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 배따라기
아빠에게도 뜨겁게 사랑한 연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10대의 K-장녀가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그러한 일종의 터부를 일찍 깬 편이었다. 발단은 뽀글 머리에 호기롭게 도끼빗을 주머니에 꽂고 첫사랑과 어깨동무를 한 흑백사진이었다. 아빠가 미처 버리지 못한 사진을 엄마가 발견했고, 이 사건은 우리 가족에게 오랜 시간 밈으로 회자되었다.
아빠의 첫사랑은 꽤나 유쾌하게 인정받는 듯 보였지만 내가 느끼는 착잡한 심정의 정체는 끝내 해득되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그 사건이 잊힐 즈음 나는 수능을 치렀다. 아빠는 수능이 끝난 날, 가족이 함께 간 노래방에서 배따라기의 ‘은지’를 열창했다. “겨울 바다에 우리 둘이 있는 걸 은지 한번 생각해봐···. 사람 없는 성당에서 둘이 기도 드릴 때 은지 얼마나 좋겠니.” 참고로 내 이름은 은지다. 내 노고를 치하한답시고 부른 노래였지만 아빠의 과거를 알게 된 이상 완전히 새롭게 들렸다. 그날을 뺀 숱한 밤들에 18번으로 부른 ‘은지’는 사랑 노래였고, 아빠가 순정을 바쳤을지도 모를 연인이었다. 미자도 미숙이도 미연이었을지도 모를 은지.
내 이름으로 위장한 아빠의 사랑 노래를 듣는 건 고역이었다. 해묵은 낯뜨거운 감정이 불순물처럼 떠올랐다. 아빠의 옛사랑도 께름칙한데 옛 연인을 소환하는 사랑의 암어가 심지어 내 이름이라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느꼈다. 10대의 나는 엄마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또 나름의 정의 구현을 위해 ‘취소’ 버튼을 눌렀다.
모든 인간사 복잡함을 이해할 만큼 유연하고 더럽혀진 30대의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조금 다른 걸 본다. 아빠의 옛사랑에 수치심이 들었던 유리알처럼 투명했던 나를, 그리고 흑백사진을 차마 버리지 못한 아빠의 마음을. 아빠가 오래된 사진처럼 꼭 쥐고 부른 건 옛사랑이었을까, 열렬히 사랑한 자신이었을까. 이번 원고를 준비하며 일순 그 장면이 떠오른 내가 아빠에게 그 노래에 대해 물었을 때 이제 막 예순이 된 남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황당한 대답을 내놨다. “글쎄 내가 자주 불렀던 노래? 엄마가 알 텐데···.” 1982년에 발표된 포크록인 ‘은지’는 귀를 긁어내는 듯한 특유의 전자음악 소리 때문인지 촌스럽게만 들린다. 관두고 배따라기의 다른 노래를 듣던 중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동요로 유명한 ‘아빠와 크레파스’가 공교롭게도 배따라기의 음악이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아빠는 노랫말처럼 엄마와 나의 과거 시제에만 등장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아빠들은 꼭 ‘어젯밤에 와 크레파스를 쥐어주고’ 오늘 내 곁에는 없고, ‘아빠의 웃음 같은 달님만이 날 재울’ 뿐이었다. 그땐 그게 당연했다. 그럼 아빠 곁엔 누가 있었을까, 누가 텁텁한 삶의 무게를 위로했을까. 은지? 아빠는 이제 은지를 모른다고 했다.
