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괜히 믿음이 간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평소 취향과 상관없이 궁금하고, 한 번쯤 알아보고 싶어진다. 성향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후자다.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울 때 나도 울고, 그 사람이 웃을 때 나도 웃으니까. 마음이 더 커지면 알레르기약을 삼켜서라도 그 사람이 즐긴다는 음식을 함께 먹고, 온갖 핑계를 만들어 그 사람이 출몰하는 동네를 어슬렁거리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기어이 움직인다.
그는 어제도 전시장을 찾았다. 작품 사진을 찍어 조용히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해당 작품을 만든 작가들은 감격하며 그가 남긴 흔적을 자신의 피드나 스토리로 옮긴다. 그가 올린 사진을 저장하거나 캡처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계정 주인이 바로 BTS의 리더, RM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노래는 모른대도 BTS가 누군지는 다들 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BTS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콘서트와 페스티벌, 시상식 외에도 청와대, 백악관, UN 그곳이 어디든 BTS에게 한 말씀 청한다. 그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전례 없는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전방위로 뻗는 영향력의 여파는 미술 신에서도 감지된다. 글로벌 미술 시장의 큰 이벤트 중 하나인 ‘아트 바젤’이 얼마 전, 국제적으로 유력한 인물들로부터 독창적인 인사이트를 듣는 팟캐스트 <인터섹션>에 BTS, 보다 정확히는 RM을 게스트로 초대한 것. RM은 ‘아트 바젤’의 글로벌 디렉터인 마크 스피글러와 대화하며 미술에 대한 열정, 진심, 포부를 밝혔다. 옥션을 통해 구입했다는 이대원 작가의 ‘산(山)’(1976)을 시작으로 권진규, 윤형근, 유영국 등 한국 근현대 미술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온 그는 모범생 타입의 미술 애호가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아트페어를 섭렵하며 열심히 보고, 공부하고, 수집한다. 2020년에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 1억원을 기부해 절판된 미술 도서 제작에 쓰이도록 후원하기도 했다.
“요즘 전시는 RM이 본 전시와 보지 않은 전시로 나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만큼 그는 누구보다 전시 관람에 열심이다. 나도 어느 전시장에서 그를 목격한 적이 있는데, 한적한 시간대에 단출한 차림으로 나타나 작품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저 하나의 아카이브(just an archive)’를 표방하는 RM의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전시와 작품 사진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소셜미디어에 남아 있는 그의 큐레이션과 전시 방문 기록은 트립어드바이저 뺨치는 ‘RM 투어’의 데이터가 되었다. 비단 ‘아미’만 그의 여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보스턴 미술관, 휴스턴에 위치한 로스코 채플,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등 미술관, 갤러리 등도 공식 계정에 그의 방문 사실을 적극 홍보하며 낙수효과를 누리고 있다.
여러 방면에서 대중문화 스타들이 가진 파급력은 그 누구보다 즉각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 미술 카테고리 안에서도 그들이 무언가를 했을 때 유독 관심이 높아짐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디 아트페어, 어느 전시장에 유명인이 나타났다는 몇 줄짜리 기사가 실시간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단적인 예다. 비욘세, 제이지 부부가 열성적으로 미술관을 돌며 인증 사진을 남긴 덕분에 ‘아트셀피(artselfie)’라는 해시태그가 세계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자신의 전문 분야 말고도 작품을 소장하면서 동시에 직접 만들거나, 전시를 기획해서 ‘아티스트’라는 말의 뜻을 넓힌 퍼렐 윌리엄스나 지드래곤도 있다. 특히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전시 <피스마이너스원:무대를 넘어서>는 당시만 해도 센세이셔널한 이벤트였다. 국공립미술관이 대형 연예기획사와 협업해 상업 전시를 기획하는 것이 온당한지부터 엄격히 따지고 들던 때인지라 미술계는 적잖이 술렁였다. 하지만 확실히 관심 있는 사람이나 찾던 컨템퍼러리 아트가 더 많은 관람객에게 인식되기는 했다. 이후 지드래곤은 2019년 <아트뉴스>에서 선정한 ‘50인의 주목할 만한 컬렉터’에 랭크되며 리처드 프린스, 조너스 우드, 조지 콘도, 토바 아우어바흐 등 그가 소장한 작가들의 면면 역시 화제가 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미술계, 특히 미술 시장의 분위기는 분명 달라졌다. 유명 갤러리의 아시아 체인이 서울에 속속 진출했고, 누가, 어디서, 어떤 작품을 사는지와 관련한 경험의 폭도 넓어졌다. 훌륭한 작가, 탄탄한 시스템을 뒷받침할 수 있는 눈 밝은 컬렉터와 미래를 내다보는 후원자가 많아질수록 미술 인프라는 넓어진다. 유명 컬렉터, 찰스 사치의 힘으로 영국의 현대 미술은 ‘yBa’로 대변되는 새로운 챕터를 썼다. 2인의 슈퍼 컬렉터 아르노 회장과 피노 회장이 자웅을 겨루는 동안 파리에는 걸출한 미술관이 두 곳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서울에서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는 사건은 ‘김남준 컬렉션’이 공개되는 날인지도 모르겠다. 최애가 미술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생전 찾지 않던 갤러리의 문턱을 넘고, 전시 티켓을 확보하려는 예매 전쟁을 기꺼이 치른다. 우리는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흔쾌히 움직인다. 앞서 언급한 <인터섹션>에서 RM은 미술과 관련해 자신의 영향력을 어떻게 발휘하겠냐는 질문에 “만약 3백 명이 한 작품을 본다면 그로부터 3백 개의 서로 다른 감정이 생겨날 것이다”라고 답했다. 동시대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 중 하나는 다양한 목소리를 세상에 울리게 하는 것이고, 그의 답변은 그래서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여전히 몇몇 K-팝 스타들의 미술 애호가 시장이나 필드의 발전을 끌어낸다는 주장은 섣부른 비약처럼 느껴지지만, 그들 덕분에 좀 더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예술을 즐기기 시작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최소한 세상이 더 나빠질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오는 9월 2일부터 5일까지,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프리즈’가 서울에 온다. ‘키아프’와 협업해 최초의 ‘프리즈 서울’ 에디션을 열고,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1백10여 개 갤러리가 삼성동 코엑스에 모여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예정이다. 파티가 열리는 곳에 스타가 빠질 리 없고. 당신의 최애가 미술을 즐긴다면, 9월에 어디로 향해야 할지 이제 당신은 알고 있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