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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버티면 된다
남극
남극에 갔다. 출장이었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출발 전 무덤덤했다면 거짓말이다. 여느 출장과는 다른 설렘이 있었다. 도시나 관광지를 여행할 때와는 분명 달랐다. 알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남극에서 처음 본 것은 빙하였다. 검은 바다 위의 거대한 빙하들. 그리고 거짓말처럼 푸른 하늘. 인간이 미약한 존재라고? 아니 그보다 더 보잘것없는 존재다. 풍경을 한눈에 담기조차 버겁다. 카메라를 여러 대 가져갔지만 눈으로도 다 보지 못할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나는 작아졌고, 경건해졌다. 절망한 것은 아니다. 경이로운 풍경의 일부가 되기 위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남극에서 보내는 동안 아름다움에 도취되었고, 예상 불가능한 혹독한 환경에 경탄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은 오직 남극에서만 가능하다. 그간 힘든 일이 많았지만 버텨낸 덕분에 나는 남극에 있었다.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겠지만, 열심히 버티면 언젠가는 웃는 날이 온다는 것을 남극에서 발견했다. 계절이 바뀌듯, 우리의 상황도 달라진다. 우리 역시 자연의 일부니까.
WORDS 윤지영(비디오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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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언젠가는 변한다
스페인 피스테라
옛날 옛적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던 시절, 사람들은 서쪽 바다 끝으로 가면 절벽 끝에서 뚝 떨어져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으로 빠진다고 믿었다 한다. 그런 그들에게 땅의 서쪽 끝, 피스테라는 말 그대로 세상의 끝이었다. 끝을 마주한 사람들은 으레 그런 걸까. 피스테라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자신의 소지품을 태우며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나는 의식을 갖는다고 했다.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길은 길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에서 시작하는 산티아고 순롓길을 800km 걷고도 100km쯤을 더 가야 했다. 길에서 처음 피스테라를 들었던 순간부터 나는 무엇을 태워야 할까, 무엇을 버리고 어떤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 고민했다.
걷는 동안 대부분의 날엔 비가 내렸다. 온몸이 늘 축축하게 젖어 있는 기분이었다. 발엔 물집이 잡혔다 터졌고, 매일 새벽 다리에 쥐가 나서 깨곤 했다. 아무리 걸어도 길의 끝은 아주 천천히 좁혀졌고 영원히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도착한 피스테라의 바다는 몹시도 따뜻하고 맑았다. 바다와 맞닿은 바위 틈엔 이미 지난 사람들의 과거가 재로 남아 있었다. 그 위에 불을 붙였다. 소지품을 모두 태워버린다 해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나를 소원하다보면 언젠간 원하는 인간상으로 느리게 한 걸음씩 변해갈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은 느린 걸음으로 완성형에 도달할 만큼 오래 사는 건 아니니, 지금보다 약간 달라진 미완성의 상태로 언젠간 끝을 맞이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춥고 외롭고 아픈 날을 거쳐 찾아간 끝이 내가 본 세상의 끝처럼만 맑고 예쁘다면 그것만으로 괜찮겠지.
WORDS 이정은(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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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성찰이다
페루 마추픽추
내게 세상의 끝은 태양의 도시로 불리는 페루 ‘마추픽추’다. 세상의 끝에서 발견할 것은 평온이었다. 세상의 끝에 오르면 놀랍고 들뜨는 마음만 가득할 것 같았으나, 여유롭게 풀 뜯어 먹는 라마들, 경이롭게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으니 들뜬 마음이 이내 잠잠해졌다. 여행은 새로움을 선사하지만 때로는 내 안의 여유를 들여다볼 기회를 준다.