WORDS 장은지(<모터트렌드> 에디터)
‘립스틱 짙게 바르고’ 임주리
아버지의 목소리엔 슬픔이 없었다.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족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항상 굳세고 언제나 힘이 넘쳤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에게는 할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제사를 마치고 대뜸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물론 가기 싫다고 생떼를 부려봤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모습에 어머니가 나와 동생을 다독였다. 그렇게 생전 처음으로(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식구가 노래방을 갔다. 당시 집에서 재간둥이와 사고뭉치를 오가는 내가 마이크를 먼저 잡았다. 당시 언타이틀의 ‘책임져’는 내 ‘최애곡’이었다. 다음 차례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포크송을 좋아했다. 여동생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셋이 번갈아 돌아가면서 부르는 노래를 아버지는 듣기만 했다. 노래방 시간이 10분 정도 남았을까. 아버지는 일어나 노래방 기계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꾹꾹 번호 버튼을 눌렀다.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였다.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사랑이란 길지가 않더라, 영원하지도 않더라.” 아버지의 노래는 초딩 꼬마가 들어도 그리 썩 잘하는 실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뭐랄까. 덤덤한 듯하지만 그 속은 아려 보였다. “별이 지고 이 밤도 가고 나면 내 정녕 당신을 잊어주리라.” 노래가 끝나자 어머니는 “옛날에 만난 여자가 생각난 거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감정의 소요를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한 듯했다. 노래방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 전 아버지와 가진 술자리에서 그날에 대해 물었다. “그날 유독 아버지가 생각나더라. 예전에는 아버지가 참 원망스러웠어. 왜 나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은 맡기고 갔는지 말이야. 그런데 그날은 원망이 아니라 애틋함이 들더라. 자식이 여섯이나 있었는데 그걸 두고 눈을 감는 게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고.”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스물여덟 살 되던 해에 운명을 달리하셨다. “언제였더라. 어떤 드라마에서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흘러나왔어. 분명 사랑 노래인데 이상하게 아버지가 생각나더라고. 아버지 앞에서 노래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더라. 그래서 꼭 한 번은 네 할아버지를 곱씹으면서 부르고 싶었지. 그날이 바로 그때였던 거지.”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슬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련했다.
WORDS 김선관(프리랜스 에디터)
‘가는 세월’ 서유석, ‘파초’ 수와 진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아빠가 멋진 목소리로 부르던 이 노래의 3분 30분 정도가 지금도 생생하다. 1990년대 초, 한국에 노래방이라는 문화가 처음 자리 잡던 무렵이었다. 우리 다섯 가족이 같이 살던 때. 주말에는 주로 외식을 했고 그날은 드물게 노래방까지 갔었다. ‘노래방이 유행이라는데 우리도 한 번 가보자’는, 얌전한 가족의 다소 귀여운 일탈이었다. 누나들도 나도 노래 몇 곡인가를 불렀다. 엄마의 수줍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아빠는 서유석이 1986년에 발표한 곡 ‘가는 세월’을 즐겨 부르던 40대 초반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였다.
“그래, 서유석 씨가 부른 ‘가는 세월’ 참 좋지. 가사가 좋아, 그 노래는.” 은퇴 후 아빠는 자유인이 되었다. 색소폰을 배워 연주회를 열고 바둑을 공부하고 힘찬 서체로 붓글씨를 쓴다. 마침내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가는 세월’을 부르던 시절 아빠의 일상은 조금 달랐다. 하루하루 바빴고 쉴 틈이 별로 없었다. 아침 7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서 밤 10시 즈음 귀가해 그때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는 밤도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앞만 보고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고, 우성이 너는 그러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조언은 요즘 아빠의 단골 멘트다. “그럼 아빠, 요즘은 어떤 노래 부르세요?” “늘 똑같지. ‘가는 세월’도 좋고, 수와 진이라고 아니? ‘파초’라는 노래. 그 노래도 가사가 참 좋다.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잖아? 가사 좋은 노래가 마음에 들어 색소폰으로 연습하고 있지.”
수와 진은 일란성 쌍둥이 듀엣이었다. 안상수, 안상진 형제의 근사한 화음을 나도 기억하고 있다. ‘파초’는 1988년 곡. 나는 여덟 살이었고 아빠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그러니까 ‘가는 세월’도 ‘파초’도 어른들이 좋아하는 옛날 노래가 아닌 셈이다. 참 젊었던 아빠의 동시대이자 그때의 현재, 빛나는 취향이었다. 어쩌면 아빠의 성시경, 아빠의 폴킴이었을까. ‘파초’의 가사는 이렇다. “불꽃처럼 살아야 해 오늘도 어제처럼. 저 들판의 풀잎처럼 우리 쓰러지지 말아야 해. (중략) 정열과 욕망 속에 지쳐버린 나그네야 하늘을 마시는 파초의 꿈을 아오.”
