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지지 않은 것과 쓰이지 않은 것. 구전되지도 기록되지도 않은 문장 밖에 미싱링크가 있다. 음성 언어도 문자 언어도 아닌 결승 문자, 안데스의 촉각 언어는 천을 직조해 매듭을 짓는 방식의 언어다. 이 낯선 방식의 오래된 언어에 새롭게 접근한 건, 젊은 중국계 미국인 작가 켄 리우의 ‘매듭 묶기’라는 최근의 SF 단편 소설이다. 켄 리우가 잉카제국의 ‘키푸’와 중국 전통 매듭 공예, 한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이 소설에선 고대 매듭 문자를 전승해온 부족이 매듭 문자로 DNA 서열의 비밀을 풀어 현대의 병을 고친다. 오래되어 잊힌 언어가 미래의 해답이 되는 상상. 칠레 태생이자 원주민과 스페인 혼혈 작가인 세실리아 비쿠냐는 이 매혹적인 고대 언어 ‘키푸’를 오래전부터 예술로서 복원해왔다. 비쿠냐는 커다란 전시장에 설치미술로서 직조된 매듭 천들을 높은 천장에 드리우며 원초적이고 거대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산티아고에서 자랐으나 1970년대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다 추방당한 작가는 끊임없이 저항하고, 연대하고, 교차하며, 잊힌 것들 사이의 미싱링크를 매듭처럼 지어 남긴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비쿠냐의 작품을 접한 후, 그를 아시아에서 만날 기회가 드디어 생겼다. 제13회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하며 리만머핀 서울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을 연 작가에게 인터뷰를 청하자, 기껍게 답이 돌아왔다. 베트남전을 겪은 소녀와 칠레 군사 쿠데타를 겪은 소녀가 서로 책을 주고받는 비쿠냐의 회화처럼, 국가도 나이도 문화권도 다른 그와 작은 책 한 권을 주고받은 듯했다.
고대 안데스의 촉각 언어인 ‘키푸’는 당신의 작업에서 주요한 언어다. 잊힌 고대 언어인 키푸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키푸에 대한 아이디어는 비서구적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방식을 집약한 것이다. 안데스인은 이 기록 체계를 5천 년간 지속해왔으며 이것은 몸, 공동체, 우주를 모두 아우르는 텍스트다. 그렇기에 그들은 정교하고 지적이며 수학적인, 발전된 사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서구는 이 기록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5백 년이 걸렸다. 당시 남미를 침략한 스페인 사람들과 가톨릭에서는 키푸에 재산과 땅에 대한 권리 같은 중요한 정보가 암호화되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키푸의 사용과 창작을 금했다. 그것들은 불태워졌고, 키푸가 담고 있던 지혜와 지식은 거의 5백 년간 강제로 지워졌다. 나에게 이 촉각 정보의 형태를 복각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꼭 필요한, 중요한 작업이었다.
여러 키푸 시리즈를 선보였다. 그중 검붉은색의 ‘키푸 자궁’도 인상 깊었는데, 이것은 언어이자 그에 앞서 당신의 기원이라는 의미일까?
나의 언어가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당신의 방식이 맘에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키푸를 우주 속의 시로 재해석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키푸에 대한 나의 시각이며 견해다. 이 기획은 과거에 한 문화권에서 발전했으나 침략한 서구 문명에 의해 폭력적으로 삭제된 키푸를 재해석하고, 그 어마어마한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을 키푸에 바쳤고, 50년간 이 작업에 몰두해왔다. 이제 많은 아티스트들이 키푸의 길을 따르는 것을 보고 있다. 반면 내가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키푸는 거의 잊혀져 있었고 나 이외에는 단 한 명의 예술가, 호르헤 에두아르도 아일슨이 키푸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고 있었다. 그래서 키푸는 나의 가장 주요한 언어일까? 이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내게 가장 주요한 언어는 모든 말해지고 쓰이는 언어들 밑에 존재하는, 발화되지 않은 언어다.
이번 아시아 첫 개인전에서는 ‘키푸 기록’이라는, ‘키푸’라는 안데스 고대 언어와 ‘기록’이라는 한국어를 결합한 새로운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작품엔 한복에 쓰이는 전통적인 직조법을 사용했다. 어떻게 이 낯선 조합을 생각해냈나? 당신의 고유한 문화와 한국의 고유한 문화 사이 어떠한 동질성을 발견한 건가?
천 년 전부터 이어져온 안데스의 직조 방식과 한국의 섬유 직조 방식은 거즈와 그 투명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시공간과 문화를 넘어선 연결은 ‘키푸 기록’에 영감을 줬다. 내게 ‘키푸 기록’ 전시는 서울에 안데스의 우주를 펼치는 것뿐 아닌, 내가 오랫동안 동경해온 한국의 극도로 정교하고 복합적인 섬유 직조 전통을 포괄하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거즈를 통해 표현되는 두 개의 아주 미묘한 사고방식의 형태가 한데 모일 기회인 것이다. 동시에 관객이 그 투명성 안에 함축된 많은 리얼리티들을 감지해낼 때까지, 이 작업은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문학, 개념미술, 퍼포먼스, 비디오 아트 등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롤랑 바르트와 장 보드리야르의 글을 엮은 <아파라투스(기관)>와 만주 출신 교사 어머니와 유관순, 잔 다르크의 생애를 시와 산문, 사진 등으로 결합해 엮어낸 <딕테>로 주목받은 페미니즘 예술가였던 차학경을 오마주한 작품을 창작했다던데, 어떤 작품일지 궁금하다.
