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악기상가로 가주세요.” 택시에서 내리자 펼쳐진 풍경은 제법 아름다웠다. 팔각정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장기 두는 할아버지들, 상가 옆으로 즐비한 포장마차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머리에 커다란 쟁반을 이고 달려가는 백반집 상인. 끈적하고 땀 냄새 나는 현장이었다. 진짜 삶이 보이는 이곳의 중심에 낙원악기상가가 있었다. 상가 2층은 거친 일렉트로닉 기타 소리와 묵직하게 퍼지는 베이스 소리, 온갖 기타 소리들로 풍성했다. 기분 좋은 소리였다. 기타 판매점이 양쪽으로 이어지고 복도 중간에도 수리점과 판매점이 줄지어 있는 가운데 세영악기가 보였다.
이세문 사장은 한 손으로 통기타를 지그시 누른 채 나사를 조이고 있었다. 세탁을 자주 해 빳빳하지 않고 흐물거리는 토시에서 그가 겪은 세월이 느껴졌다. 아는 형님의 기타 공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던 그는 낙원음악상가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였다. “1982년에 올라왔어. 그때는 이 상가에 악기점만 있지 않았어. 다방, 토산물 가게, 음식점, 없는 게 없었지. 그런데 차츰 변하기 시작했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지. 악기상가에 오기 전에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고. 전기 기타 공장, 클래식 기타 공장, 마산에 있는 기타 공장도 다녔다가 서울로 오게 됐어. 그때는 나밖에 없었어, 기타 수리공이.”
아무리 종로가 예스러운 멋이 있는 동네라지만, 시대는 변했다. 책, CD, 오디오, 그림, 사진. 현물은 점차 잊히고 작은 화면 속 뜬구름만 가득한 세상이다. 이세문 사장은 그러한 시대가 마냥 달갑지 않다. “1980년대부터 IMF 때도 악기상가는 괜찮았어. 밴드들의 전성기였으니까. 근데 노래방 기계 나오고부터 어려워졌지. 악사들이 할 일이 없어 사라지는 거야. 드럼이고 오르간이고 피아노고 사람이 해야 되는데 기계가 하니까. 악사가 사라지면 우리도 먹고살 수 없거든. 그러니까 장사가 안 됐던 거지. 아쉬움 많아. 그 많던 악사들을 구경하기 힘들어요. 제대로 기타 다루는 사람도 몇 없고 기계가 하니까. 옛날이 좀 그립지. 지금은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까.” 문득 밴드 전성기 시절 낙원악기상가 풍경이 궁금했다. “오후 12시만 되면 밴드 가수들이 상가에 바글바글했어. 상가 안이 온통 담배 연기였다니까.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업주들이 골라주기만을 기다리는 거야. ‘기타 몇 명! 베이스 몇 명!’ 하면 그리로 몰려들고 차출되면 일하러 가고 그랬어. 그러니까 악기 다루는 사람들이 여기 모여서 즉석에서 팀을 꾸려 연주하러 간 거지. 3인조, 5인조 이렇게.”
당대 최고 기타리스트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그다. 기타리스트들은 악기상가에서 유일하게 기타 수리를 했던 그를 믿고 찾을 수밖에 없었다. 돈독했던 손님은 누구예요? “많아요. 신중현 씨나 김태원이. 백두산 유현상 씨. 조용필 팀에서 기타 치던 친구. 기타만 쳤다 하면 나한테 왔으니까. 제일 기억에 남는 친구가 부활의 태원이. 태원이가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였거든. 하여간 이 친구도 기타를 막 파고들어가는 열정을 가졌으니까. 계속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소리를 찾는 거야. 이 피갑(픽업) 갈았다가, 저 피갑으로 교체했다가. 녹음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다음 날 바로 찾아와요. 다른 피갑으로 갈아달라고. 그 친구 덕분에 나도 많이 공부했지.”
기타는 소리를 만드는 물건이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간다. 망가진 기타에서 다시 아름다운 소리를 창조해내는 건 기타 수리공의 힘이 크다. 이세문 사장은 어떤 가치를 두고 수리할까. “기타는 줄 높이가 중요하거든. 손으로 연주하는 건데 손이 아프면 안 되잖아. 줄 높이가 높으면 손이 아파. 그러니까 높이를 최대한 낮춰서 기타 치기 편하게 해줘야지.” 하지만 수리공의 힘이 무시당하는 것만큼 버티기 힘든 건 없을 테다. 기타 수리에 공들인 시간이 아까웠던 적 있나요? “아깝진 않았어. 하지만 내 마음이 버티기 힘들었지. 까다로운 손님을 만났거든. 언젠가부터 상가를 나가는 순간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어. 수리하고 내가 듣기엔 아무 이상 없는데 손님은 계속 이상하다고 우기는 거야. 음악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까다로워. 엄청 까다로워서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이상하다고 해. 거기에 맞추다 보니 지치더라고. 마음의 병이 극심해져 병원 다니느라 몇 달 일을 쉬었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마음이 버텨주지 않으면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것 같아요. “평생 동안 수리할 생각이고. 이상하게 기타 하고 인연이 있나 봐. 허허. 눈 떴다가 감을 때까지도 계속 기타만 생각나고. 하루 종일 손님들이 자꾸 생각나고. 그걸 좀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후회도 자꾸 느끼고. 그래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어. 기타만 생각할 뿐이지. 병원을 다닐 정도로 힘들었어도 나를 믿고 수리 맡기는 그 사람들 어떡할 거야. 손님들이 한 번 맡기면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손을 봐줘야 하니까. 쉽게 떠날 수 없지.”
장인정신이란 뭘까요. “혼이죠. 혼까지 불어넣어서 일을 하는 거야. 모든 걸 걸어야지. 머리가 터지더라도 일을 하는 거야. 모든 걸 걸어야지. 머리가 터지더라도 일하는 게 장인정신이 아닐까.” 이세문 사장은 대지의 움직임에도 단단하게 버티는 소나무처럼 40년을 이곳에서 버텨왔다. 하나의 직업을 오랜 세월 지속하면 전문가가 되고, 초연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당연한 상태에서 얻는 깨달음은 무엇일까. “마음을 비워야 되겠더라고. 마음을 비워야지, 괜히 욕심 부리고 손님한테 돈 조금 더 받으면 내 마음이 괴로워요. 만원이라도 더 받으면 마음에 가책이 생겨서 안 되겠더라고. 마음을 비워야 된다, 비워야 된다. 아침에 나오면서 계속 다짐해.” 저는 그 괴로움에 아직 공감이 안 돼요. “조금씩만 받자, 그러고 있어. 내가 참 이상하게, 그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받는 게 싫어지더라고. 생계를 지속하기 어려운 기타리스트들이 찾아오면 수리하고 그냥 보내드리는 경우도 있어요. 부속품도 그냥 드리고.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이세문 사장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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