전화를 끊기 전에 아빠한테 물었다. “아빠 혹시 더 좋아하는 노래 없으세요? 플레이리스트라거나.” “아이, 없어. 그 정도야. 노래 들을 시간도 없어. 배드민턴 치고 색소폰 불고 글씨 쓰고 그러다 보면 바빠서 친구들 만날 시간도 없지.” 불꽃처럼, 쓰러지지 않고, 그 누구도 못 막는 세월을 시냇물처럼 흘러흘러 아빠와 나는 2022년에 살아 있다. 아빠는 여전하고 노래는 늙지 않는다. 아들은 그때의 아빠 나이가 되었다. 아빠는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70대를 그 어느 때보다 충실하게 살아내는 중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성실하게. 하늘을 마시는 파초의 꿈처럼.
WORDS 정우성(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더파크’ 대표)
‘하얀 손수건’ 트윈폴리오
아버지는 70년대 학번이다. 이 시절 대학 진학률은 불과 20% 남짓. 대학생이 특권층이던 시절에 캠퍼스를 누볐다는 얘기다. 진학률이 80%에 이르는 요즘 세대와는 다른 대접을 받고 살았음이 틀림없다. 왕조가 무너진 지 고작 60여 년. 식민지 출신 부모를 둔 이들이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욕구도 엄청났을 터. 엘리트의 자의식은 음악 감상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이들의 선택지는 음악감상실과 음악다방. 전자는 클래식, 후자는 모던이다. 70년대 학번들은 종로1가의 르네상스, 명동 필하모니에서 바그너와 브람스 음악을 들으며 문화적 자부심을 한껏 높였다. 고전음악이 좀 간지럽다면 DJ가 있는 다방으로 간다. 광화문 초원다방, 명동 심지다방. 1960년대 쎄시봉 출신 통기타 가수들이 지적인 이미지로 시대를 주름잡았다. 그 시절 엘리트 힙스터들은 그렇게 놀았단다. 잠깐, 1970년대라면서 남진과 나훈아는 어디 간 거죠? 이미자도 인기 있던 시절인데. 좋은 질문이다. 당시 대학생들은 ‘뽕짝’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들었지만, 좋아하는 티까지는 내지 않았다. 트로트는 공장 노동자들의 음악. 고교 졸업 후 낯선 대도시에서 미싱 돌리던 80% 말이다. 트로트는 예나 지금이나 멜로디가 쉽고 가사가 직관적이다. 장충체육관에 몰려든 소위 ‘공돌이, 공순이’들에게 고품격 취향은 사치였을 것이다. 나훈아를 들으며 ‘멀어진 나의 고향역’을 추억할 수밖에.
캠퍼스 도련님이든, 시내버스 차장이든 갈 길이 급한 시대였다. 빨리빨리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키우던 시절. ‘덕업일치’라는 개념은 사치에 불과했다. 최고 인기 그룹의 멤버조차도 집안의 반대를 못 이기고 고별 공연을 할 정도였다. 의대 다니던 트윈폴리오의 윤형주 말이다. 요새 태어났으면 K-팝스타 됐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지인들도 끼가 많았다. 다방에서 DJ를 하다 쪽지도 많이 받고, 미8군 무대에서 팝송을 부르고 가수 제안도 받았단다. 그들 역시 갈 길이 급했다. 회사에 취직하고 애 낳고 회식하고 빨리빨리 늙어갔다.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어가는 요즘. 더 이상 가수 하지 말라며 반대하는 부모는 없어 보인다. 아이돌 지망생이 1백만 명이란다. 뽕짝이라며 무시했던 트로트가 성공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고속 성장이 끝나버린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성공 판타지. 물론 의대가 됐든 아이돌이 됐든 승자는 극소수다. 차라리 대학생만 되어도 좋다고 으스대던 옛 시절이 행복했던 걸까. 아버지의 다음 세대는 길을 잃었다. 아버지는 이제 스마트폰으로 트윈폴리오를 듣는다. 1970년대 음악감상실과 음악다방은 가정마다 오디오가 보급되며 자취를 감췄다. 강산이 다섯 번 뒤집혀도 노래는 역시 윤형주지. 고향 떠나올 때 언덕에서 흔들던 하얀 손수건. 코로나도 끝나가는데 노래방이나 가시죠.
WORDS 원호연(<애비뉴엘>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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