➊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
가을에는 꼭. 꼭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가야 한다. 과천 가는 길은 늘 막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대공원역부터 미술관까지 숲과 같은 언덕을 오르면 붉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다. 이 언덕은 직접 운전을 해서 가거나 미술관 셔틀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셔틀버스를 탄 날은 전시를 본 뒤 서울대공원 리프트를 타고 내려오는 재미가 있다. 이렇게 과천관은 서울관과 다른 매력으로 가을마다 발길을 끈다. 그리고 꽤 다른 전시 콘텐츠를 제공하기도 한다. 동시대 미술보다 현대미술에 주력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과천관에서는 지금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 전시를 하고 있다. SNS에서 인기 있는 전시는 아니지만, 꼭 봐야 할 전시다. 2년여의 긴 전시 기간이 그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 같다.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더더욱 봐야 하는 전시다. 지금 보는 미술을 명확히 보려면 지난 시간을 알아야 한다. 전시는 1900년대 초 안중식, 김규진의 회화부터 2000년대 정연두, 남화연의 영상 작업까지 한 세기를 채운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2층과 3층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데 3층부터 물 흐르듯 연대순으로 보는 구성이다. 전시를 이 순서로 보면 작업의 대상이 인물과 사물에서 사람과 사건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표현 방식도 회화와 조각에서 영상과 설치 등으로 넓어졌다. 관람하며 곽인식의 깨진 유리 작업과 서용선의 초기 작업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한 세기를 채운 작품들을 보고 미술관을 나선다. 이번에는 홀로 운전을 해서 언덕을 올라왔다.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겨 차를 타고 다시 시동을 건다. 천천히 대공원역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며 내려간다. 어쩐지 차분해진 기분으로 길을 지나며 전시가 보여준 ‘흐름’에 관해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흐름 속에서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헤아려본다. 팬데믹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지금. 메타버스가 멀지 않은 세상이 된 지금. 혐오와 폭력이 넘치는 것 같은 지금. 하지만 아무리 미루어 생각하려 해도 가늠할 수가 없다. 흐름은 가까이서는 볼 수 없고 늘 멀리서만 보인다. 결국 가까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록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타이핑을 해보는 것이다.
WORDS 김한들(큐레이터)
➋ <안녕, 모란>
국립고궁박물관은 서울에 숨어 있는 보물 같은 곳이다. 경복궁역 5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정문이 기다리는 환상적인 교통, 경복궁 경내에 있어 넓게 펼쳐진 시야로 궐의 모습과 도심을 채운 현대적 건물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기이하고도 독보적인 분위기도 그렇지만, 일단 큐레이션을 굉장히 잘한다. 가성비와 가심비를 고려할 때 여기 기획전만큼 알찬 경우가 거의 없다. 이번 <안녕, 모란>전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란은 다른 꽃들이 질 무렵인 늦봄에 만개하는 나무로 3겹으로 갈라지는 특유의 풍성하고 커다란 꽃의 자태가 예부터 풍요로움과 부귀영화를 상징해 꽃의 왕, 화중지왕, 줄여서 화왕(花王)이라 불렸다. 덕분에 왕실과 사대부에서 길상의 상징으로 듬뿍 애정을 받았고, 이는 군자를 상징하는 매화나 연꽃보다 훨씬 전방위적인 사랑이었다. <안녕, 모란>전은 이런 모란에 대한 애정이 왕실의 중대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여러 장식물과 그림을 통해 직접적으로 소환한다. 주머니, 혼례복 등 비단 위에 섬세하게 수놓은 모란 장식부터 상중의 엄숙함을 강조하기 위해 평면적으로 해석한 궁중용 모란 병풍도까지, 단순한 내러티브에 맞춰 깔끔하게 등장하는 유물들은 실제 혼례와 장례에 쓰이던 모란의 여러 측면을 정직하게 보여주며 모란이란 대상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귀한 것’의 보통명사로 쓰일 법한 왕실의 물건이기에, 그 도안은 정교하고 표현 기법은 최상을 달린다. 이런 세월이 묻은 공예품을 실제 눈으로 접하는 즐거움은 사진이나 3D로 결코 전달하지 못하는 정성스러움에 기반을 둔다.
