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메타버스가 따로 있나 싶다. 현실 사회에서는 온화한 사람들이 키보드 앞에만 앉으면 전투 민족이 된다.” 최근 취재차 만난 한 대학교수의 이야기다.
그의 분석처럼 한국 사회의 갈등은 줄곧 온라인상에서 표출됐다. 온라인상에서는 나이 든 사람에게 ‘꼰대’라 비난하던 사람도, 실제로는 눈앞의 어르신에게 꼰대라 부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갈등이 현실 사회로 표출되지 않아서였을까. 최근까지 한국 사회는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무관심했다.
무관심의 부작용일까. 온라인에만 머물 줄 알았던 갈등이 최근에는 현실 세계까지 넘어오고 있다. 댓글이나 게시글로 다투다가 실제 다툼으로 번지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소송까지 불사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을 모아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한국 사회의 갈등이 심각하다는 것은 수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통계청이 2021년 3월 발표한 ‘2020년 한국의 사회지표’ 조사 중 사회 갈등 인식 조사를 보면 지금의 한국을 ‘갈등 공화국’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갈등이 격하게 발생하는 부분은 ‘보수와 진보 집단 간 갈등’이었다. 전 국민의 85.4%(복수응답)가 이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고 인식했다.
이어 우리 국민이 ‘갈등이 심하다’고 인식하는 집단은 빈곤층과 중·상층(82.7%), 근로자와 고용주(74.2%) 순이었다. 수도권과 지방(62.7%), 노인층과 젊은층(60.9%), 종교 갈등(55.4%), 성별 갈등(48.8%) 등도 무시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니었다. 한국의 갈등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심각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8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정치·경제·사회 분야를 종합해 갈등지수를 산출했다. 그 결과 한국의 갈등지수는 55.1. 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세 번째로 높았다.
정부의 갈등관리지수도 낮다. 같은 조사에서 정부의 효율성, 규제의 질, 부패에 대한 통제, 정부의 소비지출 비중 등을 따져 산출한 정부의 갈등관리지수는 46.2로, OECD 30개국 중 27위로 최하위권이다.
일각에서는 정치권에서 갈등을 방치·이용한다는 분석도 있다. 갈등을 유발해 지지 세력을 결집시킨다는 이야기다. 대표적인 예가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1992년 ‘초원복집 사건’이다. 대선을 1주일 앞둔 12월 11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당시는 법무부 장관 임기를 마친 직후)이 지역 유지들에게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략이 주효했는지, 이 선거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러나 이것도 당시의 지역 갈등처럼 서로 싸울 요소가 적을 때 가능하다. 갈등의 양상이 다양하고 심화되면 정치권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표류하기 시작한다. 특히 지금처럼 지역 갈등 외에도 소득, 성별, 나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지지층을 결집시키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다 역풍을 맞는 경우도 있다.
짧았던 정치권의 20대 남성 구애 현상만 봐도 알 수 있다. 4월 7일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로 20대 남성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국민의힘 후보였던 오세훈 시장에게 몰표를 준 것 때문이다. 이날 선거를 한 20대 남성 중 70% 이상이 국민의힘에 표를 던졌다. 20대 남성이 보여준 표 결집력에서 미래를 보았는지, 야당은 여성가족부 폐지, 여성 할당제 폐지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장기화될 것 같았던 20대 남성 구애 현상은 네 달도 채 되지 않아 끝났다. 도쿄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인 안산 선수를 둘러싼 페미니스트 논란 때문이었다. 일부 커뮤니티에서 안 선수가 머리가 짧고 여초 커뮤니티에서 주로 쓰던 단어를 사용했다며 비판에 나선 것. 여기에 정치권이 불을 지피려 했다. 양준우 국민의힘 대변인은 페이스북에서 “(안 선수 페미니스트) 논란의 핵심은 ‘남혐 용어 사용’에 있다”고 주장했다. 20대 남성 지지율을 높이려는 전략이었겠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20대가 국민의힘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20대에서의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율 추이를 살펴보면 7월 1주(6월 29일~7월 1일) 24%-30%, 7월 2주(7월 6~8일) 23%-25%, 7월 3주(7월 13~15일) 19%-23%로 3주 연속 국민의힘이 민주당을 앞섰다. 그렇지만 7월 4주(7월 20~22일)에서 각각 21%씩 동률을 기록하더니 7월 5주(7월 27~29일)부터는 29%-19%로 역전됐다. 누구든지 쉽게 편들 수 없는 상황에서 인기를 얻는 것은 ‘파격’으로 무장한 정치인이다. 이들은 갈등 상황을 단순화한다. 방식은 간단하다. 반드시 타파해야 할 ‘공공의 적’을 만들어 지지층을 결집시킨다. 그러고는 적을 확실하게 제압한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이 같은 유형의 정치인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다바오 시장 시절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사병 조직을 만들어 범죄자를 잡아들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적은 불법 이민자였다. 이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와 이권을 뺐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파격적 행보의 정치인에게도 약점은 있다. 본인이 적으로 규정한 세력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항상 소수여야 한다. 다수의 지지만 받을 수 있다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여당에서는 이재명 경기도지사, 야당에서는 홍준표 의원이 이 같은 파격형 정치인으로 꼽힌다. 두 사람 모두 ‘사이다 발언’으로 지지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사회적으로 악인이라 낙인찍힌 제도나 사람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며 인기를 끄는 식이다.
정치 평론가들은 “‘사이다 발언’ 같은 파격적 행보는 사회적 갈등 해결 방식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데이터 사회학자인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대학원 교수는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의미”라며 “설득이 아닌 파격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후퇴한다”고 설명했다.
갈등에 지친 한국인들은 6개월 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필리핀과 같은 선택을 할까. 아니면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인을 발굴해낼 수 있을까.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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