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본 K-서사
불평등, 연대, 갑을 관계, 일반인 히어로들, 치열한 경쟁. 한국형 서사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5개의 키워드로 정리한다.
#을 #현실전복 #갑질
세상은 이분법으로 보면 쉬워진다. 선과 악을 기준 삼아 나쁜 놈과 착한 놈을 구분 짓고, 우리편과 상대편으로 선 그으면 이해하기 쉽다. 서사 또한 그렇다. 갑을 악당으로, 을을 선한 주인공으로 설정하면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 플롯이 완성된다. 을이 다른 을, 병, 정과 힘을 합쳐 갑의 악행에 맞서 현실을 전복하는 ‘사이다’ 서사는 한국 드라마에서 반복되어 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갑과 을의 관계를 선과 악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 5천만 명이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러한 구조가 계속된다면 시청자에게 편향적인 시선을 주입하는 것이 된다. 선동과 뭐가 다른가. 선과 악이 분명한 서사는 세계관이 단순하다는 것도 문제다. 단순한 세계관을 반복하는 것은 한국 드라마 스스로 확장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행위다. 그렇기에 때로는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우는 시도가 필요하다. 물론 선악 구분이 모호한 이야기만 있을 순 없을 것이다. 때로는 통쾌함도 필요하다. 을이 반드시 착한 것은 아니라는 것, 갑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 그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 드라마의 힘이 될 수 있다.
01 <지옥>
그들은 정말 지옥에서 온 걸까.
지옥행을 알리는 사자라고는 하지만 가본 적이 없으니 사실을 알 순 없다. 사실이 중요할까. 이미 지옥행을 고지받았는데? 드라마 <지옥>에선 사이비 종교 ‘새진리회’가 세상을 전복한다. 악인에 대한 법의 심판이 부족하다고 느낀 사람들에게 새진리회의 주장은 진정한 선이고, 희망이다. 철저히 을에 불과하던 아무것도 아닌 종교 단체는 회차가 진행되며 세상을 전복한다. 이후 사이비 종교가 갑이 된 세상에선 저항 세력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새진리회로부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며, 이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연대해 새진리회에 대항한다. 폭력이 거부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면,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관점의 차이가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세계다.
02 <모범택시>
공권력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드라마 <모범택시>는 자경단 이야기다. 택시회사로 위장한 단체는 학교폭력, 사내폭력 등 폭력에 피해당한 이들을 대신해 복수를 대행한다. 김도기(이제훈)는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행동대장을 연기했다. 드라마 소재는 웹하드 회사의 갑질 폭행이나 불법 동영상 촬영, 장애인 착취, 아동 성폭력 등 실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사건들이다. 이를 각색해 시청자들이 실제 사건을 연상하고, 피해자의 입장에 더 몰입하도록 유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김도기의 통쾌한 액션과 철저한 응징은 사법 체계의 구멍을 메웠다.
03 <원더우먼>
익숙한 서사를 비틀었다.
드라마 <원더우먼>은 비리 검사이자 조폭 행동대장이 기억상실증을 겪고 재벌가 며느리가 되어 재벌의 비리를 파헤친다는 내용이다. <가문의 위기- 가문의 영광2>와 전형적인 아침 드라마를 위트 있게 조합했다. 재벌가의 며느리가 된 강미나(이하늬)는 가부장제의 부조리를 언어와 물리를 이용해 격파하며 쾌감을 선사한다. 이어서 비리 검사가 대기업의 부정을 밝히며 또다시 쾌감을 준다. 을이 갑을 전복시키는 전형적인 서사이지만, 개성 있는 캐릭터로 변주를 이끌어냈다.
04 <D.P.>
드라마는 드라마다.
보기 드문 하극상이 <D.P.>에서는 매회 벌어진다. 시작은 안준호(정해인) 이병이 사수인 박 상병을 폭행하는 장면이다. 이후에는 박범구(김성균) 중사가 임지섭(손석구) 대위에게 협박을 하고, 끝에는 헌병대장에게도 항명을 한다. 피해 증거가 없는 안 이병과 박 중사의 행동은 표면적으로는 하극상이다. 하지만 군이라는 조직이 그렇듯, 자세히 보면 이유 없는 하극상은 없다. 폐쇄된 계급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외부로 향한다. 하지만 조 일병이 전역한 황 병장에게 가하는 응징은 허락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자신을 내던지며 행한 처절한 정의 구현은 ‘군인의 민간인 납치’일 뿐이다. <D.P.>에서 다룬 ‘을의 현실 전복’은 이해도, 응원도 없이 실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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