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유명한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설정은 거의 비슷하다.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마쓰시게 유타카)가 온갖 곳에서 혼자 진지하게 음식을 먹는다. 고로는 세일즈맨이라 복장도 늘 비즈니스 정장이다. 그 정장은 단정하긴 한데 눈에 띄지 않기도 하고, 되는 대로 입은 것 같으면서 무엇 하나 어긋난 구석이 없기도 하다. 고독한 미식가는 시계도 늘 똑같다. 태그호이어 까레라다.
이번 시계는 <고독한 미식가> 시계의 최신판이다. 정식 명칭은 까레라 크로노그래프 글라스박스. 까레라 라인업 출시 60주년을 맞아 2023년 워치스 앤 원더스를 통해 첫선을 보인 야심 찬 신제품이다. 요즘 시계의 은근한 경향인 레트로에 맞춰 옛날 시계의 디테일을 조금씩 끼워 넣었다. 지름은 전작(고로의 시계)에 비해 조금 작아진 39mm. 글라스박스라는 이름처럼 옛날 손목시계에 많이 쓰던 돔형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를 썼다. 무브먼트는 호이어 02를 발전시킨 TH-20. 태엽이 충전되는 부위의 효율을 개선하고 로터의 모양을 바꿨다. 옛것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개선했다. 60주년 맞이 신제품의 기세가 돋보인다.
그 기세가 적당하다는 것이 대형 브랜드 태그호이어가 가진 중용의 감각이다. ‘얼마나 옛날 물건처럼 보이게 할지’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태그호이어는 두 가지 색상의 버전을 선보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블루와 함께 나온 블랙 버전은 상당한 레트로다. 시침과 분침의 야광 소재는 살짝 빛바랜 듯한 상아색이다. 검은색 가죽 스트랩에는 잔 구멍들이 뚫려 있다. 옛날 드라이버 워치의 디테일이다. 푸른색 버전은 상대적으로 현대적이다. 케이스와 돔형 글라스만 레트로 요소일 뿐 인덱스는 기존 버전의 디자인 큐를 따라간다. 푸른색은 그 자체로 오늘날의 시계에 많이 쓰는 색이기도 하다. 야광 소재는 깔끔한 흰색이다.
시계를 차보고 태그호이어의 농익은 균형감을 깨달았다. 지름은 39mm인데 더 작아 보인다. 케이스에 거의 꽉 차도록 다이얼을 깔았기 때문이다. 드라이버 시계의 크로노그래프에는 오늘의 시계처럼 가장자리에 잔 눈금이 있다. 베젤을 두껍게 만들고 거기에 눈금을 새기면 시계가 커 보인다. 까레라 글라스박스는 눈금을 인덱스에 그리고 그 위에 유리를 덮었다(유리 안에 있어서 ‘이너 베젤’이라고 한다).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올린 만큼 어느 정도의 두께는 피할 수 없는데, 태그호이어는 그 역시 얇아 보이게 만들었다. 시계 상단 전체를 감싼 글라스박스 덕이다. 그 결과 이 시계는 여성이 차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일 만큼 안정적이다. 태그호이어는 이 시계를 통해 미지의 절묘한 지점을 찾아내는 밸런스 감각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태그호이어부터 절묘한 사치품이다. 일본 시계 저널리스트 히로타 마사유키도 어느 잡지에 게재한 칼럼에서 그 부분을 짚었다. <고독한 미식가> 고로가 호사스러운 드레스 시계를 찼다면 (극 중의 대중적인 식당을 찾는 것이) 못된 스노비즘일 테고, 그렇다고 뻔한 시계를 찬다면 시청자도 현실과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일리 있다. 이 시계는 9백만원에 가까운 고급품이지만 보통 사람의 위시 리스트에 못 들어갈 수준은 아니다. 전국을 돌며 열심히 사업을 하는 남자가 ‘그래도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은 시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한다면 까레라 글라스박스만 한 것도 없다. 나는 파텍 필립을 찬 영업사원을 신뢰하기 힘들 것 같다.
고로는 태그호이어 까레라를 차고 한국에도 온다. 까레라를 찬 손으로 돼지갈비를 들고 ‘뼈 주변 고기가 제일 맛있어. 나는 지금 서울의 흑표범이야. 으르렁’ 같은 혼잣말을 하면서 먹는다. 까레라를 차고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귀여운 것이다. 이런 장면에서는 랑에 운트 죄네도 스와치도 적합하지 않다.
나도 서울의 흑표범 고로처럼 까레라를 차고 밥을 먹었다. 한 번은 츠케멘으로 유명한 상수 ‘멘타카무쇼’에 갔다. 전날 믹스세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DJ와 아무 말 없이 라멘을 먹는 애호가와 별 생각 없이 온 듯한 학생들 사이에서 나도 고독한 미식가처럼 묵묵히 라멘을 먹었다. 까레라 글라스박스는 이 상황에서도 위화감이 없었다. 완성도는 출중했으나 부담스럽지 않았고, 존재감이 확실했으나 거하게 눈에 띄지 않았다.
시계를 비롯한 고가품 리뷰에서는 거의 늘 가성비 등의 비난이 붙는다. ‘그 가격에 뭐 그런 걸 사냐’ 같은 말들. 생각은 자유인데, 계속 그리 여길 거라면 안 사는 건 물론이고 이런 페이지도 보지 않는 게 좋다. 가성비라는 렌즈로 지금의 기계식 시계를 들여다본다면, 가성비 좋은 기계식 시계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도시인이 평등하게 정확한 시간을 알고 있는 지금, 어차피 시계 애호는 스스로 디테일과 맥락의 재미를 찾아나가는 취미 활동이다. 이를테면 <고독한 미식가>의 시계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면서 낄낄 웃는 것처럼. 기계식 시계라는 게임에 참가할 마음이 있다면 까레라 글라스박스는 나무랄 데 없다. 어디에서도 적당하니까. 좋은 의미로.
이런 게 끌린다면
‣ 오랜만에 나온 지름 39mm 사이즈 크로노그래프
‣ 신형 911처럼, 적절히 섞여 있는 과거와 현재의 디자인 요소들
‣ 어디에나 어울리는 딱 하나의 시계를 원할 때
이런 게 망설여진다면
‣ 사람에 따라 턱없이 작다고 느낄 수도 있는 39mm 사이즈
‣ 고환율의 영향을 받아 아무래도 조금 높게 느껴지는 가격대
‣ ‘내가 살면서 크로노그래프 버튼을 얼마나 눌러볼까’ 싶은 허탈감
태그호이어 까레라 크로노그래프 글라스박스
레퍼런스 CBS2212.FC6535 케이스 지름 39mm 두께 14.2mm 케이스 소재 스테인리스스틸 방수 100m 버클 폴딩 스트랩 가죽 무브먼트 TH20-00 기능 시, 분, 초 표시, 날짜 표시, 크로노그래프 구동 방식 오토매틱 시간당 진동수 28,800vph 한정 여부 없음 가격 8백9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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