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이 온통 트로트였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시작은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2019년을 ‘가인이어라’ 송가인의 해로 만들었던 TV조선의 예능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과 2019년 말에서 이듬해 1월까지 방송되며 선풍적 인기를 끈 MBC <놀면 뭐하니?>의 ‘뽕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트로트 대중화를 이끌었다.
같은 소재를 다뤘지만, 트로트를 통해 두 프로그램이 얻고자 하는 건 달랐다. <내일은 미스트롯>은 엠넷 <슈퍼스타K> 이후 채널, 장르, 대상을 바꿔가며 수없이 변주되어온 서바이벌 프로그램 흥행 역사의 뒤를 잇고자 했다. 일반인에서 아이돌 연습생, 록에서 힙합까지 경쟁할 수 있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붙여보지 않았나 싶을 때쯤 트로트가 등장했다. 실험 타이밍은 마침 적절했다. 20대 전후 시청자들은 질릴 정도로 반복된 서바이벌 포맷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올드 미디어’인 TV와의 거리도 상당히 멀어진 상태였다. 브라운관 앞을 떠나지 못하고 오매불망 리모컨을 붙잡고 있는 건 50~60대 이상 중장년들이었고, TV조선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다양한 콘텐츠를 쏟아내는 채널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출연자에게 서사를 입히는 방법에서 무대 연출까지 깊이 고민한 기색이 역력한 프로그램이 던진 화살은 아직 서바이벌 청정 지역으로 남아 있던 이들의 심장에 정확히 명중했다. 문자 투표에서 음원 스트리밍까지, 아이돌 팬덤과 똑같은 방식으로 트로트 가수를 소비하는, 그동안 숨어 있던 ‘팬심’도 기꺼이 발굴되었다. 송가인, 임영웅, 김호중 등 웬만한 K-팝 인기 그룹 못지않은 거대 팬덤을 등에 업은 인기 트로트 가수들의 등장이었다.
<내일은 미스트롯>이 잠들어 있던 중장년 시청자의 본능을 깨운 사이, <놀면 뭐하니?>의 ‘뽕포유’는 대중의 한가운데 트로트라는 물음표를 새삼스레 던졌다. <내일은 미스트롯>의 주인공이 무명의 실력자들이었다면, ‘뽕포유’의 주인공은 대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스타 유재석을 간판으로 내세웠다. 그가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데뷔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적 없는 국내 트로트 음악계의 A to Z가 공개되었다. 목표를 향한 경로를 따라가며 출연자와 결과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자연스럽게 품게 만드는 건 유재석과 김태호 PD의 특기로, 2년에 한 번씩 개최된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가요제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내공이 트로트라는 대륙에서 새로운 꽃을 피운 셈이었다.
트로트는 그렇게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지상파, 종편, 음악 전문 채널 할 것 없이 우후죽순으로 트로트 프로그램을 신설했고, 지난 4월 1일에는 4060세대를 타깃으로 한 트로트, 웰빙 버라이어티 채널 ‘TV조선 3’까지 개국했다. 매해 각 분야를 빛낸 ‘올해의 인물’을 발표하는 한국갤럽 조사에서 40대 이상 1위가 2년 연속 신인 트로트 가수에게 돌아간 것도 이례적이었다. 2019년엔 송가인, 2020년엔 임영웅이 그 주인공이었으며, 2020년 상위 10위권에는 방탄소년단을 제외한 모든 순위가 트로트 가수 이름으로 채워졌다. 이 중 6명은 임영웅, 영탁, 정동원, 이찬원, 김호중, 송가인으로, 모두 <내일은 트롯> 시리즈로 인기를 얻은 이들이었다.