풍요롭고 부유하며 부족할 것 없는 모란을 통해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길 원했던 조상들의 염원은 세대를 뛰어넘는 진심이었기에, 여러 대에 걸쳐 쌓아 올린 길상의 표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니 어느새 그 힘이 넘어와 나를 가볍게 감싸는 환상이 들 정도였다. 적절한 강도의 자극 덕분에 코로나19로 굳게 닫혀 있던 머리와 마음에 균열이 생기며 빛과 분위기에 젖어드는 경험은 그 자체로 영감이면서, 이후 나를 기다릴 세상의 모든 영감이 부드럽게 침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여기서 얻은 전시에 대한 영감이라면, 탁월한 예술사적 의미를 지닌 유물들을 섬세하고 다층적인 의미로 엮어낸 대형 전시에서 기대하는 복잡한 심경의 감동만 중요한 게 아니라, 애당초 규모가 작은 전시에서 평범한 유물들과 함께할 때 느끼는 미적 충만감과 흥미로움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예술성과 만족감은 별개의 문제이며,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 상황에 따라 각 전시는 제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충분히 이루었을 때 완성도가 높아진다는 점은, 지금껏 블록버스터 전시에만 초점을 맞추며 작은 전시를 가볍게 보던 내 머리를 때리는 기분 좋은 죽비 소리였다. 이 ‘적절한 전시’를 기획한 이도 시대에 지친 사람들에게 모란의 풍요로움을 최대한 나눠주고 싶었던 것 같다. 프로젝터로 재현한 숲 풍경을 배경 삼아 비록 조화지만 빨강, 주황, 분홍 계열의 여러 모란을 심은 후, 두루마기 서화에 딱 맞는 크기로 만든 투명한 관람 박스를 배치해 사람들이 거리감 없이 모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대표적이다. 이런 격식 없는 느낌이야말로 모든 게 심각한 이 시대에 꼭 알맞은 태도라 절감했다. 전시를 보고 나오며 축축한 땅에서 피어오르는 흙의 내음과 주변을 둘러싼 소나무의 청명한 향취가 고궁 풍경과 함께 내 감각을 가득 채우니 ‘참 좋았더라’ 한마디가 자연스레 입에서 떨어졌다. 마스크가 지배한 이 마르고 답답한 세월에 단비가 스며든 것처럼.
WORDS 전종현(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➌ <서승원: 동시성-무한계>
요즘 나는 바늘 위에 서 있는 기분이다. 무엇이든 파고들 날카로운 바늘 끝에 서면 저 멀리 힘없이 늘어진 가느다란 실이 보인다. 아니 저건 실이 아니라 한때 몰두했던 과제들이다. 해결하기 귀찮아 잊기로 한 삶의 화두들. 더 깊이 고민하지 않았고, 더 오래 가슴에 지니고 있지 않아 형태도 갖지 못했다. 내 지난날은 거미줄처럼 숨마다 흔들렸다. 한숨을 쉬며 삼청동에 갔다.
PKM갤러리에서 단색화의 대가 서승원 화백의 <서승원: 동시성-무한계> 전시 오프닝이 열렸다. 작품만 보고 나올 심산이었는데, 내 속을 읽은 눈치 빠른 홍보담당자가 물었다. “작가님과 인사하시겠어요?” “네, 뭐 그러시죠”라고 말하긴 했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름부터 어려운 전시인 데다 그림도 난해한 기하 추상! 60년간 한 우물만 파온 단색화의 대가에게 가벼운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멍청한 질문은 무례다. 나는 후회했다. 미술에 조예가 얕은 것과 미술관을 멀리해온 지난 시간이 부끄러웠다. 가방에서 명함을 찾는 척하며 기지를 발휘했지만, 떠오른 질문은 감상평에 불과했다.
별관에 전시된 최근작은 색이 독특했어요. 특히 분홍색이 인상적이었어요. 팔십대에 접어든 화백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유년의 기억을 꺼내 보였다. 꼭 들어야만 한다며 그는 70년 전 이야기를 했다. 원색 옷은 귀해 흰색 옷만 입던 사람들,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와 그 정갈한 리듬, 문창살 창호지에 손가락으로 낸 구멍들과 그 구멍을 막으려 덧붙인 네모난 창호지 조각들, 창호지 문을 통과해 사랑채 안으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빛, 백자의 소박함도 언급했다. 그것들은 걸러짐에 대한 이야기였다. 해를 창호지로 걸러내고, 광목천을 두들겨 색을 걸러내는 것. 걸러냄은 자연을 정복하기보다 순응해온 한국인의 특성이고, 한국의 문화와 정신이다. 우리의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 화백은 색을 몇 번이고 걸러낸 다음 그림을 그린다. 원색은 사용하지 않는다. 걸러낸 소박한 색으로 기하학적인 형태를 만들고, 캔버스에 동일하고 균등하게 담는다. 서승원 화백은 그의 그림에 담긴 ‘동시성’ 개념도 설명했다. 그의 ‘동시성’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캔버스라는 공간에 동일하고 균등하게 구현하는 것이라 한다. 그 세계는 한국의 문화와 정신일 것이다. 서승원 화백은 동시성을 화두 삼아 지난 60년간 그림을 그렸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몇 가지 질문을 더 주고받았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60년 동안 그가 해온 고민의 깊이를 나는 헤아릴 수 없었다. 긴 시간이니까. 30년 뒤라면 모를까? 그때도 모를 거다. 팔순의 작가는 요즘 명상을 자주 하고, 무념의 상태를 지향한다고 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거라면 자신 있다. 생각하지 않으려 휴대폰 게임을 습관처럼 한다. 습관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이 늘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해야 한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쓰고, 계획해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서 그렇다. 미래를 두려워해야 하는 시기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그림을 봤다. 네모들이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커다란 그림이었다. 그 네모들에게 이름을 붙여봤다. 아들의 이름을, 아내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살고 싶은 아파트 이름도 붙였다. 걸러낸 색으로 그린 가족과 꿈. 70년 전 사람들처럼 우리도 현실에 순응하고 소박하게 살면 행복해질까. 음, 이것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화두에 형체가 생겼고,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거다. 택시에 올라 그림을 복기했다. 몇 번이고.