WORDS 다솜(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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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풍요
네팔 토롱 라 패스
네팔은 왜 가? 거기에 뭐가 있는데? 글쎄, 가면 뭐라도 있겠지. 호기롭게 오른 해발 5,416m의 토롱 라 패스는 내게 허탈한 감정을 먼저 심어주었다. 심한 고산병으로 낡은 몸을 이끌고 겨우 걷고 있는 내 옆으로는 슬리퍼 하나 달랑 신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로 산책하듯 걷는 원주민들이 있었고, 더 오를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정상에서 고개를 돌리니 훨씬 높은 봉우리들이 마치 나의 오만함을 비웃듯 우뚝 서 있었다.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기대하며 하산한 묵티나트에는 따뜻한 웃음도, 맛있는 음식도, 편안한 잠자리도 없었다. 구걸하는 이들과 목이 막힐 정도로 건조하게 느껴졌던 황량한 마을은 ‘현실에 온 걸 환영해’라고 말하는 듯했다. 인생의 끝에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관문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까? 구름이 손끝에 걸릴 듯 가까워진 하늘과 나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 그리고 바람의 움직임만 존재하던 곳. 훅 다가온 공허함에 칼바람에 깎여 당장이라도 소멸하고 싶었던 이 세상의 끝. 낯선 대자연 속 세상의 끝에서 걸어 남은 나는 내 존재의 보잘것없음과 가지고자 했던 것들의 소용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 지나친 탐욕은 인간을 간사한 뱀으로 만드니, 아무리 위로 올라가도 욕망은 끝이 없고 언젠가는 걸을 내리막의 발자취에는 실망과 허탈함이 자리하게 된다는 사실까지. 어쩌면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가 뜻하는 풍요는 돈과 곡식의 물질적 풍요가 아닌 번뇌에서 벗어나 생기는 마음의 풍요일지도.
WORDS 랑자(조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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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용기
스페인 란사로테
아주 멀리 떠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회사 업무가 내 적성에 맞는지 고민될 때, 내가 괜찮은 친구이자 가족이라 할 수 있을지 생각이 많아질 때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생각 정리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스페인의 ‘란사로테’ 라는 섬에 가게 되었다. 힘들게 찾아간 섬은 사람들의 손이 덜 묻어 있었다. 원초적이고 거칠었다. 세상의 마지막 보루가 있는 것처럼 산, 바다, 들판이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수많은 별을 보았고, 지형의 변형 속에서 갓 깨어난 돌덩이들을 만났다. 다듬어지지 않은 대자연의 산물이었지만 참신하고 독특하였다. 날것 그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현실 속의 나는 누군가의 색깔에 맞추는 사람이었다. 좋은 직원이 되기를, 괜찮은 가족이 되기를, 따뜻한 친구가 되기를 바라면서 정작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세상의 끝에서 서툴지만 흔들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자연을 보면서 아주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었다. 동시에 아주 멀리, 세상의 끝에서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발견을 하였다. 더불어 정확히 직시하기 위해 멀리 떨어져 그대로 바라보는 첫걸음은 ‘용기’ 라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WORDS 조정희(서비스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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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집중하는 것
포르투갈 호카곶
2019년 12월, 나는 스물아홉 살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내 삼십 세를 축하해줄까? 작위적이지만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이 여행이라 20대의 마지막과 30대의 시작을 여행으로 장식하기로 했다. 인생의 해답을 얻고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안고 여행을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75일 동안 여행한 끝에 유라시아 최서단인 호카곶에 도착했다. 일몰 때가 되었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세찼지만, 하늘과 땅은 낮과는 다르게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여행하기 전, 이곳의 떨어지는 해를 보면 나는 무언가를 크게 깨달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위대한 철학자처럼…. 하지만 아무리 쥐어짜도 느껴지는 건 일몰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는 것뿐이었다. 해가 저문 후 여명에 낮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최서단 기념비’을 보았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손으로 비석을 쓸어내리며 이 여행이 무슨 의미인가 느껴봤다. 학교 다니며 주말 막노동으로 악착같이 번 1천만원.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받은 고마움.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가가 울컥했다. 신기한 일이다. 일몰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 유라시아 최서단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기대했던 인생의 해답은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며칠 전 에디터께서 세상의 끝에서 느낀 것에 대해 기고를 제안했다. 그때의 감정을 다시 그려보았다. ‘아!’ 그제야 나는 비로소 깨달은 게 있음을 알았다. 여행하면서 오롯이 순간에 집중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진정한 행복은 현재에 집중할 때 찾아온다고 말했던가? 그 말은 맞다. 여행에만 집중했기에 시간이 지나도 그때를 항상 추억하며 내 삶의 원동력으로 살고 있는 듯했다. 온전히 현재에 집중하는 것, 그것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것. 나는 유라시아 최서단에서 크나큰 인생의 지혜를 발견했던 것이다.
