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바젤에서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를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을 기억한다. 이런 시계는 처음이었다. 너무 얇았고 착용감과 디자인도 아주 달랐다. 그 후 10년 동안 불가리 옥토는 계속 라인업을 키우고 늘려왔다. 이번에 내가 찬 건 스테인리스 스틸에 시간만 보이는 타임 온리 버전이다.
옥토 피니씨모는 손목에 감을 때 느낌부터 다르다. 불가리의 상징인 뱀 한 마리가 손목에 감기는 느낌이다. 차가운 스틸의 촉감이 몸에 감기는 뱀처럼 피부에 자연스럽게 붙는다.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이 얇은 만큼 열전도율도 높다. 역시 변온동물인 뱀처럼 처음 감았을 때 조금 서늘해도 차고 나면 금방 따뜻해진다. 그 결과 일단 손목에 차면 이물감이 없다. 착용했음을 잊을 정도다.
무브먼트가 물건이다. 자체 제작 무브먼트 칼리버 BVL138. 두께는 2.23mm. 형광펜 펜촉보다 얇다. 기능이 같은 ETA 2824-2 논 데이트의 두께는 4.6mm. 불가리의 두 배다. 비결은 부품을 얇게 하고 구조적으로 넓게 편 것. 보통 무브먼트가 두꺼운 녹두빈대떡이라면 얇은 무브먼트는 족발집 서비스로 나오는 얇은 파전 같은 개념이다.
공학에서 얇게 만드는 건 고난도 기술이다. BVL138은 얇음이라는 목적을 위한 정밀기계공학의 산물이다. 시간당 진동수를 3Hz로 낮췄다. 크라운을 뽑으면 초침이 멈추는 ‘핵’ 기능도 없다. 보통 시계 브랜드는 샌드위치처럼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오토매틱 모듈을 얹는다. 그만큼 두꺼워진다. 불가리는 무브먼트에 별도의 구덩이를 파고 작은 추(마이크로 로터라 부른다)를 넣었다. 작은 힘에도 팽팽 돌아야 하니까 마이크로 로터 소재는 비중이 높은데, BVL138의 로터는 플래티넘이다. 이런 럭셔리를 구현해내는 브랜드가 많지 않다. 불가리와 피아제가 대표적이다. 불가리 BVL138은 피아제 알티플라노 무브먼트보다 0.12mm 얇다. 숫자로 보면 와닿지 않겠지만 비율로 보면 5%다. 엄청나게 감량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에 플래티넘 부품을 넣었다. 그런데도 다이얼에 적어둔 건 ‘불가리’와 ‘스위스 메이드’뿐이다. 이 역시 럭셔리다.
디테일을 몰라도 좋아야 고급품이다. 옥토 피니씨모는 그 면에서 훌륭하다. 차보니 가장 큰 장점은 편안함이다. 특이하게 생긴 시계는 착용감도 특이할 때가 있다. 옥토 피니씨모는 아니었다. 두께가 얇으니 소매에 걸리지 않는다. 다이얼 생김새가 단순해 살짝만 고개를 돌려도 시간이 금방 보인다. 놀랍게도 이 얇은 시계에 스크루를 크라운으로 돌려 연다. 덕분에 옥토 피니씨모는 상당히 고급 시계인데도 방수 성능이 100m다. 이 가격대의 화려한 시계 중에서는 보기 힘든 스펙이다.
개인적으로는 21세기를 대표하는 고급 시계라고 생각한다. 불가리 편을 들려는 게 아니라 대형 브랜드 시계 중 이만큼 새로운 건 없다. 스위스 고가 시계는 비싸니까 고객과 회사 모두 보수적인 선택을 해서 점차 보수화한다. 불가리처럼 큰 브랜드가 옥토 피니씨모처럼 설계와 생산과 마케팅과 홍보를 처음부터 해야 하는 라인업을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다.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는 20세기 고급 시계의 정신에 21세기 시대정신을 붙였다고 볼 수도 있다. 20세기 고급 시계는 드레스 셔츠 소매 끝에 걸리지 않을 만큼 얇은 드레스 워치였다. 소재는 금, 밴드는 가죽.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는 20세기 고급품의 시대정신과 같은 듯 다르다. 얇고 단순한 생김새는 고급 드레스 워치 같다. 반면 전위적인 케이스와 견고한 브레이슬릿은 오늘날의 개념이다. 원래 정통 고급 시계는 스트랩을 쓰고 브레이슬릿은 스포츠 시계의 산물이다. 옥토 피니씨모의 브레이슬릿은 21세기형 혼종이다.
그래도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망설여진다. 비싸다. 1천7백90만원. 금리가 오르는 요즘 같은 때 사치품 하나에 쓰기엔 쉽지 않은 가격이다. 아울러 너무 화려하다. 나는 이 시계를 찬 걸 잊어도 이 시계를 찬 나를 보는 사람들은 안 잊을 것 같다. 특히 이 시계는 스틸 표면에 폴리싱과 브러싱을 번갈아 더해 상당히 번쩍인다. 햇빛 쨍한 날에는 이 시계의 반사광이 행인의 눈을 찌를 판이다. 마지막으로 대여한 시계는 로터 부분에서 미세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로터 회전 부위의 베어링이 마모되어 나는 소리다. 장기 보유를 생각한다면 이런 것도 신경 쓰일 것이다.
이 모든 사실과 개념을 늘어놓고 다시 생각해도 옥토 피니씨모는 매력적이다. 옥토 피니씨모는 일반인이 누릴 수 있는 신기술이고, 신개념의 고가품이며, 동시대적인 물건이다. 미래의 클래식이 될 조건이 충분하다. 무엇보다 일단 초박형에 익숙해지면 보통 물건들이 둔하게 느껴진다.
이런 게 끌린다면
• 현행 기계식 손목시계 중에서는 비교군이 없는 최고의 착용감
• 햇살 강한 날 차고 나가기 부담스러울 만큼 번쩍이는 광채와 확실한 존재감
• 미래의 클래식이 될 물건을 지금 갖는다는 만족감
이런 게 망설여진다면
• 불가리 특유의 번쩍이는 ‘라 돌체 비타’ 스타일
• 의도치 않아도 너무 눈에 띄는 디자인
• 미래의 클래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레퍼런스 넘버 103297 케이스 지름 40mm 두께 6.4mm 케이스 소재 스테인리스 스틸 방수 100m 버클 폴딩 버클 브레이슬릿 스테인리스 스틸 무브먼트 BVL 138 기능 시·분·초 표시 파워 리저브 60시간 구동 방식 오토매틱 시간당 진동수 21,600vph 한정 여부 없음 가격 1천7백9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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