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다르다. 비판해야 하는 것과 삭제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무언가 터질 때마다 일단 정의의 이름으로 두들겨 패고 보는 시대에 이 둘은 더욱 정밀하게 구별해야 할 문제다. 두 편의 드라마가 도마위에 올라 심판을 받았다. 물론 그 심판엔 각기 정당한 이유가 있었고, 대량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시대에 서사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드라마 <조선구마사>는 방영 2화 만에 역사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 혐의로 뭇매를 맞으며 퇴장했고, 방영 전 드라마 <설강화>는 민주화운동을 왜곡한다는 비판과 함께 촬영 중단 청원이 20만을 돌파했다. 어떤 창작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세상에 만들어져서는 안 될 이야기가 있는가? 검열 아래 어떤 창작물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두 드라마에 던진다면, 판타지 사극을 표방한 <조선구마사>의 경우에는 형편없이 못 만든 작품이 시류를 못 읽어 생긴 참사라 할 수도 있겠다. 근접 국가들의 국경뿐 아니라 문화까지 노리며 김치며 한복까지 자신들의 것이라 우기는 중국에 대한 분노가 여느 때보다 첨예해진 지금, 판타지물이란 방패로 중국식 소품과 복식을 섞어 쓴 건 믿을 수 없이 게으르고 무딘 처사였다. 얻어맞을 만했다. 국내 자본으로 제작됐지만, 제작사 YG스튜디오플렉스의 모회사 YG엔터테인먼트가 텐센트의 투자를 받은 기업이기에 중국 자본의 간접적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심도 이어졌다. (텐센트는 JTBC스튜디오, 넷마블, 카카오 등에도 거액을 투자한 중국 기업이다.) 중국 자본의 침투는 경계해야 할 점인 것은 분명하나, 어느 순간 ‘박계옥 작가가 조선족’이란 추측이 대두하며 그것이 <조선구마사>가 저지른 모든 과오의 정당한 비판 근거가 됐다. 작가가 정말 조선족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애초에 누군가 어떤 민족이라는 것이 비판의 근거가 되는 일이 마땅한가?
중국식 소품과 복식을 쓴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나, 작품을 비판할 때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것은 ‘프로덕션 디자인’이나 ‘작가의 출신’이 아닌 ‘서사’다. (애초에 작가가 프로덕션 디자인에 참여했을 리도 만무하다.) 여기서 조선 왕조를 교황청과 결탁하는 설정으로 모욕했다는 비판은 좀 이상했다. 물론 조선 왕이 이역만리 교황청과 뭘 어쨌다는 설정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이 드라마를 본다고 어느 누가 조선 왕조가 정말 교황청과 결탁해 조선을 세운 건 아닌지 의심하겠는가? 이 드라마는 그냥 좀비도 하고 싶고 엑소시즘도 넣고 싶고 좀 다른 <킹덤>이 되고 싶어 무리수를 둔, 고증 따위 집어치우고 오리엔탈리즘으로 보이는 것들을 한데 때려 넣은 섞어찌개 괴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폐지되고 작가와 감독과 배우들의 사과문이 이어진 후에도 그들에 대한 비난은 멈추지 않았고, 작가의 전작 <철인왕후> 출연 배우 불매 운동까지 이어지자, 이것은 광기라고 느껴졌다. 영혼이 바뀌어 막말을 일삼는 중전이 주인공인 <철인왕후> 역시 조선 왕조를 속되게 깎아내렸다는 게 불매의 이유인데, 이 드라마 또한 촌스럽고 세심하지 못하며 웃기려는 의욕이 과해 ‘똥볼’을 차기도 했으나, 이것이 정말 조선 왕조를 깎아내릴 큰 그림을 그리는 작품이라는 말인가? (그 정도로 정교하지도 못하다.) 어쩌면 이 격렬한 반발엔 어떤 공포가 틈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어느 때보다 조선족에 대한 적개심이 뜨겁고, 흑인 분장을 한 한국 고등학생을 인종차별적이라 비판한 샘 오취리의 SNS에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악플이 끝없이 달리는 이 시대의 불안 말이다.
그 질문을 <설강화>에 돌린다면, 더 심각한 문제는 허황되고 게으른 판타지물이 아닌 멜로물로 위장한 이 작품이다. 6월 항쟁이 일어난 1987년 5월을 배경으로 여대 기숙사에 운동권으로 위장한 남파 간첩이 숨어든다. 여대생은 그와 사랑에 빠지고, 대쪽 같은 안기부 직원과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첫째로, ‘운동권으로 위장한 남파 간첩’이 주인공이라는 설정은 군사정권의 안기부가 만든 프레임을 이제 와 다시 긍정하는 것이고, 그 오명을 뒤집어쓰고 고문당하다 억울하게 죽은 민주화운동가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둘째로, ‘대쪽 같고 열정적인 안기부 직원’이란 대쪽같이 누명을 씌우고 열정적으로 고문을 해 숱한 이들을 죽인 학살자라 다시 말할 수 있겠다. 또한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해방 이화’의 이화여대는 대관절 무슨 잘못이기에 운동권으로 위장한 간첩과 안기부 직원 사이에서 삼각 로맨스를 형성해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논란이 커지자 JTBC는 (6월 항쟁이 일어난) 1987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민주화운동과 관계 없는 청춘 남녀의 멜로”라 항변했으나, 이것은 백악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공룡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냥 마음이 꽃밭이라 이러는 걸까? 하지만 “남북 대치 상황에서의 대선 정국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라 덧붙인 해명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조선구마사>에 던졌던 가정을 다시 한번 해볼 수 있겠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본다면, 특히나 여주인공을 맡은 블랙핑크 지수의 해외 팬들이 본다면, 그게 퍼져 한류의 이름으로 소비된다면, 한국의 80년대엔 남파 간첩이 운동권으로 둔갑했고 안기부라는 정의로운 조직이 있었노라 생각하지 않을까? 이번엔 다른 답이 나온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것은 해이함이 아닌 교묘함이고, 그렇기에 만들어져서는 안 되는 이야기다.
2017년 <택시운전사>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외부인의 시각에서 사파리 보듯 한다고, 재현의 윤리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받았고 나 역시 비판에 일조했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택시운전사>는 얼마나 훌륭한 영화였고, 그것은 얼마나 배부른 비판이었나? 이듬해 나온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1987년을 시민 모두가 비극을 딛고 일어난 기억으로 복원해낸 영화였다. 그런데 2021년, 스타 캐스팅에 대규모 자본으로 만들어져 벌써부터 해외 팬들이 붙은 드라마가 1987년을 배경으로 여대생과 운동권 간첩, 안기부의 로맨스를 그린다. 이 퇴보는 무슨 의미일까. 가파르게 우경화되는 1020세대가 주 시청자층이 될 시대에 이런 드라마가 제작되는 현상은 더욱 우려스럽다. 후진 것이 있다면 만들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혹자는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말라고 하지만, 어떤 창작자는 좀 위축될 필요도 있다.
인간에게 현실은 이야기의 부분집합이다. 간단한 업무 메일이나 SNS에 도는 1백50자짜리 가십, 오늘 점심은 뭘 먹을지에 대한 짧은 대화에도 이야기는 있다. 인간은 언제나 개연성을 찾고, 이야기로 사고하고 이야기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정수인 드라마가 게을러지거나 악의를 품는다면,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이야기에 박수를 보내고 어떤 이야기에 등을 돌릴지, 그것은 전적으로 보는 이들의 몫인 동시에 책무이기도 하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