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할 분위기 아냐
메타버스 광풍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 믿어왔다. AR이나 VR이 그랬던 것처럼, 소문난 신기술 잔치에는 매번 먹을 콘텐츠가 없었다. 그런데도 메타버스에는 자동차 대기업을 비롯해 명품 의류 브랜드, 편의점까지 뛰어든다. 메타버스 특별 전시회도 열리고, 아이돌은 팬미팅까지 진행한다. 패션 브랜드는 아바타만을 위한 특별 의상을 만든다. 수익과 홍보 효과가 확실하다는 얘기가 주변에서 끊이지 않는다. 대형 서점에는 메타버스 코너가 따로 있다. 팬데믹 시대와 맞물린 메타버스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랑’ ‘연애’ 등의 단어가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쟁 중에도 아이는 낳고, 지구 반대편 이성과도 연인처럼 지내지 않나. 사랑이란 단어 앞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지는 게 인간의 습성이다.
메타버스에서 연애는 가능할까. 메타버스를 대표하는 ‘제페토’는 사실상 연애 불모지였다. 이용자의 80%가 10대인 서비스답게 말투부터 대화 내용까지 PC방에서 들릴 법한 이야깃거리가 채팅창을 지배한다. 클럽을 테마로 한 월드에 참여하면, 아바타들이 한데 모여 춤을 춘다. 스마트폰을 터치하며 춤추는 내 아이콘을 한참 동안 보고 있으니 현타가 밀려오는데 , 이용자들은 그걸 즐긴다. 화려하게 치장한 아바타를 보면 부러움보다는 눈에 고통을 느낀다. 일대일 대화를 이어가기도 쉽지 않다. 대화 내용이 진지할수록 아바타들이 거리를 둔다. 시간대별로 접속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짝을 찾기 위한 세상은 아니다. ‘이프랜드’는 SKT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메타버스 플랫폼이다. 제페토와 달리 채팅보다 목소리가 대화의 주된 수단이다. 이용자들이 오픈한 랜드에 입장하면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로 일상이나 관심사에 관해 이야기 나눈다. 무의미하게 음악을 틀어놓기도 하고, 일상 소음 ASMR도 종종 들을 수 있다. 청소기 돌리는 소리에는 깜짝 놀라 황급히 이어폰을 뺐다. 낮잠 자지 않는 아기를 달래는 젊은 어머니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는 왠지 모르게 집중하기도 했다만. 종종 연애에 대한 고민을 나누기도 하지만, 이용자수가 현저히 적다. 인연을 찾기에 적합한 메타버스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본격 데이팅 메타버스
소개팅에 최적화된 메타버스 세상은 좀 다르겠지. 글로벌 1위 데이팅 앱인 틴더를 운영하는 매치 그룹의 자회사, 하이퍼커넥트는 ‘슬라이드 싱글타운’이란 메타버스 데이팅 앱을 운영 중이다. 제페토나 이프랜드에 비해 아바타가 귀여운 게 특징. 말이 귀엽다지, 싸이월드에서 재림한 아바타로 포켓몬스터 게임 세상 속에 입장한 것 같다. 한정된 세계 안에서 카페에 모이거나, 수영장에 가고, 불멍도 때린다. OX 게임, 술래잡기 같은 이벤트도 열린다. 하지만 짝을 찾기 위한 목적을 가진 메타버스 이용자에게 그런 서비스 환경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일정 존에 아바타를 옮기면 다대다, 일대일 대화를 할 수 있다. 아바타는 그곳에 모인다. 4명이나 2명만 참여할 수 있는 한정된 존은 제법 매력적이다. 아바타를 터치하면 지정한 프로필 사진과 간단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개방된 존에서 대화를 나눈 뒤, 마음이 맞으면 서로에게 하트도 보낸다. 그다음엔 단둘만의 공간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대화를 이어간다.
