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L BLACK
이번 시즌의 블랙은 더 어둡고 강렬한 오라를 발산한다. 마치 엄중한 장례식 복장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는 올 블랙으로 견고하게 갖춰 입은 스타일링이 특징. 루이 비통과 디올 맨은 정중한 톱 해트까지 더한 블랙 테일러드 룩으로 쇼를 시작했다. 발렌시아가는 땅에 끌릴 듯이 큰 가죽 트렌치코트에 스카프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최대한 가렸는데, 영화 <매트릭스>의 트리니티를 연상시킨다. 한창 화사해야 할 봄/여름 시즌에 이렇게 각 잡힌 올 블랙은 의외로 신선한 키워드.
# GREEN LIGHT
현란하고도 장대한 이번 시즌의 컬러 스펙트럼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눈길을 끈 건 역시 그린. 고상하고 지루한 녹색은 지우고 색이 갖는 의미와 에너지를 덧입힌 컬렉션들이 하나의 트렌드를 이뤘다. 여리고 잔잔한 파스텔 톤을 활용한 펜디와 에르메네질도 제냐, 질 샌더 컬렉션은 이른 봄과 같았다. 디올 맨, 루이 비통 쇼에서는 형광에 가까운 쨍한 그린 컬러가 연이어 등장했다. ‘뉴 보테가’ 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녹색은 이번 시즌에도 유효하다. 예측할 수 없는 팬데믹 상황이 지속되면서 심신이 지친 모두에게 그린 컬러가 긍정 기운을 올여름까지 공급할 전망이다.
# VARIOUS CARDIGAN
아직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시기, 코트를 옷장에 넣었다면 다양한 디자인의 카디건을 입는다. 할머니 옷장에서 꺼낸 듯한 포근한 아크네 스튜디오, 밑부분을 파스텔 톤으로 그러데이션한 에르메스, 수트 위에 코트가 아닌 카디건을 걸치는 스타일링을 선보인 던힐 등 선택지는 다양하다. 카디건 본연의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다. 고급스러운 소재와 색감으로 승부하는 질 샌더와 사르데냐 해변의 바닷바람을 막아줄 프라다의 카디건이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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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LEEVE-FREE
강렬한 빨간색 터널을 지나자 펼쳐지는 빛나는 사르데냐 해변. 광활한 바다를 부유하며 망중한을 만끽하는 프라다의 소년들. 그 여유롭고도 환상적인 무드와 소년들의 오색 줄무늬 버킷 해트, 그리고 반듯하게 재단된 슬리브리스야말로 이번 시즌 트렌드의 정점이다. 프라다 이외에도 마르니, 버버리, 돌체앤가바나 등 다수의 컬렉션에서 슬리브리스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봄/여름을 막론하고 재킷 안에, 하늘하늘한 셔츠 위에 혹은 탄탄한 팔뚝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니트 소재 베스트나 정중한 테일러링, 얄팍한 러닝 톱 등 다양한 스타일링과 디자인을 통해 슬리브로부터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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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ARSITY JACKET
어느 시즌에나 바서티 재킷은 존재해왔지만, 이번 시즌은 그 활용 범위가 더 넓고 본격적이다. 바서티 재킷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버버리의 리카르도 티시는 특유의 와일드한 스타일링에 베스트 또는 재킷으로도 입을 수 있는 소매가 컷아웃된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런가 하면 루이 비통, 디올 맨은 아이비리그 유니폼을 연상시키듯 브랜드를 상징하는 로고를 큼직하게 새겨 넣은 전통적인 스타일이었다.
# RAINBOW SPECTRUM
봄/여름 풍경과는 이질적인 견고한 블랙이 트렌드의 한 축을 이루는 반면, 그와 대척점으로 고채도의 선명한 색상이 여름을 향한 대담함을 드러냈다. 눈 시린 형광 분홍색과 파란색, 솜사탕처럼 달콤한 파스텔 색상이 런웨이를 수놓은 것. 에르메스의 열대 과일 색상 카디건, 펜디의 아이스크림 색상 니트 등이 시선을 끌지만 압권은 단연 루이 비통. 무지개를 쏟아부은 듯한 사파리 후드 재킷은 선글라스를 쓰고 바라봐야 할 정도.
# MEN’S SKIRTS
치마가 남성복 트렌드에 오르내린 지도 벌써 몇 해가 됐다. 남자가 손바닥만 한 핸드백을 들고, 네일을 하는 시대이니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사실 역사를 훑어보면 남성이 치마를 입은 기간이 오래된 것을 알고 있나? 그러니 이제는 선입견을 깨고 받아들일 때다. 올 시즌 치마의 변화는 어땠을까. 작년에는 널따란 플리츠스커트와 킬트가 주를 이뤘다면, 이번 시즌에는 더욱 짧아진 길이가 눈에 띈다. GMBH와 릭 오웬스는 무릎을 훤히 드러냈고, 프라다는 1960년대에 유행하던 짧디짧은 마이크로 스커트를 재현했다. 아직 속옷만큼 짧은 마이크로 스커트는 무리라면 해리 스타일스와 릴 나스 엑스의 스타일을 참고해볼 것.
