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오후 2시, 경부고속도로에서 보기만 하던 현대차그룹 본사 로비에 들어와 있었다. 글로벌 기업이 되었어도 현대차 특유의 문화가 엿보였다. 사내 커피숍의 개점 시간은 새벽 6시. 벽 기둥에는 중국 군인 출신 화가가 그렸다는 호랑이 그림이 걸렸다. 수소차 넥소를 반으로 갈라 둔 전시 차량과 새로 나온 코나 사이의 한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WTCR 더블 챔피언 기념 미디어 Q&A 행사에 모인 관계자들과 프레스들이었다. 이날 이슈는 국제적이었다. 현대자동차 모터스포츠 팀이 WTCR에 연속 2회 우승했다. WTCR은 ‘월드 투어링 카 레이스’의 약자다. 자사 설명을 빌리면 ‘양산차 기반 앞바퀴 굴림 경주차로 진행하는 투어링 카 레이스’다. 현대차는 2014년부터 WRC에도 출전하고 있다. WRC는 ‘월드 랠리 챔피언십’의 약자다. 랠리는 트랙을 도는 ‘온로드 레이스’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평상시 자동차가 주행하는 도로를 구간별로 나눠 가장 빠른 자를 가린다. 현대차는 2019년, 2020년에는 WRC에서 우승했다. WTCR에서도 2년 연속 우승했다. 국제적 성과다.
이날 손님들도 국제적이었다. 현대 N브랜드 모터스포츠 사업부 사업부장 틸 바텐베르크, 팀 총괄 가브리엘 리조, 2019년 챔피언 로버트 미켈리즈, 2022시즌 드라이버 부문 우승자 미켈 아즈코나, 현대차 N브랜드실 상무 박준우 등이 참석했다. 이들의 국적은 독일, 한국, 스페인, 이탈리아였다. 이들은 각자 고향의 억양이 묻은 영어로 자동차 경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제네바나 함부르크에서 들려올 듯한 이야기를 양재동에서 듣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모여든 한국 미디어도 약 50여 곳에 달했다. 여러모로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양산차 회사가 레이스에 참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극한 상황에서의 경험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이스로 얻은 기술과 경험은 엔진, 조향, 서스펜션 등 다양한 곳에 적용되어 양산차의 완성도에 도움을 준다. 돌발 상황 대처가 레이스의 역량이기도 하다. 이날도 그랬다. 현대차 모터스포츠 팀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동차 전문 용어를 쓰며 (그들에게 외국어인) 영어로 이야기하니 현장의 영한 통역이 잠시 멈췄다. 이해는 되지만 의도한 상황도 아니었을 것이다. 감탄한 건 그다음이었다. 현장에 있던 한국인 현대차 임직원들이 즉각 능숙하게 영한 통역 업무를 이어갔다. 전문 통역은 아니었어도 현장 진행에는 무리 없었다. 글로벌 기업의 면모를 살짝 본 것 같았다.
이날 들은 공통 답변도 흥미로운 게 많았다. 가브리엘 타퀴니의 말에 따르면 현대차 모터스포츠의 레이스카 부품 중 약 80%를 양산차와 공유한다. 보통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현대차 N을 사서 20%를 수정하면 이론적으로는 도로의 괴물 같은 랠리 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괴물 같은 성적을 내려면 차만으로는 안 된다. 좋은 차, 좋은 팀, 좋은 드라이버가 필요하다. 그래도 스포츠 드라이빙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랠리 카 부품 80%가 양산차라는 말은 상당히 유혹적일 것이다.
이날 참석자 중 2022년 WTCR 챔피언 미켈 아즈코나도 있었다. 그는 1996년생 스페인 출신이다. 온라인 레이스 게임 시스템인 ‘심레이스’로 경주를 시작해 실제 레이스 드라이버가 된 뒤 우승까지 했다. 에디 슬리먼의 셀린느를 입을 만큼 마르고 말도 유순하게 해서 역으로 더 천재 드라이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심레이스에서 시작해 실제 레이스 드라이버로 넘어가는 게 좋다고 했다. 시대가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이외에도 자동차 레이스는 전기차 경주, AI 드라이빙 등 다양한 변수를 앞두고 있다. 현대차의 챔피언들은 이런 질문 앞에서도 막힘이 없었다.
기업 행사 참석자들이 자사에 대해 좋게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를 감안해도 현대차의 각오에는 감동적인 면이 있었다. 박준우 상무는 Q&A 세션에서 “사명감으로 살고 있다”면서 “한국 사람인 저희가 한국에서 가장 큰 브랜드인 현대가 자동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냐”고 말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미켈 아즈코나에게 말을 걸었다. 간단한 문답을 끝내고 자기가 몰았던 현대차가 정말 좋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자기 말을 자랑하는 명마의 기수처럼 차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각 부분을 설명해주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심레이싱 시뮬레이터 앞에 섰다. 그는 자기가 최고 기록을 경신하겠다며 신발을 벗고 시뮬레이터에 앉았다. 주변의 젊은 남자들이 챔피언의 레이싱 게임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국이 조금 다른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미켈 아즈코나와의 짧은 대화
레이스를 할 때 필요한 재능은 무엇인가?
나는 6세 때부터 레이스를 시작했다. 심레이스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모터스포츠를 사랑하고, 믿을 수 없게도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럴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나는 내 꿈을 믿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브랜드인 현대자동차의 드라이버다. 가장 중요한 건 열정이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 그렇게 하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하루 24시간 내내 집중하고 있어도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
두렵지는 않은가?
위험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레이서 일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270km/h로 코너에 들어가야 하는 일이니까. 준비를 잘하고 있어야 한다. 사람은 위험하다고 느끼면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인다. 준비하고 집중하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FIA의 안전기준은 수년간 아주 엄격하게 발전해왔다. 나도 레이스 도중 자동차가 세 번 구른 적이 있다. 그런데 일반 차였으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사고 당시 나는 (다친 곳 전혀 없이) 차에서 걸어 나왔다. 이 일은 위험한 동시에 안전기준이 아주 높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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