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 세 편의 작품을 촬영했다. 인상적인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한 해를 돌아보는 것 같다. 영화 <승부> 촬영 끝나고 곧바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촬영했다. 촬영 중간에는 영화 <비상선언>으로 칸에 다녀왔다. 코로나 시대라 약 2년 만에 해외에 나갔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마무리하고, 미국 아카데미 개관식 참여를 위해 출국했고 얼마 전에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촬영을 시작해서 제주도에 있었다. 제주도에 20여 일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영화 <승부>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 바둑을 소재로 했다고?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 두 사람의 이야기다. 고증을 제대로 한 영화다. 영화의 모든 이야기는 실제 상황에 가깝다.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사연을 듣고 선뜻 출연을 결심했을 정도로 이야기가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이창호 9단으로 출연한 유아인 씨와 처음 연기를 해봤는데, 참 좋은 시간이었다. 실존 인물의 실화이기 때문에 조훈현 9단의 외형과 버릇을 많이 따라 하려고 자료 화면을 보면서 공부했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을 모르는 요즘 세대가 보면 독특한 캐릭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실존 인물을 재현했기에 캐릭터 분석 과정에선 기존과 다르게 접근했을 것 같다.
물론이다. 픽션의 캐릭터는 만들어진 인물이라 감독과 상의하며, 창작자의 의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실존 인물을 연기하면 그런 자유로움은 배제된다. 그 인물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유롭게 연기를 펼치는 게 아닌 자제하는 성향이 생긴다.
조훈현 9단도 직접 만났나?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으니 공부를 해야 되니까. 만나서 한 서너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만나기 전에 인터뷰나 다큐멘터리를 많이 본 상태였다. 직접 만나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면 자료 외의 비하인드나 더 깊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마련한 자리였다. 그런데 과거 TV에서 한 이야기를 똑같이 하시더라. 내가 공부한 자료 이외의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었지만 실제로 만났다는 것과 대화를 나누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제목 참 역설적이다.
재난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 재난 영화라 하면 평온한 세상에 엄청난 재난이 발생한다.
재난 영화에선 재난의 스케일이 중요하다.
그렇다. 관객들이 ‘우와!’ 하며 놀라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재난으로 모든 게 무너진 상태에서 시작된다. 재난의 규모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서 변하는 인간성을 다룬 영화다. 극단적인 장면이나 폭력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 영화의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블랙코미디다. 폭력적인데 실소가 타져 나오는 독특한 이야기다. 조금 실험적인 느낌도 있다.
우리가 알던 세계가 무너진 모습은 어떻게 표현됐을까. 시각 효과도 기대된다.
CG가 엄청 많이 들어갔다. 서울의 랜드마크인 고층 아파트는 기울어져 있고, 길거리는 다 무너져 그냥 폐허다. 사람들은 내 집 하나 장만하기 힘들고, 가장은 가족을 위해 작은 집이라도 가지려고 하지 않나. 영화에선 겨우 아파트 하나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엄청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 말이다. 그런데 최신식 고층 아파트 같은 건 다 무너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간신히 살아남은 아파트가 그 낡은 아파트다.
정말 블랙코미디네?
그렇다. 그 낡은 아파트 주변의 생존자들은 살기 위해 낡은 아파트에 들어가려 하고, 주민들은 그들을 막으려 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충돌을 다뤘다.
영화 <비상선언>은 코로나 이전에 촬영 시작한 영화라고?
코로나 초기에 촬영이 시작됐는데, 이 영화는 진짜 재난 영화다. 코로나를 1년 이상 겪은 우리가 보면 감정적으로 심하게 와 닿는다.
코로나도 달라진 일상 중에는 극장도 있다. 오랫동안 극장에 못 간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가 완화된다고 해도 극장에서 영화 보는 문화는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위협을 느꼈다. 나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영화만큼 좋아하기에 사람들이 극장과 멀어지는 상황이 안타깝다.
극장 공간이 갖는 매력은 무엇인가?
어려서부터 극장 공간 자체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이라 상실감이 크다. 내가 생각하는 극장의 이미지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그런 극장이다. 영화도 중요하지만 그걸 보는 공간도 중요하다. 다섯 살쯤 처음 사촌형과 극장에 갔고, 초등학교 때는 혼자 극장에 갔다. 극장에 들어가면 특유의 냄새가 있었는데, 그 냄새만 맡으면 흥분될 정도로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극장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 영화를 보는 장소 자체가 중요하다. 어머니와 함께 살 때도, 결혼하고 나서도 다른 건 몰라도 아주 작게라도 영화 보는 공간을 마련했다. 영화를 어떤 공간에서 어떤 컨디션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OTT는 편리하지만 극장의 맛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갈 세대는 좀 안타깝기도 하다. 극장 냄새를 맡고 사람들과 함께 웃고 슬퍼하며 느끼는 감정은 혼자 영화 볼 때와는 다르다. 물론 혼자 봐도 좋지만 그런 감정은 이제 옛날 사람들만 가지는 경험이 될 것 같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배우가 된 것 같다. (웃음). 영화를 보는 방식이 변하며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다.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오징어 게임>은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한류가 전 아시아에 퍼졌을 당시만 해도 엄청난 인기였다.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전조처럼 느껴진다. 이제 본 게임에 들어가는 것 같다. <기생충>부터 지금의 상황을 보면서, 나이 든 분들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한다. 판타지가 현실이 돼가는 상황이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 궁금하다. 사실 얼떨떨하다.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병헌은 항상 한류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류의 역사를 함께했으니 가장 가까이 있었던 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임에도 그냥 신기하다. 이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잘 모른다. 처음 한류 때문에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또 미국 영화를 경험하면서 우리나라 콘텐츠를 보면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우리는 해오던 대로 해왔을 뿐인데, 왜들 그렇게 난리인가, 우리나라 영화 좋은 거 몰랐나? 하지만 해외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지금 우리나라 콘텐츠는 미쳤구나’ 이 생각만 든다.
무슨 뜻인가?
객관적으로 봐도 진짜 좋다, 진짜 잘한다는 거다. 그게 느껴진다. 나는 옛날과 지금도 똑같은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우리 작품을 좋아하나 싶었는데, 밖에 나가면 우리가 잘한다는 게 느껴진다.
연기 활동의 변곡점이 된 작품은 무엇일까?
<달콤한 인생>은 내가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작품이고. 정확히 어떤 터닝 포인트라고 짚을 수는 없지만 내게 큰 변화를 준 작품이다. 그 전에는 <공동경비구역 JSA>. 처음으로 흥행한 영화라 배우로서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나는 비아냥댔다. “왜 영화를 숫자로 얘기해? 영화는 그런 거 아니잖아. 몇 사람이 봐도 좋으면 된 거잖아.” 순진하고 순수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영화제에서 ‘흥행 배우 이병헌입니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다들 코미디로 받아들이는데 나는 비아냥이었다. 당시 나는 계속 영화를 말아먹어서 영화판에 또다시 도전할 수 있을까? 아무도 안 써줄걸? 이 상태였다. 그러다가 다섯 번째 영화로 관객 수 기록을 깼다. 그때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벌써 21년 됐다. 2021년은 어떤 해로 기억에 남을까?
바깥에 보여준 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더 큰 발전을 위해 웅크리고 있었던 시간이랄까? 훗날 좋은 결과와 상황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기간으로 기억될 거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