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각 6월 7일 저녁 7시경, 필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복싱 매치의 영상을 틀었다.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로건 폴의 경기. 복싱 역사상 최고의 챔피언 중 한 명과 인터넷 역사상 최고의 유튜버 중 한 명이 벌이는 빅 이벤트였다. 이미 그날 오전 10시경 벌어진 시합이지만 업무가 바빠 퇴근 이후에야 볼 짬이 났고, 그동안 격투 커뮤니티나 스포츠 뉴스를 클릭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영상이 재생되고 마지막 8라운드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내가 기대했던 것은, 당연히 플로이드 메이웨더가 ‘건방진 일반인’에게 복싱 한 수 제대로 가르쳐주는 장면이었다. 킥복서 나스카와 텐신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로건 폴이 얼마나 유명하고, 키가 크고, 근육질에 체급도 더 높은 데다, 운동 경력이 얼마나 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술이란 본래 자신이 수련한 만큼 피지컬이 우위인 상대를 이기기 위해 고안된 것이며, 실제로 작은 체구의 고수가 몸집이 큰 일반인을 가지고 논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메이웨더는 졌다. 처참하고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무승부지만, 프로 경기 50전 전승 챔피언이 일개 유튜버를 링 위에서 때려눕히지 못한 이상 패했다는 데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경기 내용으로도 메이웨더는 전혀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메이웨더를 위한 변명을 해보자. 둘의 키 차이는 15㎝, 몸무게 차이는 16㎏이다. 즉, 피지컬은 로건이 유리하다. 일반적인 복싱 시합과 달리 이번 시합은 계약 체중조차 정하지 않은 이벤트다. 나이 역시 44세 대 26세로 상당한 차이가 난다.
신체적 문제와 더불어, 이번 매치의 특별 룰도 문제가 심각했다. KO가 나오지 않으면 판정 없이 무승부가 선언되는 3분 8라운드 매치. 상기했듯 무승부란 사실상 메이웨더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경기 초반 젊은 로건의 공세를 쉽게 방어하던 메이웨더는 후반으로 갈수록 초조한 모습을 보이며 거꾸로 전진 타격을 시도했다. 그의 현역 시절 보기 어려웠던 진기한 모습이었다. 무승부가 메이웨더의 패배를 의미한다면, 거꾸로 로건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던 영악한 로건은 자신의 체격적 우위를 살려 ‘메이웨더화’하기 시작한다. 긴 리치를 이용해 펀치 거리를 내주지 않고, 조급한 메이웨더가 앞으로 나오면 순식간에 클린치해 시간을 끌어 자신의 체력을 회복하는 전략. 클린치 높이는 점점 낮아져 시합 후반에는 마치 레슬링의 태클을 연상케 했다.
로건의 영악한 방어에 메이웨더는 정타 한 방 제대로 맞출 수 없었고, 마지막 라운드가 무정하게 끝나며 심판은 두 사람의 손을 같이 들어 올렸다. 공식 결과는 무승부일지언정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팬은 몇 없으리라.
‘50-1’. 동생 제이크 폴이 경기 직후 인스타그램에 남긴 말이다. 메이웨더가 사실상 1패를 기록했다는 의미다. 여기에 반론을 다는 사람은커녕 전 격투 종목 관계자와 팬들의 탄식이 인터넷을 장식했다. 차라리 메이웨더가 시합 제의에 응하지 않았던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 시합은 단순한 ‘챔피언이 아마추어에게 개망신을 당했다’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선 지난 4월 원 챔피언십 챔피언 출신이자 UFC 웰터급 파이터였던 벤 아스크렌과 로건 폴의 동생 제이크 폴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크렌은 제이크의 복싱 매치 제안에 응했다가 1라운드에 KO패 당했으며 이 시합은 무려 프로복싱 공식전이었다. 종목은 다를지언정 두 명의 프로 파이터가 두 명의 아마추어 선수에게 격투 시합에서 연속으로 깨진 것이다.
심지어 이번 시합 자체가 가진 위상, 판돈이 웬만한 격투 시합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번 시합에서 로건은 1,400만 달러, 한화로 약 156억원을 받는다. 공식전 0승 복서가 이만한 돈을 받는다는 소식을 접한 현 UFC 헤비급 챔피언 프란시스 은가누 왈, “우린 뭐가 잘못된 걸까?(What are we doing wrong?)”
‘폴 형제는 아마추어’라는 말에 반론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운동 경력을 감추려는 생각은 없다. 형 로건 폴은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레슬링·아마추어 복싱 선수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동생 제이크 폴도 마찬가지로 아마추어 복싱 선수 경력이 있었고 프로 복싱 무대에 데뷔해 3전 3승의 성적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1승이 벤 아스크렌과의 경기다. 즉, 폴 형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인 수준의 평범한 유튜버가 아니라 격투기, 적어도 복싱에 상당한 재능을 보유한 준프로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메이웨더와 아스크렌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벤 아스크렌은 대학 시절 4년 내내 미국 NCAA 올 아메리칸에 4차례 선정되고 올림픽에 참가한 레전드 레슬러, 종합격투기에서도 21전을 치렀으며, 한 단체의 챔피언을 지냈다. UFC 마지막 2연패를 당하기 전에는 19연승을 거둔 초특급이다. 플로이드 메이웨더의 전설적인 업적은 여기서 읊어대는 것조차 지면 낭비이자 실례다. 은퇴한 몸이라곤 하나 격투계를 대표하는 둘이 잘해야 복싱 준프로 정도인 폴 형제에게 패배한 것은 개인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온 격투계의 망신이자 선수와 팬들에게 자괴감을 안기는 것이다. 당장 메이웨더부터 “로건이 생각보다 잘한다”며 허탈함을 숨기지 않았고, 앞으로 링을 완전히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폴 형제의 복싱 도전은 이제 ‘유튜버의 판돈 크게 걸린 이슈 몰이’ 따위는 한참 범위를 벗어났으며, ‘격투계를 덮친 거대한 파도이자 중대한 도전’이라고 해야 옳을 테다.
이제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는 전 UFC 챔피언 출신 타이론 우들리에게 넘어갔다. 지난 6월 5일 우들리는 제이크 폴과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복싱 매치 합의를 알렸으며, 시합은 8월 28일, 한국 시간 기준 29일로 확정됐다.
타이론 우들리도 벤 아스크렌과 마찬가지로 NCAA 올 아메리칸 출신 그래플러지만, MMA 무대에서는 강력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상대를 쓰러뜨려 왔다. 즉 아스크렌보다 타격에 우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번에야말로 승리를 기대하는 팬들이 많다. 다만 단순한 타격력과 달리 복싱 기술 자체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어 회의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이미 벤 아스크렌과 플로이드 메이웨더와의 일전으로 폴 형제의 도전은 전 세계의 이목을 잔뜩 끌어모았으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격투계의 부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프로 격투가’들의 명예 회복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지게 된 타이론 우들리가 8월 말 희생자들의 복수를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더욱 큰 불명예의 수렁으로 빠뜨리게 할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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