 <조지아 히트> 촬영에 들어간다고 들었다. 이 영화를 첫 영화로 택한 이유가 있다면? “이 영화 제의는 〈로스트〉를 시작하기 전부터 있었다. 저예산 영화지만 한국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대본도 매우 마음에 들어 출연을 결심했다. 빌리 밥 손튼을 만났을 때, 그는 원래 TV 드라마는 보지 않으나 〈로스트〉 DVD를 구해 봤다면서 내 연기를 칭찬해 기분이 좋았다.”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고 있는 배우에게 조언하고 싶다면. “무작정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후배라면 해줄 말은 없다. 단지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할리우드라는 험한 길을 떠나기 전에 ‘배우’라는 직업이 얼마나 절실한지 자문해보길 바란다. 만약 죽어도 배우가 돼야겠다는 다짐이 선다면 뒤 돌아보지 말고 추진해도 좋다. 그런 절실함이 있다면 성공 못할 리가 없으니까. 그게 바로 2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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