뜨거운 영광의 시간을 지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트로트가 ‘국민 대세’가 된 건 누가 뭐래도 결국 똑똑하게 잘 기획된 예능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흔들리는 순간, 트로트도 같이 흔들리면서 경고음은 울리기 시작했다. 전조는 이미 있었다. <내일은 트롯>이 배출한 스타를 중심으로 <사랑의 콜센타> 운영을 시작한 TV조선을 비롯해 KBS <트롯 전국체전>, SBS <트롯신이 떴다>, MBC <트로트의 민족>, MBN <보이스트롯> <트롯파이터> 등 유사한 프로그램이 채널마다 우후죽순 쏟아졌다. 저급하고 수준 낮은 저잣거리 음악 취급받으며 버텨온 지난 세월의 애환을 채 달래기도 전, 사람들은 이제 트로트가 지겹고 피곤하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기를 얻기는 어렵지만 한 번 궤도에 오르면 오래 사랑받는 것으로 유명한 암묵적인 장르 법칙마저 파괴된 이례적 현상이었다.
등을 돌리기 시작한 여론은 원조의 자존심에도 상처를 냈다. 2021년 야심 차게 세 번째 시즌을 시작한 <내일은 미스트롯2>는 닐슨코리아 기준 최종회 시청률이 35.2%를 기록하며 명성을 이어갔지만, 우승자들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의 밝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출연진 내정 의혹과 학교폭력 논란이 동시에 불거지며 프로그램의 신뢰와 공정성에 금이 갔다. 어렵게 쌓아 올린 성의 주춧돌이 무자비하게 흔들렸다.
지금의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건 결국 장르 음악으로서 트로트가 걸어온 역사에 대한 이해와 장르적 자생력에 대한 확신이다. 인기를 급격하게 끌어올리는 건 미디어나 유행이 할 수 있지만, 그 뜨거워진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역시 원재료가 가진 노련함과 힘이다. 송가인이나 임영웅을 시청자 앞에 데려다놓은 건 잘 짜인 프로그램과 시청자의 가슴을 울리는 스토리지만, 그들을 마음에 품고 응원하는 것만으로 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나아가 내일을 살아갈 용기까지 주는 건 이들의 노래가 가진 근원적 힘 없이는 어려운 일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트로트를 이야기하며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건 지금껏 없는 음악 취급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견뎌 대세가 된 트로트 음악의 남다른 생명력이다. 트로트는 오랜 세월 어떤 음악보다 낮은 곳에 자리하며 누구보다 고된 하루를 보내온 이들을 가까이에서 위로해준 음악이었다. 이미자, 남진, 나훈아 등 대형 스타가 연이어 탄생한 1960~70년대를 지나 80년대 들어 급격한 쇠퇴기를 겪으면서도 이들은 김수희, 심수봉, 주현미 같은 퓨전 트로트 가수나 태진아, 송대관, 현철 같은 한국 트로트를 대표하는 이름들을 꾸준히 배출해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장르의 맥을 이으며 지금 불고 있는 트로트 붐의 토대를 만든 장윤정, 박현빈, 홍진영을 앞세운 젊은 트로트 스타들의 선전도 무시할 수 없다.
미디어가 대형 트로트 스타에 천착하는 사이 ‘고속도로’ ‘관광’ 같은 단어들과 함께 결합하며 살아남은 풀뿌리 트로트의 영향력도 잊으면 곤란하다. 비공식 집계 누적 음반 판매량 1천만 장을 훌쩍 넘겼다는 ‘메들리 트로트 4대 천왕’ 김용임, 김란영, 신웅, 진성의 존재나 2010년도를 전후해 테이프와 CD에서 USB로 형태를 바꾸며 매체 변화에 빠르게 적응한 업계의 반응 속도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누가 들어도 ‘아, 트로트!’ 할 정도로 솔직하고 단순한, 접근이 쉬운 이 장르의 특징은 취향은 달라도 노래방 마이크만 잡으면 연령 불문 누구나 좋아하는 트로트 한 곡조 뽑는 것이 당연한 우리네 일상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생각해보면 예능 프로그램은 그동안 트로트 음악이 잘 차려놓은 밥상 위에 예쁜 수저 한 세트 올려놨을 뿐이었다. ‘대중음악’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후 단 한 번도 사람들 곁을 떠나지 않은 트로트의 진짜 매력 발휘는 어쩌면 지금 막 출발선에 섰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껍데기를 벗고 난 트로트의 맨 얼굴을 만날 시간. 진짜는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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