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해도 전기차는 등장만으로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전기차는 정말 자동차 산업의 혁명 그 자체였다. 내연기관차를 만들던 전통적인 자동차 브랜드들의 암묵적 카르텔이 깨져버렸고, 이전에 자동차 제조를 해본 적 없는 신생 전기차 브랜드가 등장했다. 자동차 산업에서 전기차의 등장만큼 충격적인 사건은 드물다. 10년이 지난 지금 파란 번호판을 단 전기차가 도로 곳곳을 누비고 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은 이슈는 있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다. 전기차와 배터리 기술 관련 법안에서는 날이 갈수록 안정화를 찾고 있는데 유독 충전기 인프라는 몇 걸음 떼지 못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전기차 신규 등록 대수는 10만 대로 2020년 4만6천 대에서 2배 이상 증가했다. 국내 등록된 전기차 누적 대수는 약 23만 대로 매년 가파르게 늘고 있지만, 이에 비해 공공 전기차 충전기 개수가 부족한 탓에 곳곳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2019년 이후 매년 1천 건 이상 전기차 충전 관련 민원이 접수된다.
그래서 지난 1월 18일 산업통상자원부는 국무회의에서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을 의결했다. 개정 내용은 친환경차 구매대상목표제 이행 대상 범위, 친환경차 기업 지원 근거 마련 등이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건 전기차 충전 시설 의무제도 강화다. 이 시행령으로 인해 1월 28일 이후 세워진 새 아파트는 총 주차 대수의 5%, 이미 지어진 아파트는 2% 이상 규모로 전기차 충전기를 의무 설치해야 한다. 전기차 충전소 의무 설치 대상은 신축 시설에만 적용됐는데 이젠 기축 시설까지 확대 적용됐다. 의무 대상 기준도 아파트는 5백 세대 이상에서 1백 세대 이상으로 늘었다.
하지만 실효성 문제가 표면 위로 떠올랐다. 준공 30년 차 아파트의 경우 기존 설비로는 전기차 충전기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만든 아파트 세대별 전력 사용 설계 용량은 가구당 1kW였지만 현재는 전자기기 등의 사용이 늘면서 세대당 3~5kW를 사용해 이미 큰 부하를 겪고 있다. 지금도 전력 수요가 많은 여름철에는 에어컨 사용 자제를 요청하고, 엘리베이터 홀짝제를 시행하는 지경이다. 준공 20년 이상 노후 아파트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의 ‘2020 인구주택총조사’를 따르면 준공 20년 넘은 서울 지역 아파트 세대수는 82만7천9백78가구다. 서울시내 전체 아파트 가구가 1백77만2천6백70가구인 점을 고려했을 때 절반을 조금 못 미치는 46.7%가 20년 이상 된 노후 아파트인 셈이다. 준공 30년 차 아파트도 30만7천3백66가구로 17.3%에 달했다. 분당, 평촌, 일산 등 1기 신도시들이 포진한 경기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노후 아파트가 늘면서 여름철 정전 사고도 증가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전기안전공사와 합동으로 아파트에서 발생한 정전 사고를 조사한 결과 2020년 7~8월 1백33건에서 지난해 7~8월엔 2백21건으로 늘었다. 여름철 전력 사용량이 증가하면 변압기가 버티지 못해 정전이 발생하는 거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아파트의 변압기 용량을 늘리면 된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노후 아파트의 몇몇 주민이 변압기 교체를 꺼리고 있다. 재건축 승인에서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시설안전공단의 ‘아파트 재건축 안전 진단 매뉴얼’에 따르면 전기 통신 시스템, 장비 및 배선 노후도 등이 재건축 진단 평가 항목에 포함된다. 변압기 용량을 늘리거나 새것으로 바꾸면 시설 개선에 해당해 재건축 승인에서 감점 요인이 된다. 그래서 전기차를 몰지 않는 아파트 입주자들은 재건축이 집값과 직결되는 문제인데, 전기차 충전기 설치를 위해 변압기를 교체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이다. 반면 전기차 차주들은 충전기가 설치될 줄 알고 전기차를 샀지만 충전 때문에 이사를 해야 할 판이다. 변압기 교체 비용도 주민들 사이에선 꽤나 뜨거운 감자다. 5천만원 정도 드는 공사 비용은 한전과 정부가 80% 부담하지만 20%는 아파트 주민 몫이다. 변압기 교체를 위해 전기차가 없는 주민까지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형평성 문제가 빚어지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노후 아파트에 충전기를 늘리는 데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충전소가 설치됐더라도 충전 관련 갈등은 산재되어 있다. 한때 자동차 커뮤니티에서 ‘전기 도둑’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220V 일반 콘센트에 전기차 충전기를 연결할 경우 요금을 책정하는 별도의 장치가 부착된 충전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런 장치 없이 아파트 공용 시설에서 전기차를 충전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그래서 어떤 아파트 주차장 기둥의 콘센트 아래엔 “일반 충전기로 충전하면 불법이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안내장이 붙어 있기도 하다.
반면 전기차 차주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전기차 충전을 위한 공간에 버젓이 일반 내연기관차를 주차하는 행위다. 앞에서 언급한 시행령에 따르면 아파트를 포함한 모든 전기차 충전 시설에서 충전을 방해하는 행위를 하다 적발되면 과태료 10만원을 내야 한다. 역시 얌체족들에겐 ‘금융 치료’만큼 좋은 것이 없다.
‘금융 치료’가 위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을 돈으로 억누르는 행위는 지성을 가진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은 돈이 아닌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주체다. 그렇다고 아파트 주민 간의 대화와 이해, 양보 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걸로 해결됐다면 님비(NIMBY)나 핌피(PIMFY) 같은 현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충전소 관련 이슈는 전기차 충전과 재건축이라는 각자의 이익과 공간을 두고 벌어진 첨예한 대립 등이 교묘하게 얽히면서 해결책이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해결 방안에 관해선 한국자동차연구원의 한 선임연구원 입을 빌려보자. “일정 기간이상 경과된 노후 아파트 전력 설비에 대한 종합 조사를 실시하고 설비 개선 긴급성 등을 고려한 지원 대상을 파악한다. 아파트 전력 설비 교체, 증설에 대한 지원 정책의 초점을 변압기, 차단기 등 개별 설비 중심에서 전기차 충전 인프라를 실질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전체적인 능력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도 필요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재건축을 염원하는 아파트 입주민을 설득할 수 있을까? 아파트에 진심인 한국 사람들을? 난 어렵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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