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REVIVAL OF BIG SHOULDER
최신 트렌드는 대부분 과거에서 비롯된다. 1980년대에서 영향을 받아 사방으로 어깨를 넓히고 늘린 파워 숄더는 그 시절을 풍미한 그레이스 존스를 떠올리게 한다. 어깨부터 일자로 툭 떨어지는 박스 핏의 수트 재킷은 아미와 질 샌더에서 발견됐고, 귀까지 치솟은 도발적인 모양은 릭 오웬스에서 만났다. 또한 프라다는 커다란 레더 트렌치코트의 허리 벨트를 힘껏 졸라매 과장된 어깨와 대비되는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연출했다. 팬데믹은 끝나가지만 부피를 두 배로 늘린 어깨가 다시금 거리두기를 유발하는 아이러니.
2 | PULL ON BALACLAVA
런웨이의 전유물이던 발라클라바를 일상에 가뿐히 정착시킨 미우미우 컬렉션의 영향일까? 이번 시즌 남성복에선 모양과 태도를 달리한 발라클라바가 다양하게 등장했다. 로에베는 얼굴을 하트 모양으로 오려낸 재기 발랄한 디자인을 선보였고, 루이 비통은 레이스와 프릴을 곳곳에 장식해 낭만을 더했다. 그리고 격식 차린 트위드 수트에 그래피티 발라클라바를 씌워 무질서한 스타일링을 연출한 돌체앤가바나가 그 뒤를 이었다. 이는 기능성이 뛰어나거나 실용적인 것은 세련되지 않다는 편견을 뒤엎는 반증의 트렌드다.
3 | THE LOWEST-RISE
그 시작이 Y2K 패션의 귀환이었는지, 미우미우의 드라마틱한 컬렉션이었는지 불현듯 등장한 로라이즈 트렌드가 날개를 달았다. 미우미우 컬렉션에는 본격적으로 남자 모델이 등장했다. 실키한 브리프와 로라이즈 팬츠, 벨트의 영민한 조합은 예상대로 잘 어울렸다. 말간 소년과 청년 사이의 얼굴을 가진 모델들은 멘즈웨어를 전개한 시절 미우미우의 향수마저 불러일으켰다. 물론 남성 컬렉션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디올 맨과 루이 비통, 와이 프로젝트, JW 앤더슨도 이번 시즌 로라이즈 흐름에 동참했다. 내려 입은 팬츠 위로 브리프를 드러내거나, 온전히 맨살을 노출하거나, 허리춤에 얇은 벨트를 더하거나 로라이즈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이었지만 새로운 트렌드를 반기는 분위기, 보디라인을 드러내는 호기로운 태도만큼은 궤를 같이한다.
4 | MONSTER PUFFER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를 씻고자 롱 패딩이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했다. 길이는 더 길게, 몸집은 더 크게 부풀려 비범한 패딩의 면모를 뽐낸 것. 마치 공작새처럼 깃을 한껏 세워 올린 돌체앤가바나의 푸퍼도 인상적이었지만, 스릴러 영화의 악당처럼 머리끝까지 지퍼를 올려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린 릭 오웬스의 것이 가히 압권이었다. 방한의 기능적 용도라기보단 부피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쪽으로 노선을 바꾼 롱 패딩의 기묘한 변신.
5 | MAN IN LETTERMAN JACKET
작년 가을 시즌부터 전 세계 패션 스트리트를 점령한 레터맨 재킷은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두드러진 점은 다양해진 소재와 디자인. 루이 비통은 지난 봄·여름에 선보였던 레터맨 재킷에 키치한 캐릭터를 더했고, 벨루티는 정통한 가죽과 스웨이드 소재를 조합해 선보였다. 또한 셀린느는 레오퍼드 무늬 퍼와 가죽을 이용한 재킷에 글리터 로고로 포인트를 주어 한층 과감해진 스타일로 눈길을 끌었다. 여전히 스트리트 스타일이 강세인 만큼, 레터맨 재킷의 인기는 꾸준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6 | VARIOUS SHEARING
혹독한 겨울을 견딜 아우터로 시어링 재킷을 대체할 만한 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다운 점퍼와 시어링 재킷 사이에서 고민 중이라면 이번 시즌만큼은 후자에 마음을 기울여도 좋을 것.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 컬렉션에서 클래식하거나 새로운 뉘앙스의 시어링 재킷을 내놓으며 선택의 폭을 넓혔다. 제대로 만든 우아한 시어링 재킷을 찾는다면 여전히 에르메스와 톰 포드가 우세. 너르고 풍성한 미우미우, 앰부시, 사카이부터 이제껏 본 적 없는 와이 프로젝트의 시어링 재킷까지 각 브랜드의 디자인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이번 시즌 발군의 아이템.
