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대표하는 잡지 <뉴요커>의 표지 일러스트는 언제나 뉴욕의 지금을 정확히 포착한다. 지난 4월 첫째 주 <뉴요커>에는 뉴욕의 한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마스크를 한 채 지하철을 기다리는 아시아계 모녀의 모습이 실렸다. 그림에서 엄마는 운동화를 신고 딸의 손을 꼭 잡은 채 시간을 확인한다. 어린 딸은 누군가 오고 있지는 않은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림 속에는 위협이 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엄마와 딸 둘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그림을 일상적인 뉴욕 지하철의 풍경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뉴욕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이 모녀는 안전하게 집에 돌아갔을까?
차별과 혐오는 특정한 사건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기 같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일정한 압력을 만들어내는 무언가다. 현재 뉴욕에 살고 있는 아시아 사람들이라면 이 일러스트에서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 차별과 혐오, 그로 인한 두려움의 공기를 묵직하게 느꼈을 것이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한 1년 전부터 뉴욕에서는 아시아인을 표적으로 한 증오 범죄가 이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벌어지고 있다. 물론 꼭 팬데믹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다. 과거에도 아시아인을 노리는 증오 범죄와 차별은 존재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런 인종차별주의자에게 꽤 그럴듯한 핑계가 생겼다는 점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식 석상에서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Chinese Virus)’라고 불렀다. 미국에서 이미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도 쿵푸에 빗대어 ‘쿵 플루(Kung Flu)’라고 부르며 질병의 위중함을 희화화하고, 혐오의 화살을 중국으로 돌렸다. 중국과 각을 세우고 자국 중심주의를 이용해 재선을 노렸던 트럼프 진영의 이익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치밀하게 준비된 정치적 수사였겠지만, 팬데믹에 지친 사람들의 분노를 아시아 사람들에게 돌려 더 많은 차별과 혐오를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표현이었다. 사실 뉴욕은 미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이민자와 다른 인종에 대한 포용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 이미 뉴욕 인구의 40% 정도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출생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런 다양성이 뉴욕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뉴욕은 미국이 아니라 그냥 뉴욕’이라고 말한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대도시는 이민자에게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버블(Social Bubble)’을 만들어주었고 이 버블 속에서는 적어도 생김새나 출신 국가로 인한 차별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상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서로 싫어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것 정도는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형성된 다양성 속에서 서로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거대한 도시를 만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혐오와 차별의 에너지가 아시아인 쪽을 향하면서 이 버블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민자가 많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만 아시아인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나 뉴욕같이 이민자 도시에서도 벌어진다. 인종차별주의자의 물리적 폭력이 우범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이나 마트, 공원, 식당과 같은 일상 공간에서도 벌어진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미국계 중국인이 맨해튼 한복판에서 주문한 햄버거를 기다리는 동안 뒤에 선 노인에게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난데없이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오줌 세례를 받는 일도 생기고 뉴욕 퀸즈에서는 동네를 산책하던 할머니가 앞에서 오는 청년이 갑작스럽게 휘두른 주먹에 쓰러지기도 한다. 브루클린의 한 동네에서는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염산 테러를 받는 일도 있었다. 애틀랜타에서는 일자리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인종차별주의자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증오 범죄를 멈춰달라고 호소하기 전에 이 범죄가 증오 범죄라는 것부터 설명해야 했다.
물론 누군가는 ‘그런 일을 아주 일부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범죄이며 쉽게 일반화하기 어렵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증오 범죄에 노출될 확률은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보다도 낮을지 모른다. ‘나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 누가 나를 혐오하고 차별하는지 아니면 포용하는지 구분되지 않는다. 특정할 수 없는 무작위의 사람으로부터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은 전방위에서 사람을 압박한다.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래서 더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지하철을 타는 대신 조금 더 걷거나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만날지 모르는 번화가를 피하는 것 정도인지도 모른다. 마치 그렇게 누군가의 일상은 위축된다.
왜 사람들이 아시아인에게 분노를 쏟아내는지 이해하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누군가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유형의 폭력이 아니다.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냥 그래도 되는 일’을 모두가 아무런 생각 없이 반복하다 보면 편견과 차별은 권력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흐르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렇게 혐오와 차별이 쌓인 무거운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 공기의 무게에 누군가 질식했다면 그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한 타살이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