WORDS 조재현(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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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복귀할 힘
미국 키웨스트
미국 남부 플로리다의 섬들을 이어 만든 오버시즈 고속도로를 4시간 줄곧 달리면 키웨스트에 도착한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섬 키웨스트의 최남단 서던모스트 포인트를 여행한 적 있다. 나에게 ‘끝’이란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 희망하고 목표했던 것을 이룬 뒤 밀려오는 성취감을 의미한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고, ‘끝’은 설렘을 동반한다. 중2병은 아니고, 느지막이 40대 중반에 ‘사십춘기’가 찾아왔다. 인생에서 슬럼프를 겪다가 키웨스트로 여행을 떠났고, 키웨스트의 끝에서 지평선을 보았다. 당시 심해의 바닥까지 추락했던 나를 다시 떠오를 수 있게 해준 것, 일상으로 복귀할 활력을 준 것은 키웨스트에서 본 세상의 끝이었다.
WORDS 임용운(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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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경이로움
아이슬란드
화산재로 뒤덮인 산,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 우린 아이슬란드의 자연을 너무 쉽게 봤다. 아이슬란드를 전부 둘러볼 심산에 여행 방식을 ‘로드 트립’ 으로 정했다. 숙박 시설을 예약하는 대신 자동차 뒷좌석을 개조했다. 침대와 짐을 수납할 수 있는 차를 빌렸고, 떠났다. 여행 첫날부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플로리다에서 2년을 산 우리는 따뜻한 날씨에 익숙했고, 뼈까지 시린 아이슬란드의 추위에 몹시 당황했다. 현지 음식을 먹으리란 부푼 꿈은 무너졌다. 레스토랑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여행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는 생존만을 생각했다. 일단 버너와 라면을 꺼냈고, 추위에 떨며 라면 한 가닥이라도 더 먹으려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는 자동차 히터 바람에 의지하며 이동했고, 후회했고, 함께 잠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험심이 강하고, 궁금한 것은 꼭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화산재로 뒤덮인 낮은 언덕 위에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화산지대를 넓게 보고 싶은 마음에 언덕을 오르기로 했다. 길은 없고, 가파르고, 위험한 곳이었다. 언덕을 절반쯤 올랐을 때 우리 중 하나는 굴러떨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바짝 긴장한 상태로 언덕을 기어서 내려와야 했다. 우리는 별 구경하러 들른 곳에서 우연히 오로라를 보았다. 꿈같았다. 영화의 주인공 같았고, 초록 커튼이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듯 보였다. 그러다 오로라가 내 머리 위까지 다가오자 눈물이 날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처음에는 후회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 아닌가. 3일 만에 추위와 배고픔에 적응한 우리는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을 얻었다.
WORDS 김무진(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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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떨치고 나아가기를
포르투갈 호카곶
졸업을 앞두고 사회로 발을 내딛기 전, 불안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금 겪는 상황을 모면하고만 싶던 중 우연히 호카곶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사진을 보자마자 유럽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옛 유럽인들이 ‘세상의 끝’이라 여긴 호카곶. 시작과 끝이 만나는 장소에서 일종의 깨달음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카곶에 도착했다. 처음 본 풍경은 절벽 너머 끝없이 펼쳐진 푸른 대서양이었다.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란 포르투갈 시인 카몽이스의 시 구절이 새겨진 십자가 탑을 보고 깨달았다. 나 또한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음을. 더 이상 발 디딜 곳 없는 땅끝이지만, 푸른 바다를 넘으면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호카곶은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헤쳐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렇지만 시련의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나만의 항해를 펼쳐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두려움을 떨치고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끝에 이른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이니까. 다짐과 결의를 푸른 바다와 거센 바람에 걸었다. 쉽지 않을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엄포를 놓듯 바닷바람은 거셌다. 하지만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듯이 하늘엔 무지개가 떴다. 그렇게 대륙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에서 봄날을 꿈꿨다.
WORDS 한준석(콘텐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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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앞에서의 겸허함
남극
“끼그덕 끼익, 끼그덕 끼익.” 선실 안의 것들은 벽과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데,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 선실 이쪽저쪽으로 시계추처럼 움직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리는 몸과 어디서 들리는지 모르는, 그러나 선실 안을 가득 채우는 신경질적인 배의 ‘끼그덕’ 소리는 밖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줬다. 검푸른 바다는 쉽게 남극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멀미를 이기지 못하는 몸뚱이를 원망하며 서울에서 챙겨 온 멀미약을 붙였다.
