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현장을 그린 영화 <거미집>이 크랭크업했습니다. 초기작을 떠올리게 하는 로그라인입니다. 감독님의 코미디 감각을 오랜만에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과 군상을 소동극으로 표현했고, 그 속에서 감독의 고군분투와 ‘웃픈’ 광기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하고 싶은 장르는 다 해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다시 초기로 돌아가, 제가 했던 장르들을 완성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배우들의 앙상블과 밸런스로 자잘한 웃음을 주는 이야기라 웃음의 강도는 모르겠지만, 웃음의 질이나 결은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송강호가 연기하는 ‘김감독’은 김지운 감독을 닮은 점도 있나요?
일단 외형적으론 아닙니다.(웃음) 1970년대 이야기이고 그로테스크한 미학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김기영 감독을 연상시킨다는 이야기도 많은데요. 감독이라는 속성 면에선 닮았겠죠. 감독은 뚝 떨어진 고독한 존재 같으면서도 외교적 언술로 구성원을 다독이며 끌고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감독의 안간힘과 발버둥에서 페이소스와 웃음이 묻어날 거라고 생각해요.
감독님은 <조용한 가족>이라는 독특한 데뷔작으로 한국 영화계를 놀라게 했지요. 감독님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본 적이 있다면 언제입니까?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은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백수 생활을 14년간 했다는 겁니다. 당대의 뛰어난 감독들과 일할 기회가 오기도 했습니다만 다 거절했어요. 충무로 시스템에 들어가 경험을 빨리 쌓는 것도 좋지만 내 것을 하기 전까지 스스로를 채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죠. 시스템에 편입되면 나만의 고유한 것이 흐려지지 않을까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현장 경험보다는 세상을 보는 나의 독자적인 방식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거예요.
그것이 집약된 정수가 <조용한 가족>이었겠죠. 사실 이 영화 자체도 모험이 아니었나요?
두 번째 시나리오 <조용한 가족>이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데뷔했어요. 영화 경험 없이 던진 승부수였죠. 나만의 영화적 언어가 있었기에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상업 영화로서의 룰을 많이 어겼어요. 이전까지 한국 관객은 호러면 호러, 액션이면 액션, 하나의 장르로서 영화를 접해왔는데 이것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하이브리드 장르였죠. 또한 당시엔 주인공 원톱, 투톱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영화에선 가족 모두가 주인공이었어요. 많은 분들이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이 영화를 바라봤죠. 어떻게 밀어붙일 수 있었냐면, 몰라서 그런 겁니다.(웃음)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훌륭한 연기자들을 믿고, 나를 믿었죠.
<인류멸망보고서> 중 한 에피소드인 인공지능 로봇이 승려가 되는 <천상의 피조물>도 지금 보면 상당히 앞서간 작업으로 보입니다.
저는 얼리어답터로 살고 싶어 하는 기질이 있어요. 그 당시에도 곧 인공지능의 세계가 올 거라고 생각했죠. 2004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수상 작품이었던 박성환 작가의 원작 소설 <레디메이드 보살>을 읽고, 인공지능이 불교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어떨까 흥미가 동했어요. 이런 이야기는 늘 저를 매혹시킵니다.
갤럭시로 촬영한 <언택트>나 스크린X에서 상영한 <더엑스>처럼 새로운 기술, 자본과의 만남도 기꺼이 이어가는 것을 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제일 처음으로 해보자는 생각이 듭니다. 2000년에 만든 인터넷 영화 <커밍아웃>도, 홍콩과 태국의 감독과 호러 단편을 모은 <쓰리>도 실험적인 시도였죠. 이런 시도는 다음 작품의 인큐베이팅 역할도 합니다. 블랙코미디를 하던 제가 <커밍아웃>이라는 호러 섞인 코미디를 연출하면서 <장화, 홍련>이라는 호러 영화를 만들 수 있었죠.
아무도 가능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작업을 감독님만의 비전을 가지고 뛰어든 경험이 있습니까?
송강호의 첫 단독 주연작이었던 <반칙왕>. 당시 송강호는 개성 강한 연기파 배우였기 때문에 단독 주연으로서 상업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이 따랐습니다. 레슬링이라는 당시로서 한물간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리스크였죠. <장화, 홍련>도 두 신인 배우를 앞세운 영화이기 때문에 걱정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모든 대중의 기호를 맞출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제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저라도 믿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했습니다. 당대 흥행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서 성과를 거둔 게 제게는 소박한 개척이었네요.
창작자로서 어떨 때 두렵습니까?
다 두려워요. 이건 나만 좋아하는 거 아닌가, 내 취향이 너무 협소한 건 아닌가, 너무 개인적인 건 아닌가, 그런 질문을 무수히 던집니다. 늘 조바심과 노심초사를 달고 살아요. 많은 이들의 의견을 모아보고 선별해나가는 과정도 거치지만, 결국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내가 믿는 바를 하자, 그렇게 밀고 나갑니다.
동시대적인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입니까?
정기적으로 음악 글로벌 차트를 보고 OTT 시리즈, 유행하는 밈과 틱톡과 릴스도 찾아 봅니다. 그것이 나온 사회적 배경도 헤아려보고요. 젊은 친구들과 대화도 필요하죠. 권위적이지 않은 태도를 유지하고, 현장의 막내도 알 수 있도록 쉽고 정확하게 디렉션을 줍니다.
최근에 영감을 준 작품이 있다면요?
<헤어질 결심>. 초연한 아름다움을 가진 거부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한국 영화감독 중 가장 르네상스적 인물이죠. 이런 걸작이 나왔다는 게 내 일처럼 뿌듯하고, 시대를 관통한 동료 감독이 자신만의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 존경스럽습니다. 저희 세대는 영화관 세대, 영화광 세대이지 않습니까. 박찬욱 감독은 영화박사고, 류승완 감독은 액션키드였고, 임필성 감독도 B급 영화 마니아죠. 영화를 숭배하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에너지였어요. 최근 4, 5년간 저를 자극하는 좋은 영화들이 옛날처럼 제작되지 않아 무기력해져 있었는데,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오랜만에 그런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감독님에게 모험이란 어떤 것인가요?
나이 먹으면서 점점 많은 것들이 권태로워지는데, 그럴수록 기준치를 높여가야 하는 것 같아요. 이만하면 됐다가 아니라 더 할 게 있다고 생각해야죠. 그것이 늙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달과 우주인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영화를 만드신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습니까?
달이 그림자 때문에 반달도 초승달도 만월도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달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감독님의 영화 대사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것 하나를 꼽아볼 수 있을까요?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이병헌)가 희수(신민아)를 떠올리면서 마음에 풍랑이 일어, 전화를 걸려다 아무 말 못한 채 끊고, “다 각자의 삶이 있는 거지”라며 옷을 입고 나가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우리에겐 각자의 삶이 있고, 서로의 삶을 존중해야 하고, 그것이 악이 아니라면 누구의 삶도 구속하지 않고 지켜봐야 해요.
감독님은 무엇을 믿습니까?
최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감명 깊었던 구절이 ‘내버려둔다’는 표현이었어요. 그걸 읽고 내가 삶을 이렇게 살아왔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죠. 내버려두는 건 제가 현장에서 구사하는 연출법 중 하나예요. 버리지 않고 나서지도 않고 그냥 두는 것. 그렇게 변화를 지켜보면 김치가 묵은지가 되죠. 감독은 정확한 플랜과 비전을 가져가야 하지만, 때론 내버려뒀을 때 좋은 것들이 나오기도 해요. 배우와 스태프에게 가능성을 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것들을 얻어내는 것이 저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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