광주 비엔날레에서 나는 차학경이라는 놀라운 시인이자 예술가에 대한 오마주 작품을 창작했다. 내 또래인 그녀는 1984년 뉴욕에서 강간당하고 살해됐다. 그녀를 위해 나는 음성 작품인 ‘Rain Dreamed by Sound’를 뮤지션 리카르도 갈로와 함께 작업했고, 그녀의 글들을 나의 시 그리고 비가와 함께 결합했다. 두 가지의 서로 전혀 다른 예술 작품들, 광주 비엔날레에 설치될 비가의 키오스크와 키푸 기록이, 안데스와 한국 사이 대화와 공명을 만들어낼 것을 소망한다.
당신의 회화 작품 ‘Nina Mapuche’는 칠레 마푸체 부족 소녀가 베트남 소녀로부터 책을 건네받는 장면을 그렸다. 칠레 쿠데타와 비슷한 시기에 격동의 세월을 겪은 베트남 소녀를 만났던 경험을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이 역시 비슷한 연대처럼 느껴진다.
맞다. 그건 확실히 젊은 여성끼리의 유대감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착취적이고 폭력적인 탐욕에 의해 모든 생태계가 위협받으며 인간 종족의 생존 또한 의문에 빠진 지금, 연대는 파괴되어가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여성들이 서로를 지지하는 연대, 지혜와 너그러움만이 이 위협적인 상황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연대에서 나아가 동물, 땅, 바람 등 생태계의 모든 종족 간의 연대가 우리가 이 지구에서의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힘이고,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이번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하는 ‘Amados’와 ‘El Paro’ ‘Camilo Torres’ 등에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적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강렬하고 묘한 인상을 준다. 이 작품들에 대해 소개해줄 수 있나?
나의 1970년대 작품들이 두 번째 삶을 부여받았다는 게 무척 기쁘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을 만든 1970년대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완전히 거부당했거든. 그래서 이 작품은 적절할 때 다시 읽히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Amados’는 내가 그림 속에 얼굴을 그려 넣은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일종의 선언이다. ‘El Paro’의 동물들은 집회에 참여해 억압에 반항하는 사람들처럼 행진한다. 그리고 ‘Camilo Torres’는 불의에 맞서 싸우다가 죽은 혁명 사제를 그렸다. 우화적이고 설화적인 그림들로 보이지만, 당대 라틴 아메리카의 관점에서 볼 때 환상이 아닌 리얼리티였다. 이 작업들은 폭력적 충돌, 대립되는 문화와 세계관의 결합에서 영감을 받았다. 충돌과 결합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에 활력과 요동치는 힘을 불어넣어 왔고, 지금까지도 이런 모든 갈등은 절대로 해소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설치 작업 ‘Lo Precario’도 인상적이다. 당신이 여러 곳을 오가며 수집한 깃털, 돌, 목재, 조개껍질, 헝겊과 더불어 인간이 만든 폐기물들을 활용한 이 파편들은 한데 어우러져 시각적인 시처럼 보인다.
난 이 작품을 통해 어떤 것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 작업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각각의 파편과 입자들은 내가 그것들을 집어 든 순간 이미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당신이 파편들을 한데 모아 엮었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둔 것이다.
나비가 엮인 철사 조끼를 입고 허드슨강을 걷는 퍼포먼스 영상도 전시된다. 허드슨강은 원래 멸종위기에 처한 황제나비가 이동하던 길이었다고 한다. 동시대 지구의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에 대해 아티스트로서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나?
확실히 그렇다. 내가 40년 전 뉴욕에 도착했을 때,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 황제나비들의 동선은 뉴욕을 경유했다. 그들은 허드슨강을 경로로 통과했고, 나는 그것을 직접 보곤 했다. 지금은 살충제의 남용으로 나비들이 점점 멸종해가고 있다. 그래서 난 이 꽃가루 매개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미국 사람들은 한번 꽃가루 매개자가 사라지면, 많은 과일과 채소들이 사라질 것임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황제나비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생명체의 영원한 힘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의 회복성을 상징화했다. 그 연약함은 나의 ‘키푸’들을 지배하는 언어기도 하다.
당신의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Humps’는 당신 친구의 당신에 대한 꿈을 재현한 것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타인의 무의식 속 이미지로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정의되지 않고,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 내릴 수 없음이 바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지점이다. 그러니 스스로의 이미지를 애써 정립시키려 노력하기를 한번 포기해보라. 그 대신 누군가의 꿈 혹은 무의식을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 본다면,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오히려 더 자유로운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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