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하처럼 잘생기고 싶어
모두가 홍콩 영화를 보면서 꿈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강호의 의리부터 동방의 무협까지, 동네 비디오대여점에는 ‘잼민이’들의 온갖 장래 희망이 꽂혀 있었다.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홍콩 무협 영화를 시청하던 주말, 엄마가 베이킹소다를 너무 넣어 떫은맛이 나는 도넛을 먹으며 본 것은 <동방불패>였다. 거기서 생전 처음 ‘잘생긴 여자’를 만났다. 당시의 내가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외모 칭찬은 ‘아름답다’거나 ‘예쁘다’ 정도였는데, 임청하는 달랐다. 엄마가 영화를 보며 “임청하 정말 잘생겼네”라고 혼잣말을 하셨을 때, 무엇이 다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호랑이 같은 눈썹, 자신감 넘치는 시원한 눈매, 강인하지만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턱선.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해가는 주인공 ‘동방불패’를 연기하는 임청하는 엄마 얘기처럼, 정말 잘생겼다.
남자는 하늘색, 여자는 핑크색으로 주입식 교육을 받은 그 시절 초등학생에게 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열어줬다. ‘동방불패’는 절대 무공의 실력과 중성적인 매력을 동시에 품고 있는, 당시 영화사에서 볼 수 없었던 캐릭터다. 기존 무협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남자 주인공의 도움을 받는 청순하고 나약한 여자 주인공이 아니었다. 임청하는 영화 전반을 통틀어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 중에 제일 세다. 옷자락을 크게 펄럭이면서 하늘도 날고, 마음만 먹으면 지구도 부술 기세지만 품위와 카리스마를 잃지 않는다. 임청하처럼 하늘 위에서 무술을 하고 싶다기보다, 잘생기고 싶었다. ‘예쁨’은 ‘받는다’ 같은 수동태가 어울리는데 ‘잘생겼다’는 그 자체로 힘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어른이 되면, 엄청 잘생겨지고 싶었다.
실제 임청하는 1970년대 대만에서는 청순가련한 배우로 활약하다, 홍콩으로 넘어와 빼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주연을 맡으며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여배우가 30대 후반이 되면 주연에서 밀려나 은퇴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였다. 멜로영화에서도, 무협영화에서도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청하는 이 고리타분한 영화계 공식을 깨버렸다. 1992년 당시 38세의 나이로 홍콩 무협영화 최고의 캐릭터를 탄생시킨 거다. 이후 <신용문객잔> <절대쌍교> <백발마녀전> 등 우리가 기억하는 홍콩 영화의 가장 낭만적인 작품에서 멋지고 잘생긴 역할을 도맡았다. <중경삼림>을 마지막으로 이제 임청하를 만날 수가 없다. 그리고 임청하만큼 잘생기려면 ‘뼈대’부터 타고나야 한다는 것도 진작 깨달았다. 포기하니까 마음은 편하다.
WORDS 서동현(대중문화 칼럼니스트)
현주엽은 괴물 같아서
<슬램덩크>, 시카고 불스의 조던, <마지막 승부>, 농구대잔치, 1990년대에 내가 농구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94년,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방영과 함께 대학 농구의 열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학팀과 실업팀이 구분되지 않고 모두 같은 리그에서 경쟁을 벌이던 시절, 실업팀을 압도할 만큼 전력이 막강한 두 대학팀이 있었다. 연세대와 고려대다. 그때 결승에서 맞붙은 연고전의 뜨거웠던 시합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명승부로 기억에 남는다. 연고전이니 고연전이니 서로가 응원하는 팀의 이름을 앞에 불러야 한다고 싸웠을 만큼 그 시절 대학 농구 선수들의 인기는 지금의 아이돌 그룹만큼이나 뜨거웠다.
호랑이띠인 내가 고려대 마스코트가 호랑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려대 농구팀을 응원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푸른색의 연세대 유니폼과는 반대로 붉은색의 강렬한 힘을 내뿜는 고려대 유니폼을 더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때 고려대 농구부에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화제를 몰며 등장한 94학번 현주엽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장신 센터와 맞붙어도 뒤지지 않는 파워포워드의 피지컬, 가드의 기술력, 높은 농구 지능까지 그야말로 괴물 같은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코트 내외곽을 누비면서 플레이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슬램덩크를 내리꽂아 골대의 백보드를 부숴버릴 정도로 강력한 파워와 점프력을 자랑했다.