EDITOR 조진혁
➍ <한국의 해양 생물과 다른 기이한 이야기들>
팬데믹을 뚫고 미국의 스타 미술가 마크 디온(Mark Dion)이 한국에 왔다. 해양박물관으로 변신한 전시장에서 만난 마크 디온은 과학자의 가운을 입고 해양 생물을 그리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진두지휘하는 중이었다. 아시아 최초의 개인전이니만큼 기꺼이 태평양을 건너 날아왔다. 더군다나 그의 전시는 우리나라 해양 생태계와 생물의 다양성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작가가 현지에서 수집하고 연구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것은 현대인이 처한 팬데믹 상황을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우리는 자연의 소중함을 절감했으며, 인류 문화의 보고인 박물관과 미술관조차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절망했다. 그는 이미 1980년대부터 자연의 의미와 박물관의 정의에 대해 탐구해왔다. 그간 세계의 바다에서 채집한 물건들로 해양 폐기물 캐비닛 연작을 만들어왔는데,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을 확인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보고라는 것이다. “자연을 탐구하는 인류의 전통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왔고, 나 역시 끊기지 않는 이 사슬의 일환이라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요즘은 예술가와 과학자의 간격이 멀지만,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가는 곧 과학자였지요.”
한국 관람객을 매혹시키는 대표 작품을 살펴보자. 1층과 2층 전시장은 그가 직접 만든 벽지로 장식되어 있어 마치 오래된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그의 작품은 진지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유머를 잊지 않는다는 것도 특징이다. 그가 스타 작가로 군림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전략이다.
예를 들어 1층 전시장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진지하게 그리고 있는 생물은 매일 수산시장에서 사오는 해산물이다. 이를 통해 희귀한 것만 소중히 여기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 2층 전시장의 공룡 조각 ‘브론토사우르스’ 좌대 하단에는 문이 열려 있고 청소 도구가 보인다. 자본주의와 자연의 관계를 비판하는 주제를 담은 작품이지만, 박물관의 비하인드를 보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관람객이 문이 잘못 열린 것으로 오해해 닫아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루에 몇 번씩 문의 개폐 여부를 확인한다고 한다. ‘해양 폐기물 캐비닛’ 신작은 환경단체·공공기관과 협업해 남해와 서해에서 채집한 폐기물들을 미학적으로 진열했다. 그는 1990년대부터 바다를 소재로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세계의 바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가 하나의 바다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번 ‘해양 폐기물 캐비닛’ 작업을 위해 미국에서 미리 스케치를 그려봤는데, 나중에 한국 바다에서 채집한 폐기물과 유사했습니다. 산업화된 자본주의 국가의 바다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플라스틱 폐기물의 70%는 해양 산업의 잔재라는 것도 씁쓸하지요.” 바다를 사랑하면서 바다 덕에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로 인해 바다가 오염된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실감할 수 있을 것. ‘우주론적 캐비닛’ 작품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정물화에서 영향을 받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상단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바퀴와 화살, 모래시계가 있고, 중간에는 인류 문화의 파편과 씨앗, 조개가 담겨 있다. 하단에는 ‘수집’과 ‘분류’에 대한 아이디어를 작은 책자들로 보여준다. 작가는 한국의 책가도와 캐비닛 연작이 일종의 공통점을 갖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물론 책가도는 입신양명의 바람을 담은 그림이지만, 캐비닛에 진열한 물건과 같이 보는 이를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는 데서 비슷한 점을 발견한 것.
WORDS 이소영(미술 저널리스트)
가을 미술 이번 가을 눈여겨볼 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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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개인전
박서보 개인전 한국 단색화를 전 세계에 알린 박서보 작가의 개인전이 개최된다. 박서보 개인전은 2010년 이후 두 번째다. 박서보 작가는 동아시아의 자연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담아낸 그림으로 한국 모더니즘을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후기 묘법 내지는 색채 묘법으로 알려진 2000년대 이후 근작 16점이 소개된다. 국제갤러리에서 9월 15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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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
올해 네 번째로 개최되는 는 현대미술가(권혜원, 김명범, 윤석남, 이예승, 지니서), 조경가(김아연, 성종상), 애니메이터 (이용배), 식물학자/ 식물세밀화가(신혜우), 무형문화재(황수로) 등 다양한 분야와 세대의 작가 9팀이 참여해 ‘정원’을 매개로 덕수궁의 역사를 돌아보고 동시대 정원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11월 28일(일)까지 덕수궁 야외에서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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