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마다 유행 주기가 돌아온다는 패션 평행 이론. 2021년이 두려운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2000년대 패션이 어떻게든 유행하려고 예열하는 중이라서다. 모두 입을 모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2000년대 패션만큼은 돌아오게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패셔니스타도 피해갈 수 없었던 패션 암흑기였기 때문. 당시 생존자로는 류승범이 유일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셔츠에 반소매 니트를 겹쳐 입는, 당최 이유를 알 수 없는 레이어드는 공유를 집어삼켰고 통 넓은 바지에 재킷, 셔츠, 머플러를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고 대형 버클 벨트로 장식한 시상식 패션은 조인성을 슬프게 했다. 꽃무늬 셔츠가 개성 표현이 되고, 슬리브리스 티셔츠에 슬리브리스 조끼를 덧입는 KCM이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 색감부터 디자인까지, 오직 튀어야만 ‘패션’으로 인정해주던 때였다. 여성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진주나 스팽글같이 반짝이는 것들로 장식한 딱 맞는 상의, 영어나 일본어 프린트가 있어야 동대문에 입성할 수 있었고, 송혜교가 전 국민템으로 유행시켰던 볼레로도 옷장에 한 벌쯤은 있어야 외출이 가능했다. 놀토에 놀아본 사람들이라면 본 더치 모자와 몸에 딱 맞는 트레이닝복도 반드시 갖춰야 할 아이템이었다. 이 당시 패션으로 인정받던 사람들의 룩을 살펴보면 원래 체형의 단점을 부각시키고, 급기야 원래 몸매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꼴 보기 싫은 핏으로 착용한 부츠컷 데님 팬츠 등은 모두의 체형을 하향 평준화시켰다. 패션 인플루언서의 탄생도 이 무렵부터. 카고 반바지와 스포츠 브랜드 상의, 레스포삭과 비니를 착용한 반윤희는 1990년대생들에겐 패션 구루였다. 배정남, 쿨케이 등이 가져온 ‘간지 나는 마초’ 스타일이 싸이월드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를 도배했다. 듣기만 해도 혼란한 2000년대 패션 중에서 이것만큼은 꼭 막아야 할 아이템 몇 가지를 골랐다. 대한민국 패션이 두 번의 암흑기를 겪지 않기 위해선 유행시키고 싶어도 한마음 한뜻으로 막아야 할 것들이다.
뭐든지 반짝이고 튀고, 겹쳐 입어야 직성이 풀리던 2000년대 패션의 그림자가 거뭇하게 드리워진 요즘,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울프 커트’다. 엑소의 백현, 남주혁, 송민호 등이 울프 커트를 선보이면서 자꾸 유행을 만들어내고 있다. 부디 “어, 저거 김병지 커트 아니야?” 하는 반가움에서 멈춰주길 바란다. 구글에 울프 커트를 검색하면 ‘울프 커트 극혐’ ‘울프 커트 실패’ 같은 연관 검색어가 추천되기 때문이다. 모든 헤어스타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이 커트는 얼굴형과 목 길이 등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다른 부분은 다 짧고 뒷머리만 길기 때문에 결국 갸름한 얼굴형과 긴 목 같은 ‘타고난’ 요소로 스타일의 완성도가 결정된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울완얼(울프 커트의 완성은 얼굴)’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결정하길. 심지어 울프 커트의 살아 있는 전설 김병지조차 <가짜사나이 2> 입소 전 뒷머리를 잘랐다는 점을 명심해줬으면 한다.
부츠컷 데님 팬츠도 막아야 할 유행이다. 2000년대에 인터넷 보급과 해외 직구 등이 가속화되면서 트루릴리전, 세븐진, 애버크롬비 등 ‘찐미국 진’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문제는, 이 청바지들이 서양인의 체형에 최적화되었다는 것. 밑위길이나 엉덩이 라인 등 전반적으로 동양인의 몸매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너무 급하게 ‘할리우드 최신 유행템’을 따라 입다가 체한 격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2000년대 부츠컷 데님 팬츠는 플라워 패턴 셔츠와 굵직한 벨트가 세트다. 신발은 앞코가 뾰족한 구두나 푸마 스피드캣 같은 운동화가 필수. 여기에 재킷은 흰색이나 하늘색처럼 무조건 밝은 것으로 착장해야 완성된다. <내 이름은 김삼순> 등의 드라마를 통해 현빈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지만, 2021년 이 땅에 다시는 내려오지 말아야 할 공이기도 하다.
부츠컷 데님 팬츠가 현빈의 공이었다면 볼레로는 <풀하우스> 송혜교가 쏘아 올렸다. 양 갈래머리, 골지 니트 톱에 프릴 스커트, 그리고 파스텔 톤의 볼레로를 매칭하면 모두 송혜교가 될 수 있던 시절이었다. 혹시 스커트가 짧다면 걱정할 것 없다. 7부 길이의 레깅스나 혹은 데님 팬츠를 받쳐 입으면 되니까. 혹시 골지 니트가 브이라인으로 너무 깊게 파였다면 레이스 디테일로 잡아주면 된다. 너무 사랑스러워 보일까 걱정된다면 <파리의 연인> 김정은처럼 카고 팬츠에 매칭해도 색다른 느낌을 낼 수 있다. 이 시절의 볼레로만큼 사람 체형을 옹졸하게 만드는 아이템도 없다. 억지로 겨드랑이를 붙잡혀서 어디 끌려갈 때의 핏이라고나 할까.
2000년대 볼레로가 사랑스러움을 강제 주입하는 부작용을 일으켰다면, 요즘 제니 같은 힙스터들이 선보이는 볼레로는 소매 길이를 길게 늘어뜨리고, 무지로 ‘시크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제니가 아니므로 굳이 시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옹졸해 보이는 건 한 끗 차이다.
2000년대 초반 잠깐 유행했지만 다시는 그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에스닉 패션’이다. 일명 ‘캉캉 치마’라고 하면 기억 소환이 더 쉬울 거다. 당시 히피 느낌을 내고 싶었던 배우들 중심으로 ‘티어드 스커트’가 인기를 끌었다. 커스틴 던스트가 할리우드 파파라치 컷에 자주 입고 등장해 ‘커스틴 던스트 st’로 동대문 곳곳에 걸려 있었다. 조금 더 보헤미안풍으로 프릴이 겹겹이 늘어진 원피스 형태로도 변형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역시 태생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일단 키가 170cm 언저리가 되어야 “커튼을 입고 왔네”라는 조롱을 면할 수 있기 때문. 물론 2000년대 초반보다야 평균적인 체형이 달라졌을 순 있겠지만 미세먼지도 많고 마스크도 껴야 하는 요즘 굳이 다시 찾아 입을 만한 옷인지 재고해보길 바란다.
카고 팬츠는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어서 혹시 캠핑이나 이런저런 작업을 해야 하는 분들을 위해 유행을 막고 싶진 않다. 하지만 카고 팬츠가 대형 버클 벨트와 키 체인을 만난다면 온몸을 다해 막아보고 싶다. KCM으로 대표되는 2000년대 카고 팬츠 룩은 안 그래도 주머니가 잔뜩 달려서 어지러운 와중에 길게 늘어뜨린 체인 등으로 혼란을 가중시킨다. 카키색이나 베이지색 카고 팬츠면 또 모르겠는데, 체인과 매칭된 카고 팬츠는 카무플라주 패턴이 정석이라 너무 위협적이다. 2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KCM이 의류 모델을 하고 있는 시대지만, ‘하라주쿠 카고 팬츠 체인 포켓’만큼은 2021년에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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