당시 현주엽보다 1년 앞서서 대학 농구에 등장한 괴물 센터 서장훈의 활약으로 최전성기를 누리던 리그 최강팀 연세대, 도무지 패배를 모르고 기세등등하던 연세대를 꺾고 우승을 거머쥔 이유도 단연 현주엽 때문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며 마지막까지 승부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던 결승전,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얻어낸 자유투 2구를 모두 성공시키며 고려대 농구부에 우승컵을 안겨준, 승리의 일등 공신이자 배짱 두둑하던 그 신입생은 지금 현재 그때의 배짱만큼이나 두둑하게 배뚱뚱 아저씨가 되어 구독자 61만 명을 거느린 먹방 유튜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속 워너비 주엽이 형이다.
WORDS 김선익(포토그래퍼)
맥가이버에겐 칼이 있다
어느 날 꿈에 맥가이버가 나타났다. 찰랑거리는 뒷머리와 반짝거리던 머릿결은 비록 꿈속이지만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스르륵. 슬로모션처럼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하얀 오른손에는 작은 빨간 칼이 들려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맥가이버 칼이라 알려진 만능 도구, 그것이다. 칼을 쥔 그는 내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바라보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지! 이 칼이 .”
뒷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만능 툴 맥가이버 칼에 대한 예찬이었을 것이다. 꿈을 꾼 후부터였을까? 무엇을 하든 머릿속에서 그 망할 빨간 칼이 떠나질 않았다. 밥상에 놓인 분홍 소시지도, 옆 친구의 필통 속 빨간 지우개도, 반찬통에 들어 있는 명란젓까지. 모두 맥가이버 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맥가이버 칼을 들고 맥가이버처럼 말하고 싶었다. 허리춤에 덕트테이프를 달고 이에는 파란 전선을 문 채 그처럼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선 과학자가 아니라 농부셨다.) 그 칼. 그 빨간 맥가이버 칼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맥가이버에 대한 동경은 맥가이버 칼에 대한 갈망으로, 그 갈망은 집착으로 변해갔다. 아아. 맥가이버 칼. 맥가이버 칼이여. 갖고 싶다. 무슨 수를 써서도. 손에 넣고 싶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고가의 멀티툴을 사기는 불가능했다.
어린 소년의 갈망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어느 날 저녁 아버지께선 검은 비닐봉지에 둘둘 만 작은 뭉치를 내게 건네주었다. 봉지 안에 든 것은 빨간 맥가이버 칼이었다. 금색 십자가가 그려진 붉고 작은 칼. 그 칼을 든 내 심정이 어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어린아이가 그 칼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었다. 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드라이버, 19세가 넘어가야 사용할 수 있는 와인 따개, 잇몸을 상하게 할 것 같은 이쑤시개까지. 하지만 어린 나에게 맥가이버 칼은 그처럼 될 수 있는 훈장이며 상징이었다. 서랍 한구석엔 먼지 끼고 녹슨 맥가이버 칼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젠 그 칼을 봐도 맥가이버에 대한 동경이 느껴지지 않는다. 칼을 조용히 쥐고 있으면 아들을 위해 고심하며 구입한 아버지의 온기만 느껴질 뿐이다.
WORDS 고성배(<더쿠> 편집장)
간절히 이해하고 싶었던 케이트 모스
청바지를 입은 긴 머리 여자가 주저앉아 있다. 톱리스로 가슴 라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빤히 이쪽을 바라본다. 순수한가 싶다가도 어딘지 불만 가득해 보이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1993년, 캘빈클라인 광고 속 케이트 모스다. 이 한 장의 비주얼로 1990년대는 케이트 모스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케이트 모스는 완전히 달랐다. 당시 신디 크로퍼드나 나오미 캠벨 같은 슈퍼모델에 비하면 작았고, 굴곡 없이 말랐으며, 다리도 곧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사랑했다. 원래 뉴웨이브란 그런 것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간절히 이해하고 싶은 종류의 어떤 것.
그 후 나는 슈퍼 스키니 모델들의 전성기였던 2000년대에 그 사진을 보았다. 말 그대로 ‘처음 보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 내가 케이트 모스를 동경했던 건 그녀의 스타일리시한 옷차림이나 중성적인 얼굴, 군살 없는 몸매 때문이 아니다. 이미 세상에는 지젤 번천처럼 가늘고 화려한 모델들이 차고 넘쳤다. 더없이 명료하게 아름다웠던 그들과 비교하면 케이트 모스는 그저 모호했다. 그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지만 불안하고, 위험해 보이면서도 궁금하며, 매일 밤 파티를 즐기는데도 고요하고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정말이지 딱 하나밖에 없는 사람. 나는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건 식단이나 운동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간절함 없는 인상, 매력적으로 어두운 분위기 등은 노력하면 할수록 멀어져가는 법이다. 애처롭게도.