모처럼 잔잔한 바다를 맞아 저녁을 먹고 갑판 위로 나갔다.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몸을 움츠렸다. 얼음 알갱이가 들어 있는 듯 찬 바람이 뺨을 때리고 추위를 맞은 뺨은 금세 붉어졌다. “빙하다!” 배가 바다를 가르는 소리와 배에 부딪치는 바람을 뚫고 누군가 소리쳤다. 망망한 바다에 한 덩이의 얼음덩어리가 홀로 유영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독특한 풍광이 펼쳐졌다. 하얗고 푸른빛이 도는, 차가운 얼음이 층층이 쌓인 빙하는 크레이프 케이크 같아 보였다. ‘타이타닉’이 저런 빙하에 충돌했을까? 충돌 위험성으로 빙하에 가까이 갈 수 없지만, 멀리서도 눈에 가득 담기는 것으로 짐작하건대 최소 20층의 아파트 높이에 달할 정도로 거대해 보였다. 어떤 것은 팬케이크 모양, 어떤 것은 접다 만 종이학 모양, 어떤 것은 강원도 어딘가에서 본 산등성이 모양, 다양한 빙하들은 다양한 이유로 남극대륙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모두 남극해를 천천히 유영하다 점차 작아져 처음으로 돌아가는 결말일 것이다. 배가 얼음을 깨고 나아갔다. “콰가각 콰각, 콰가각 콰각.” 선수에 부딪치는 얼음이 깨지며 내는 소리가 매섭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선실을 울리던 신경질적인 소리가 멈추고 머리 위 스피커에서 호출이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순 없는 건가요?”
“생각보다 얼음이 두꺼워서 깨고 나갈 수 없고, 깨고 나간다 하더라도 남극 바람에 밀려난 얼음 조각에 배가 갇힐 수 있습니다. 그 상태로 모두 얼어버리면 아예 움직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게 남극의 자연입니다.”
바다 위, 거대한 얼음들과 바람 그리고 모든 것을 얼리는 추위 앞에서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뱃머리를 돌린다’는 결정뿐이다. 배 앞에 놓인 얼음을 움직일 수도, 날씨를 따뜻하게 만들 수도, 바람을 멈출 수도 없다. 뱃머리를 돌리는 베테랑 마도로스에게도 남극의 바다와 겨울은 예측불가이자 위험천만이다. 수십 년 바다 위에서 보낸 시간도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미천할 뿐이다.
헬기 문이 열리고 발을 내딛는 순간, 두툼한 방한화 아래로 딱딱하고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맞바람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모자 속으로 확성되는 풍절음 사이로 선명하게 “파사삭 파사삭” 발에 밟히는 모든 것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좌우를 둘러봐도 하얀색뿐이다. 대륙의 땅은 원래 어떤 색일까? 궁금함에 발 아래 하얀색으로 뒤엉킨 눈과 얼음을 치워봤다. 까만 돌멩이와 딱딱한 땅, 흰색과 철저히 대비되는 검은색. 누군가 본래의 검은색을 눈과 얼음의 이불로 덮어 ‘하얀 대륙’ 으로 만들었다. 구름이 차고 당장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만 같다. 오래 있을 수 없다. 눈이 내리면 헬기로 귀환이 어렵다. 남극의 자연은 변화무쌍하며, 예측할 수 없다. 구름을 헤쳐놓을 수도, 눈을 멈출 수도 없다. 남극까지 가는 여정과 그 위에서의 시간은 쉽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파도는 높았지만 배가 앞으로 나갈 수 있었고, 바다가 얼었지만 배가 묶이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며, 눈을 머금은 구름을 보고 서두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닌 남극을 둘러싼 자연의 선택이다. 내가 세상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는 것이다. 헬기가 발을 떼고 대륙 상공을 선회하는 잠시간 구름 사이로 해가 대륙을 비췄다. 하얀 남극대륙이 반짝였다. 이 찬란한 선물 같은 순간도 내가 아닌 자연의 선택이다.
WORDS 윤성구(영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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