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다가 올림픽 중계를 보았다, 기보다는 채널을 잠시 멈췄다. 높이뛰기 종목 결선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진택 선수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높이뛰기 결선에 진출하는 걸 보며 기뻐했던 사람이다. 한국 육상 트랙 앤드 필드 선수가 결선 무대에 올라가는 일 자체가 워낙 희귀했던 시절이라. 물론 지금도 그렇다. 세계의 벽은 높았다. 이진택은 8위를 했다. 그는 비장하게 날았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초조해졌다. 그러나 그 순간이 어떤 씨앗이 되었을 것이다.
이진택이 세운 한국 신기록은 2m 34cm다. 이 기록이 무려 24년이나 깨지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아무튼 채널을 돌릴 참이었다. 올림픽 높이뛰기 결선 무대를 볼 이유가 없었다. 대한민국 선수가 있을 리 없어서. 그런데 있었다. 오, 대박! 올림픽 출전권을 땄어? 하는 생각을 3초쯤 하다가, 결선 맞지? 다시 확인하고, 헐, 올라왔다고? 이렇게 생각이 이어졌는데, 웃고 있었다. 한국 육상 선수가 결선 무대에서 웃고 있었다. 종목은 다르지만, 같은 육상 선수인 황영조, 이봉주도 웃으면서 달리지는 않았는데, 이 선수는 웃고 있었다. 그래서 더 보았다. 본인이 넘을 차례였는지 관중석을 향해 머리 위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 저런 건 외국 선수만 하는 거 아냐? 나 혼자 TV를 보는 중이었는데도 마치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말해버렸다. 그만큼 놀라웠다. 사실 그 순간 약간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했다. 어설프게 흉내 낼 거면 하지 마, 우리는 한국인이야, 한국인이 육상 종목 결선에서 그렇게 대범하게 구는 건 어울리지 않다고,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믿지 못한 것이다. 저 한국 선수가, 심지어 체구도 작은 한국 선수가 엄청나게 높이 날 것을 믿지 못했다.
굳이 여기 이렇게 적는 이유가 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 결선에 올랐다면 충분히 선전한 거야, 하지만 여기까지야,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선수는 머리 위로 박수 치는 걸 꽤 익숙하고 멋지게 잘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놀랍고 대견했다. 관중들이 호응하며 박수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선수가 달려나갔는데,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2m 35cm를 넘었다.
여기서 다시 이진택을 소환하자면, 올림픽 결선 무대에서 이진택은 2m 29cm를 넘었다. 이진택은 한국 육상이라는 아주아주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이 높이를 넘었다. 선구자의 운명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이 무게가 덜했다면 더 높이 날 수 있었을까? 음, 그러니까… 올림픽을 더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이진택의 표정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비장한 새. 올림픽을 즐기지 않았다. ‘못했다’기보다는 ‘않았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들 금메달 따라고 하니까! 그래서 아무도 한국 육상을 주목하지 않았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우상혁은 웃었다. 이진택 이후로 처음 육상 트랙 앤드 필드 선수가 결선에 오른 거니, 지난 25년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을 텐데, 웃었다. 심지어 세계 톱 랭커들과 어울리며 함께 경기했다. 나는 이 부분에 굉장히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우상혁이 경기하는 모습에서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 한국 육상의 미래를 짊어져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건 없었다. 그걸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을 거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경기는 온전히 선수 본인의 것이니, 원칙대로는 그저 자신의 경기를 하면 된다. 우상혁은 자신의 경기를 했다. 심지어! 결선에 진출한 선수들 중에서 제일 많이 웃었고 제일 즐거워했다. ‘누가 가장 행복하게 경기했어?’라고 묻는다면, 다들 우상혁을 꼽을 것이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 중 누구라도 우상혁이 경기하는 걸 보면서, ‘아, 우리 저렇게 즐겁게 경기해도 되는 거였어’라고 할 것이다. 며칠 전 마라톤 국가대표 출신 코치와 우상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코치가 말했다.
“올림픽 출전권을 지난달에 땄더라고요. 그걸 따려고 최근까지 몸을 만들었을 테니까 최상의 컨디션으로 올림픽을 나간 거네요. 그래서 더 자신 있었을 거 같아요.” 우상혁은 7월 1일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총 32명이 올림픽에 출전하는데 31등이었다. 올림픽 출전이 확정되었을 때 우상혁은 “메달 획득에 도전하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호연지기가 맹자급이다. 그 말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거 같다. 하지만 올림픽에서 우상혁의 최종 순위는 4위였고, 정말로 메달을 걸고 맹렬하게 붙었다. 어쩌면? 혹시? 하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경기였다. 결선 대회가 끝나고 우상혁은 “최선을 다했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우리는 우리를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정작 우상혁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걸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우상혁의 개인 최고 기록은 2m 31cm다. 물론 과거형이다. 올림픽 출전 기준 기록은 2m 33cm였고 우상혁은 이 기록을 넘어본 적이 없다. 역시 과거형이다. 그런데 올림픽에서 넘었다. 다른 대회도 아니고 올림픽에서. 올해 2m 31cm 이상을 넘은 사람은 15명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관대하게 생각해도 우상혁은 메달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거듭 이 상황, 이 감정 등에 대해 뭐라고 어떻게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우상혁은 이진택의 최고 기록보다 1cm를 더 높이 날았다. 24년이 걸렸으니 그건 분명 긴 시간이고, 역설적으로 이진택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보여준다. 우상혁이 올림픽에서 개인 최고 기록을 훌쩍 넘고, 한국 신기록도 훌쩍 넘어 하늘을 나는 일은 순식간이었다. 출발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5초가 걸리지 않는다. 우상혁은 24년을 5초에 넘은 셈이다. 어쩌면 1cm를 위해 다시 24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면은 남는다. 그의 웃는 얼굴이 대한민국 육상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비장한 이진택과 미소 띤 우상혁 사이의 간극. 나는 이번 올림픽의 최대 수확이 이 간극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직 나는 이 간극을 이해하고 설명할 만한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한다. 우상혁의 도약이 대한민국 스포츠의 눈부신 도약이라고 적을 수는 있지만 온전하지 않다. 남들이 뭐라 한들, 결국 자신이 믿는 일을 이루게 된다는 말도 턱없이 부족하다. 다만 우상혁이 뿌린 위대한 씨앗을 생각한다. 이진택이 그랬듯 우상혁도 그런 존재다. 그래서 새삼 더 위대한 것이다, 그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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