결과를 말하자면 대체로 실패했고 조금은 성공했다. 부단한 노력 끝에 일말의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피로는 원치 않아도 찾아왔다. 유난스럽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온통 희미하기만 한 삶에서 분명한 무엇만큼 절실한 것은 없었으며, 정신을 부여잡는 일은 30대 후반의 내게 첫 번째 과제가 됐다. 근심 어린 표정은 디폴트로 자리 잡아서 오늘만 해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라’라는 어느 90세 할머니의 조언을 열 번 정도는 되새긴 것 같다. 물론 케이트 모스와는 달리 이 모든 것들은 생활형이라, 결코 시크하지 않다. 여전히 애처롭게도.
WORDS 김희민(칼럼니스트)
한때는 타일러 더든에 경도됐지
1991년, 주말의 명화에서 <택시 드라이버>를 본 초등학생 소년이 인생 최초의 팔굽혀펴기를 시작하고 밤거리 골목을 지날 때마다 네온사인 너머의 누군가를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좀 조숙했거나 중2병이 일찍 시작된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 그러나 1999년, 그 녀석이 어느 똥통 남고의 후줄근한 교복 차림으로 <파이트 클럽>을 막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한방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있다면, 이 상황은 고민 좀 해봐야 한다. 타일러 더든이 되고 싶기엔 20년도 못 채운 인생에서 너무 이상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이었다. 시험지에 문제의 답 대신 ‘프로젝트 메이헴’의 행동강령을 적은 뒤 책상 위에 올라가 대학 따위 엿이나 처먹으라고 외치기에는 너무 늦었거나 좀 이른 것 같았다.
미션 스쿨의 종교 시간마다 모두가 엎어져 자는 동안, 교회에서 나온 젊은 여선생을 독대하고 주워들은 니체 운운하며 신은 죽었거든요? 조롱조의 말싸움이나 하던 나의 교내 별명은 ‘교주’였다. 일찍이 21세기 남성성의 몰락을 예견하고 세기말 한국판 ‘앵그리 영맨’의 구호를 외치며 친구들을 선동해 일단 회비부터 걷던 내가 미국에서 봉기한 ‘스페이스 몽키’의 지도자 타일러 더든을 스크린으로 영접하고 경도당한 건 당연지사. 하지만 일단 타협해서 들어간 대학교에서 온통 연애할 생각밖에 없었던 내가 타일러 더든 비슷한 존재가 되고자 한 일이란 ‘라이코스’ 포털의 이메일 아이디를 tylerdurden으로 선점해놓은 게 전부였다. 사춘기 때 자신을 주변이 굴러가는 대로 방치한 남자라면 누구나 바트 심슨처럼 반달리즘에 한때 매혹되곤 한다. 순수한 파괴 욕구? 그러나 반달리즘은 너무나 쉽게 불순한 테러리즘으로 변질된다. 장문의 행동강령은 총기 난사를 계획하는 망상병자나 마지막 자위 삼아 인터넷에 써 갈기는 짓이다. 영화에서 정확한 이름이 없는 에드워드 노튼이 브래드 피트의 육체와 타일러 더든이란 이름을 가진 굉장한 초자아를 만들어낸 것은 결국, 나 자신을 각성시킬 또 다른 내가 필요하여, 현실의 ‘노바디(Nobody)’인 자신이 남들이 무시 못할 ‘섬바디(Somebody)’가 되고픈 욕망이다. 인터넷엔 그런 구호가 가득하다. 이미 대단한 나를 따라 하면 너도 대단해질 수 있다는. 그러나 이놈의 세상을 막상 살아보면 알지 않나. 빠르면 군대를 갔다 와서, 늦어도 서른 중반만 넘어가면 깨닫는다. 남자인 나를 매번 실제로 망치는 건 여자들이나 무슨 이즘이 아니라 저런 류의 구호를 외치는 남자들이며, 그리고 그놈들이 이미 기득권을 차지하고 성별, 인종, 국적, 성적 지향을 트집 잡아 열외로 배제시키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계라는 사실 말이다.