대화 센스가 결정적
메타버스 세상 속 구애 방법은 다를까. 퇴근 후 집에 도착할 무렵에 이용자가 가장 많았다. 사람이 많다는 건 기회로 이어진다. 다만, 오랜 시간 대화를 이어가기 힘든 환경이란 부작용도 따른다. 흥미를 끌지 못하는 대화 상대는 가차 없이 외면당한다. 외모나 스펙이 반영되지 않는 세계에선 대화 센스만이 살길이다. 말투나 멘트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남자는 한결같이 목소리가 중저음이다. 성시경의 “잘 자요~”보다 세 배 정도 느끼하달까. 여자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애교 섞인 목소리가 태반이다. 대부분의 첫 대화는 “목소리 좋으시네요”로 시작한다. 돌아다니기 바쁜 아바타에게는 “어디 가세요”란 호객 행위도 한다. 진짜 통화의 첫 대화는 “-님, 짬뽕과 짜장면 중 뭐가 더 좋아요?” 같은 고르기 쉬운 양자택일 선택지를 제공하는 거다. 밸런스 게임을 하듯 리드하면 대화 소재가 무궁무진해지고, 취향까지 파악할 수 있다. 흥미를 끌기 위해 성대모사를 뽐내거나, BGM을 깔아놓기도 한다. 자체 라이브 공연도 섭섭하지 않게 들린다.
주제를 파악하자
본격적인 일대일 대화가 이어지면 나눌 주제도 어느 정도 정해진다. 사회, 정치, 경제처럼 갈등을 부르는 이슈는 안 된다. 실패한 연애사나 직장 생활처럼 일상 썰이 주류다. 위로와 공감은 필수다. 적당히 힘든 척과 선을 넘지 않는 불만 토로, ‘오늘 야식 뭐 먹지’는 패시브 스킬이다. 그것조차 어렵다면 ‘힘들었겠다’ ‘대체 그 사람은 왜 그럴까?’ 등으로 맞장구만 잘 쳐도 상대방에게 하트를 받는다. 어쭙잖은 픽업 아티스트식 대화의 기술과 유행어를 남발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솔직할수록 유리하다. 현실 소개팅과 달리 메타버스에서는 예의를 차리며 기다려주는 이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는 여지없이 버림받는다. 떠난 이에게 미련 갖지 말고 재빨리 같은 공간의 다른 아바타에게로 향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절대 해선 안 될 행동도 있다. 여성 이용자들은 메타버스 스토커에 환멸을 느꼈다. 다대다 대화 공간에서 벗어난 뒤에도, 계속 쫓아다니며 대화를 시도하는 이용자는 결국 그녀들이 로그아웃까지 하게 만들었다. 입이 거칠거나 술주정하는 이용자도 회피 대상이다. 이 세계에서 즐기지 않고, 연락처를 요구하며 현실 만남을 추구하는 것도 보기 싫은 모습이라고 그녀들은 입을 모았다. 목소리를 깔아 느끼한 것도, 야한 얘기를 하는 이용자도 싫은 건 마찬가지. 소음이 커서 귀를 따갑게 하는 이용자도 거북하다고 전했다.
결론은 가짜 사랑
메타버스 연애라는 이름이 제법 거창하다. 분명한 건 이곳 역시 현실이다. 목소리를 드러낸 순간, 아바타는 나의 연장선에 놓인다. 얼굴을 보지 않아 조금 더 용기가 생길 뿐이다. 며칠을 메타버스에서 인연을 찾아다녔다. 제법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눴지만, 이곳에서 진짜 사랑을 찾을 수 있으려나. 문득 청소년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 게임에도 채팅 서비스에 ‘앤’이라 부르는 연인이 존재했다. 퀴앤(퀴즈퀴즈 애인), 크앤(크레이지 아케이드 애인), 버앤(버디버디 애인) 등. 일면식 없이 전국에 걸쳤던 양다리 앤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새로운 연애 개척지로 메타버스를 선택한다면? 글쎄. 이번 주 소개팅에 앞선 연습용 무대라면 제법 괜찮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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