# BERMUDA SHORTS
불과 몇 시즌 전까지만 해도 한 뼘 길이의 마이크로 쇼츠에 비해 빛을 못 보던 버뮤다 쇼츠가 키 아이템으로 급부상했다. 이번 시즌 남성 컬렉션 전반을 지배하는 여유 있는 오버사이즈 실루엣이 쇼츠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까. 무릎 아래로 실크처럼 찰랑이는 에르메스의 가죽 쇼츠부터 다채로운 색감의 드리스 반 노튼과 폴 스미스, 랑방까지 버뮤다 쇼츠가 빠진 쇼를 찾는 게 더 빠를 지경. 리조트풍의 돌체앤가바나와 랑방의 쇼츠 룩, 한결 단정한 디올 맨, 르메르의 쇼츠 룩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스타일링 키워드는 같은 컬러와 패턴의 상의를 매치하는 것.
# CUT OUT DETAIL
주로 여성복에서 보이던 컷아웃 디테일이 남성복으로도 스며들었다. 실루엣도 더욱 자유롭고 대담하게. 이를테면 목부터 배까지 일직선으로 잘라낸 릭 오웬스, 가슴 한가운데를 커다랗게 오려낸 쿠레주가 좋은 예시. 이 분야의 장인 와이프로젝트도 빠질 수 없다. 탄생 1백10주년을 맞은 휠라와의 협업인 2022 S/S 컬렉션 곳곳에 커팅 디테일을 여실히 가미한 것. 한쪽 어깨를 절개하고, 쇄골을 드러내거나 커팅된 디테일 안으로 레이어링해보는 재미를 더했다.
# HIGH HILLS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한 기세로 남성 컬렉션에서 하이힐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생 로랑, 릭 오웬스, 톰 브라운 등의 컬렉션에서 각 디자이너의 색깔이 뚜렷한 하이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릭 오웬스는 특유의 구조적인 플랫폼 부츠로 조형적인 실루엣에 웅장한 힘을 실었다. 베네치아의 신낭만주의 복식을 재해석한 생 로랑 쇼에서는 휘날리는 케이프, 풍성한 러플과 소매의 블라우스와 함께 레이스업 플랫폼 힐 부츠가 등장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오묘하게 공존한 톰 브라운 봄 컬렉션에서는 메리제인 스타일의 키튼 힐이 얼마나 여성스러운지, 테일러드 재킷을 재구성한 재킷과 코트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논하는 게 딱히 의미 없어졌다. 이제는 이분법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난 성별의 모호성이 오히려 디자이너들에게 창의성을 발휘하는 도구가 될 것.
# ULTRA-SHINE
침체된 사회 분위기에 대한 항변일까? 이번 봄/여름은 눈부신 글리터의 향연으로 흥이 한껏 달아올랐다. 셀린느는 에디 슬리먼이 사랑해 마지않는 1970년대 로큰롤, 보헤미안 문화를 더 방탕하고 거칠게 선보였는데, 모크넥 톱, 릴랙스 팬츠, 튜닉 셔츠, 턱시도 재킷 등 글리터 소재를 과감하면서도 현명하게 활용했다. 파티라면 빠질 수 없는 돌체앤가바나, 모스키노를 비롯해 에트로, 로에베 등 다수의 브랜드가 계절이 무색할 만큼 현란하게 빛나는 파티웨어를 한가득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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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ER LEATHER
컬렉션에서만큼은 계절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 오래다. 그 어느 때보다 가죽의 활용이 남다른 이번 시즌만 봐도 그렇다. 에디 슬리먼은 이번에도 빈티지 티셔츠와 데님 팬츠에 가장 잘 어울리는 히피풍의 가죽 아이템을 내세웠다. 버버리와 발망 컬렉션의 가죽은 온통 블랙인 데다 과감한 디테일과 실루엣으로 여지없이 강렬한 이미지를 드러냈고, 프라다의 낭만적인 세일러 룩들 사이에서도 <매드맥스> 주인공이 입을 법한 터프하고 빈티지한 가죽 재킷들이 눈에 띄었다. 가죽에 능통한 에르메스와 벨루티, 던힐에서 공개한 가죽 아우터들은 한눈에 봐도 새틴처럼 부드럽고 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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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LLOW SLIDES
총 42개의 룩 중 반바지 한 벌 없던 발망 남성 컬렉션에서 화제가 된 건 의외로 슬라이드다. 흡사 비행접시 같은 독특한 실루엣의 패디드 슬라이드는 발망의 스니커즈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사파 사힌의 작품. 이렇듯 두툼한 솔에 풍성한 볼륨을 장착한 슬라이드가 이번 시즌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다. 드리스 반 노튼, 돌체앤가바나, 랑방, JW 앤더슨 등 여러 컬렉션에서 보기만 해도 푹신하고 귀여운 디자인의 슬리퍼들이 눈길을 끌었다.
# TUNIC SHIRTS
지난 시즌부터 비대면 시대를 맞아 선보였던 간결한 셔츠들이 한결 더 편안한 실루엣으로 채워졌다. 고대 그리스인이 입던 널찍한 튜닉 형태의 셔츠가 주를 이룬 것. 디올 맨은 아티스트 조지 콘도의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를 넣었고, 드리스 반 노튼은 튜닉 본연의 맛을 살린 큼직한 줄무늬 셔츠를 선보였다. 튜닉 셔츠 스타일링의 포인트는 하의 역시 얌전한 것을 고르는 거다. 그래야 산들바람에 너울거리는 튜닉 셔츠와 통일감을 이뤄 여유로운 실루엣을 완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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