이제 마흔이 넘은 난 수십 번 본 <파이트 클럽>에서 정말 중요한 내용은 남성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나 관객을 현혹하려 끼워 넣은 서브리미널 따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진정으로 위대한 단 하나는 주인공이 정신을 차린 끝에 빌딩 창 너머 세상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말라의 손을 잡고 “우린 정말 이상한 때 만났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애써 섬바디가 될 필요 없다. 자기 입에 총을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당겨볼 정도의 기개나 그 결과 머리가 터지지 않을 정도의 운이 없다면, 남들이 모르는 노바디로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일 뿐, 내게 중요한 단 한 사람을 찾아 서로의 섬바디가 되어주는 일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어렵고 모자라다.
WORDS 박수민(시나리오 작가)
매버릭이라는 행성
어렸을 때 누구처럼 되고 싶었더라? 이상하게도 없다. 남 부러워한 건 그들이 가진 무엇 때문이었다. 장난감이나 용돈이나 시간이나 그런 것들, 부유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회, 그런 건 부러웠다. 1990년대 중반, 먼저 사춘기를 지난 사촌형 방에는 영화 <탑건>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형은 매버릭(톰 크루즈)처럼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형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겠지만, 내가 수사한 바로는 그렇다. 옷장에서 항공 점퍼 비슷한 게 발견됐고, 어린 놈이 선글라스를 사서 책장에 고이 모셔놓은 것도 정황상 매버릭 따라 한 거 맞다. 근육 키운다고 헬스장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영화 <탑건>이 1986년 작품이니 실제 유행한 건 훨씬 오래전의 일이다. 다만 국내 개봉이 좀 늦었다. 영화는 1980년대 MTV의 화려한 색감과 광고처럼 짧고 몰입감 있는 연출로 젊은이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이 영상미에 주인공의 비장한 서사를 끼얹는다. 유튜브에서 주요 신을 다시 찾아보니 토니 스콧은 천재 맞다. 지금 봐도 멋있다. 여명이 밝아오는 와중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갑판 위의 오프닝 시퀀스는 밀리터리 영화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스템이다. 무기 하나를 발사하기 위해 각자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진중한 군인의 행동 기저에 자리한 사명감과 희생정신 같은 숭고한 어떤 것들. 당시 미필인 사촌형은 거기에 매혹됐을 것이다. 나도 그랬고.
어떤 영화들은 세월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데, 그건 시간을 비켜 흐르는, 그러니까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고? 완전 멋진 뻥이라는 거다. 제대로 만든 ‘구라’는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법, 10년 뒤에 다시 나와도 그 시대의 아이들을 홀린다. 그래서 나도 사춘기가 지난 1990년대 후반 매버릭을 꿈꿨다. 뒤늦게 <탑건>을 봤고, 어릴 땐 몰랐던 매버릭의 폭주하는 감정, 아니 젊음에 공감했다. 당시 맺힌 게 많았다. 그렇다고 매버릭이 되고 싶었다는 고백은 아니다.
물론 20대 중반의 톰 크루즈가 말도 안 되게 잘생긴 건 인정. 만화에 나오는 정의로운 주인공 닮은 것도 인정, 그 자신감도, 뭘 해도 멋있는 것도 인정, 키가 나와 같은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누구처럼 되고 싶어 한 적도 없다. 나의 우주에는 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본능처럼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우주와 겹쳐질 수 없다는 것도, 내 우주의 별들을 전부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부러워하되 ‘오버’해서 부러워하진 말자. 행성과 행성이 부딪치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거리는 유지하자. 뭐 그런 좌우명을 등불로 삼고 살아왔다.
정확히는 <탑건>을 본 뒤 갖게 된 삶에 대한 태도겠다. 누가 주식으로 수익 좀 보면, ‘아, 좋겠네’ 정도만 말하고 잊자는 거다. 다행히 주변에 주식으로 돈 번 사람이 없다. 다시 매버릭으로 돌아가면, 나는 영화 속 그가 가진 재능과 환경이 부러웠다. 나도 진주만에서 오토바이 타고 싶었다. 전투기 몰고 싶었고,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좁은 이마를 갖고 싶었다. 이마 빼고는 애들이 가질 법한 말초적인 욕구뿐이다. 나는 내 모습 그대로 내 우주에 행성 하나를 더하고 싶었다. 멋진 파일럿의 모습을 한 행성.
EDITOR 조진혁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