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 뭐 봐?” 이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할 자신이 없었다. <라켓 소년단>을 만나기 전까진. 신하균이 충혈된 눈으로 진실을 찾아 헤매던 <괴물>도 진즉 끝났고, <펜트하우스>는 얼얼한 마라탕 같아서 엄두를 못 내던 내게, 맛있게 잘 익은 초록 사과 같은 드라마가 나타났다. 만화로 비유하면 아다치 미츠루의 <H2>에다 <터치>의 감성을 살짝 끼얹고 여기에 <리틀 포레스트> 딱 반 스푼만 넣으면 <라켓 소년단>이 완성된다. 드라마는 땅끝마을 해남에서 배드민턴에 청춘을 건 열여섯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억지스러움은 없지만 만화처럼 과장된 재미는 있고, 이야기들을 인위적으로 엮어 놓은 것 같지만 계곡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 농부와 원산지를 강조하는 무공해 식자재를 틱톡으로 홍보하면 이런 감성이 나오려나. 마치 유기농 식재료를 아주 힙하게 버무려 식탁에 올려놓은 느낌이다.
제2의 양현종을 꿈꾸며 야구를 하던 도시 소년 해강(탕준상 분)은 빚에 허덕이는 배드민턴 코치인 아빠(김상경 분)를 따라 해남으로 이사를 간다. 야구를 계속하기엔 전지 훈련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 게다가 똑같이 어려운 처지여도 편의점 알바에 막노동을 해가며 훈련비를 모아온 힘찬이 아빠 덕에 해강이는 한 자리 남은 엔트리마저 뺏긴다. 야구 선수의 꿈을 잠시 유예하고 아빠가 코치로 부임한 해남 서중학교 배드민턴 선수들과 만나게 된다. SNS 중독인 주장 방윤담(손상연 분)과 제2의 이용대를 꿈꾸는 이용태(이강훈 분), 핸드 쉐이크를 즐기는 힙합왕 나우찬(최현욱 분). 딱 이렇게 세 명뿐이라 단체 대회는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유년 시절 배드민턴 유망주였던 해강이 억지로 합류한다. 해강의 엄마(오나라 분)가 이끄는 해남 제일여중 배드민턴 친구들과 합숙을 하게 되면서 소년 체전을 향한 힘찬 첫걸음을 뗀다.
드라마는 대회 준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편, 배달 앱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도시 소년이 서로 ‘이웃집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시골 마을에 살면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이야기를 곁들인다. 옆집 사는 오매 할머니(차미경 분)는 “여기 오면 재미 없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손주를 위해 와이파이 빵빵한 게임방을 만들어 놓고, 도시 생활에 지쳐 귀농을 결심한 부부는 농촌 생활 또한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각자 일 때문에 떨어져 살던 해강의 부모는 부모 노릇이 처음이라 아직 서툰 것이 많다. 인생은 늘 그렇듯 예상을 빗나가고 의외의 좌절을 안겨주지만 뜻밖의 기쁨을 선사하기도 한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풋내 나는 청춘의 여정 중간중간,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에 관한 성찰도 엿볼 수 있다. 아직은 작고 보잘 것 없지만 뜨겁게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는 소년 소녀들이 고난과 역경을 딛고, 뭐가 됐든 한 단계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늘 감동적이다. 그런데 <라켓 소년단>은 이 드라마를 결코 뻔하게 이끌어가지 않는다. 착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처럼 보여도, 그 안에 바꿀 수 없는 냉정한 현실도 담겨 있다. “돈 없어서 야구 못 한다는 얘기 했어?” 해강이 엄마의 한마디는 “너의 모든 꿈을 응원한다”는 모범 답안과는 거리가 멀다. 해강이 또한 배드민턴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망주로 손꼽혀봤자 “배드민턴은 멋이 없다”는 친구들의 반응에 의기소침해진다. 모두가 멋지다고 할 만한 야구 투수로 전향하게 된 것도, 다시 배드민턴 채를 잡으면서도 “오래 안할 거야”라고 한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또, 좋아하는 운동을 부모님의 반대로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치기도 하고 정체된 실력에 스스로 좌절하기도 한다. <슬기로운 감빵 생활>을 집필했던 정보훈 작가는 작은 시골 마을, 몇 년간 선수가 없어 단체전을 나가지 못 할 정도로 비인기 종목인 배드민턴을 이렇게나 가슴 뜨겁게 다룬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자던 배감독(신정근 분)은 전설적인 지도자 하얀 늑대였고, 오늘만 대충 사는 것 같던 해강 아빠 현종도 점점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에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남 체육사 사장님이 붙여준 ‘라켓 소년단’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도 이들의 면면을 알고 보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오랜 시간 동안 장르물이 유행하면서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좀비나 괴물 아니면 연쇄 살인범을 물리도록 보았다. 또, 욕망의 끝을 보여주는 주인공들이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인간을 해하는 것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드라마 1회 동안 몇 명이 죽어나가는지 세어보는 재미도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고강도, 고자극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라켓 소년단>은 아무런 자극 없이 착하고 심심한 드라마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오매 할머니가 해강이 남매에게 잔치국수를 끓여줄 때를 떠올려보자. 무공해 호박과 당근, 달걀 지단까지 프로페셔널한 자연 밥상처럼 착착 준비했지만 마지막에 무엇으로 요리를 완성했는지 기억하는가? 바로 사랑의 ‘미원’이었다. 여기서 <라켓 소년단>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완전 무공해 드라마지만 마지막의 조미료 반 스푼은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 시트콤처럼 재미있는 대사와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고, 갑자기 곰과 하얀 늑대가 CG로 등장하기도 하면서. 가만 있어도 참 귀여운 소년 소녀들의 캐릭터 성장에 따라 방송 직후 SNS에 <라켓 소년단> 새로운 버전의 단체 포스터를 공개한다. 야구 유니폼을 입던 해강이가 ‘민턴복’을 입은 모습으로 바뀐 것처럼,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을 귀엽게 스포일러하고 있다.
약수터에서 어르신들이 열심히 하는 운동으로만 여겼던 배드민턴이 누군가에겐 청춘을 걸 만큼 소중한 꿈이다. <라켓 소년단>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이야기해준다. 해강이는 시합을 앞둔 세윤(이재인 분)에게 이런 응원의 메시지를 들려준다. “내 생각에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어. 지금도 충분히 충분하고 대단히 대단하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져도 돼.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그동안 고생했다!” 이 대사 속에 드라마를 보는 내내 입안 가득 청량함과 개운함을 느꼈던 이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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