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아니 지금부터는 (영문 이니셜이자 아티스트 표기명인) DHL이라 칭할게요. 당신의 커리어를 살펴보면 200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한국 클럽 신의 전성기 시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서브 컬처 범주에서의 활동들이 현재 DHL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클럽 신은 음악이 주가 되는 분야잖아요. 당시 파티 포스터들을 보면서 그래픽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럼 내가 이쪽에서 역량을 발휘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죠. 파티는 클럽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열리니 다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때 자유분방한 디자인을 많이 했죠. 지금의 정제된 모습도 당시 경험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거고요.
파티 크루들 사이에서 DHL은 유명했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어요. 브랜드 디자인을 변용하면서, 일련의 과정이 당신을 널리 알리게 한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제가 브랜드 ‘DHL’을 패러디한 후 버질 아블로의 오프화이트에서 패러디가 나왔고, 베트멍에서도 그 브랜드를 패러디했죠. 브랜드에서 내용증명이 날아오고, 또 그 일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대중이 저를 인지하게 된 것 같아요.
글로벌 기업에서 덜컥 내용증명이 날아왔을 때, 어릴 때였죠. 조금 겁나기도 했을 것 같아요.
겁이 나진 않았어요. 역사적으로 제프 쿤스나 데미언 허스트 등이 아티스트로서 잘 풀려간 과정을 보면 다 그런 일이 있잖아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앤디 워홀이나 장 미쉘 바스키아도 그렇고요. 과감한 시도 때문에 문제가 발발하고, 그게 발전하면서 일종의 새로운 컬처가 된다고 생각해요. 제게 날아든 내용증명도 운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큰 기업이 미약한 제게 내용증명을 보냈다는 건 제가 일정 부분 영향력이 있다는 거니까요. 또 기업과도 잘 해결했고요. 되려 나중에 함께 할 일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도 했어요.
DHL의 DHL 패러디는 꽤 흥미로웠어요.
당시 좀 도전적이긴 했어요. 사실 한국의 패러디 문화나 부틀렉 문화가 자리 잡히지 않은 시기에 파인 아트적 측면에서 로고를 회화로 풀어내는 작업이 과연 어떤 저작권을 침해하는 것인가에 대한 저의 개인적 의문이 있었거든요. 단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일 뿐인데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내용증명이 날아왔죠. 하하.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 아주 잘나가는 신의 동생들이 있어요. 그들과 크루로서 함께할 기회가 많았을 텐데 굳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그들과 함께했으면 지금쯤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말이죠.
지금은 커진 힙합 레이블, 또 잘나가는 크루들이 몇 있었죠. 그런데 제겐 창작에서 얻는 만족감이 삶의 기반이거든요. 제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내고 싶거든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를 바란다고 할까요? 이미 형성된 명성과 더불어 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일궈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사실 유명한 카드 회사에서도 제의가 왔었거든요. 하지만 거절했죠.
IWC의 빅파일럿 43과 관련된 모션 그래픽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당신에게 전달된 건 워치의 히스토리와 약간의 텍스트, 그리고 사진이 전부였는데 말이에요.
빅파일럿 43의 블랙 다이얼을 보면 아주 미니멀하잖아요. 그 심플함이 발산하는 오라가 있어요. 굳이 모션 그래픽에 컬러를 입히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 블랙과 화이트가 이번 빅파일럿의 명징한 색이라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어떤 사물 또는 제품이 가진 역사를 좋아해요. 긴 시간의 역사를 단시간 내에 축약해서 보여주는 행위가 ‘쿨’하다고 느껴요. 그래서 연도에 비례한 다이얼의 축소 히스토리를 40초 안에 담아보려 했어요.
DHL은 애니메이션을 공부했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유명세를 떨쳤고, 지금은 비주얼 아티스트로 다방면에서 활동해요. 근래에는 순수 미술에까지 도전하고 있어요. 이쯤에서 DHL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묻고 싶어요.
‘손맛’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그게 주는 의외성이 아주 흥미로워요. 디자인은 구획된 그리드가 존재하고, 그 속의 타이포그래피는 자간과 간격이 중요해요. 그래서 디자인은 수학적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그 딱딱함을 벗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어요. 제가 디자이너로 활동해오면서 항상 딱딱한 생각, 정적인 표현 등에 약간 식상해진 것도 있어요. 그 프레임을 탈피하고 싶었죠. 붓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실수도 하고, 또 그걸 덮어가는 과정에서 의외성을 발견하곤 해요. 그 실수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요. 그렇게 완성되었을 때, 그 속에서 작업의 시간이 느껴져서 좋은 것 같아요.
아티스트로서 자신이 걸어온 시간들이 있을 거예요. 일종의 ‘마이 웨이(My Way)’죠. 어때요? 잘 걸어온 거 같아요?
딱히 후회한 적은 없어요. 안 좋은 일도 있었고, 불합리하고 힘든 시간들도 있었죠. 그걸 미워하지는 않아요. 그 시절과 노력이 있어서 지금 보상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거든요. 또 과거의 시간들이 만들어준 좋은 습관들도 있고요. 예를 들어 이번 작업을 하면서도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든가 하는 약속의 개념들.
그럼 앞으로 DHL이 나아가고 넓혀야 할 길은 어떤 것일까요?
사실 저는 미래를 계획하기보다는 다가올 고작 하루, 이틀 정도의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4차 산업혁명이 어떻고, NFT라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 거론되는 등 미래는 너무 빠르고 복잡한 개념이잖아요. 이 엄청난 스피드의 변화는 피땀 흘려 노력한 이들에게 패배감을 안겨줄 수도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변화를 잘 바라볼 수 있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시선을 가지려 해요. 시대의 흐름을 보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는 거죠. 어렵게 말한 것 같은데, 요컨대 저는 미래보다는 오늘 하루를 잘 보내고 싶다는 말이에요. 시간은 언제나 의외의 연속이니까요. 저희가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처럼요. 무엇보다 저는 창작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해요. 그러니 뭔가를 만들어낼 수만 있으면 아무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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