7 | CHUNKY&FURRY
생 로랑, 돌체앤가바나의 관능적이고 화려한 퍼 코트부터 아미와 드리스 반 노튼의 퍼 액세서리, 프라다 런웨이에 등장한 배우 제프 골드블럼이 입은 코트의 트리밍 장식까지 퍼를 활용한 브랜드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밍크처럼 매끄럽게 다듬기보다는 전체적인 룩에 볼륨을 더하는 투박하고 억센 텍스처가 두드러진다. 지난 몇 년 사이 패션 산업에서 퍼 프리 캠페인, 페이크 퍼 같은 단어가 중요한 화두로 다뤄지면서 럭셔리함과 아름다움의 관점도 이처럼 새로워졌다.
8 | NEO KEY COLORS
이번 가을·겨울 시즌은 핑크와 레드가 키 컬러로 자리 잡았다. 시리거나 차분한 계절의 무드와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보이는 명도 높은 핑크와 레드 컬러가 신선하게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마젠타 컬러로 포인트를 준 컬렉션들이 눈에 띄었다. 발렌티노와 베트멍, 돌체앤가바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 핑크에 가까운 마젠타 컬러로 채워 그 존재감을 더욱 발산했다. 이외에도 카사블랑카와 릭 오웬스의 솜사탕색 코트부터 프라다의 새틴 점프수트까지. 핑크 팔레트를 펼친 듯, 어디에나 어울리는 핑크는 두루 존재했다.
다음으로 가장 두드러졌던 건 레드. 밝고 선명한 레드 컬러가 런웨이를 대담하게 물들였다. 에트로, 돌체앤가바나는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올 레드 수트를, 에르메스와 펜디, 로에베는 캐주얼한 스웨터와 재킷 등을 제안하며 레드의 통통 튀는 매력을 강조했다.
매 시즌 키 컬러인 블랙은 이번 가을·겨울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이번 시즌에 블랙은 테일러링이 강조된 룩들에 주로 활용됐다. 루이 비통, 에트로, 베르사체는 테일러드 수트와 코트를 선보였고, 쇼의 첫 번째 룩을 장식한 디올 맨의 블랙 니트와 스트랩 팬츠는 물론이고 발렌시아가는 장갑까지 더해 타이트한 테일러링을 연출했다. 이제는 얼굴까지 덮는 게 익숙해진 듯, 블랙 수트로 얼굴을 가린 베트멍까지. 블랙의 견고함을 더욱 강조하는 그들의 방법.
9 | THE MAXIMUM
부츠의 계절, F/W 시즌마다 매번 비슷하게 이어지던 첼시 부츠와 웨스턴 부츠, 컴배트 부츠 트렌드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추가해야겠다.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사이하이 부츠가 엠포리오 아르마니 런웨이에도 등장했으니 말이다. GmbH는 박시한 재킷과 코트 아래에 사이하이 부츠만을 매치해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파격적인 스타일링을 감행했다. 릭 오웬스, 발렌시아가에서도 무릎을 훌쩍 넘는 예술적인 자태의 사이하이 부츠가 런웨이를 장악했다. 아크네 스튜디오는 좀 더 현실적인 스타일링을 제안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니 요한슨의 유년 시절 추억이 담긴 스웨덴 가죽 브랜드 케로와의 협업 부츠를 믹스 매치한 룩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한 번쯤 따라 입고 싶은 스타일이다.
10 | COZY GOWN COAT
부드러운 어깨선과 풍성한 실루엣,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는 벨트, 그리고 이상적인 숄칼라. 마치 추운 날의 홈웨어를 연상시키는 드레싱 가운 코트가 이제는 여성에서 남성 컬렉션까지 강력하게 두각을 드러냈다. 디올 맨의 양면 캐시미어, 베트멍과 아크네의 두꺼운 양털, 아미의 모헤어 등 촉감이 포근한 아이템들이 주를 이뤘다. 버튼 대신 벨트가 주된 요소인 만큼, 벨트의 연출에도 주의를 기울일 것. 특히 가죽 벨트를 더한 와이 프로젝트나 아더 소재 벨트와 매치한 질 샌더의 가운 코트는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1 | THE HOURGLASS
젠더의 경계가 희미해진 요즘, 여자들의 것으로 여겨지는 기본적인 공식이 남성 컬렉션에서도 불쑥 나타난다. 직선적인 요소가 다분한 테일러링 재킷의 허리를 잘록하게 집어넣은 아워글래스 실루엣이 대표적인 예. 우아한 곡선이 드러나는 몸통과는 달리 커다랗고 투박한 팬츠를 매치한 베트멍처럼 이질적인 조화를 꾀해도 좋지만, GmbH와 같이 길고 매끈한 부츠로 몸의 라인을 온전히 드러내는 과감함을 즐겨보는 것이 좀 더 색다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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