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웅은 누구인가. 창간 15주년 특집 기사 기획안을 받고 고민했다. 기획은 에디터들이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인물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취향도 말투도 걸음걸이조차 서로 다른 에디터들은 스스럼없이 자신만의 영웅을 꼽았고, 각 영웅의 면면에서는 그 에디터의 화보와 문체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번 기획은 현재 <아레나> 콘텐츠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기사 진행이 쉽지 않았다. 에디터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영접하고자 메일과 왓츠앱, 전화와 줌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영웅들과 접선했다. 영웅들은 단번에 인터뷰를 승낙하진 않았다. 바쁜 일정으로 인터뷰가 불가능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가까스로 인터뷰에 응해 뒤늦게 답변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뒤에 이어지는 인터뷰이들의 이름을 보면 섭외에 난항을 겪은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평소 우리가 갈망했지만 만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옷으로 낭만을 이야기하는 디자이너, 무뚝뚝한 에디터의 감정을 뒤흔든 사진가, 독일 현대 미술을 이끄는 작가, 방황하는 청춘을 그려내는 영화감독, 남극점과 북극점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인간 등 그들에겐 아직 묻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다. 기사는 9명의 실존 인물과 6명의 가상 인물 인터뷰로 구성된다. PARTⅠ에는 실존 인물들과의 감도 높은 대화와 사진이 담겼다. PARTⅡ는 만날 수는 없지만 에디터들이 큰 영향을 받은, 롤모델로 삼기도 한 인물들과의 가상 인터뷰다. 자신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자아 형성의 토대를 찾아 방황하는 이들에게 <아레나> 창간 15주년 특집 인터뷰가 나침반이 되길 기대한다.
타셈 싱이 만든 장면은 예술 같다. 예술이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 같다. 적어도 내게는. 그의 영화를 처음 발견한 게 7년 전이다. 고작 고등학교 3학년밖에 안 된 게 그의 영화에 감히 ‘예술적인 영화’라는 리뷰를 남겼다. 수능이라는 난관에 부딪혀서인지 일상적인 영화는 피하고 싶었다. 일상을 다루는 영화를 보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꿈같고 환상적인 걸 추구했다. 타셈 싱이 그렇다. 그는 늘 환상을 추구하고 영상으로 만들어낸다. 환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만들어내는 건 어렵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걸 영화로 구현했다. 그에게 한계란 없다. 현존하지 않는 장소 같은 곳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뒤진다. 공허한 황무지, 거울 같은 소금 사막, 다채로운 색감의 무지갯빛 마을, 광활한 대지를 발견해낸다. 그러한 장소는 타셈 싱의 영화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기이하고 몽환적으로 바뀐다. ‘상상 속에나 있을 법한 영화를 만드는 타셈 싱은 어떤 영화를 보며 자랐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그의 취향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는 어떤 꿈을 꾸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몬트리올에서 자가격리 중인 타셈 싱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 시작해도 되겠나?
그럼, 당연하지!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질문해라. 만반의 준비가 되었으니!
요즘 뭐 하고 지내나? 작품 활동이 꽤 오래됐다.
광고라든지, 상업적인 촬영을 하며 지낸다. 애틀랜타에서 광고 촬영하느라 정신없었다. 일을 끝내고 이틀 전에 몬트리올에 도착해 현재 자가격리 중이다. 휴식기에는 보통 런던에서 지내지만, 몬트리올에 있는 아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작품 얘기를 해보자.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과 <더 셀>이다. 두 영화는 처음 봤을 때 경이로운 영상미에 흠뻑 빠져들어 네 번은 더 봤다. 두 작품 제작 기간이 꽤 오래 걸렸을 것 같은데.
<더 셀>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금이나 모든 게 충분했기 때문에 아주 편하게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28년 걸렸다. 찍느라 오래 걸린 게 아니고, 대학 시절 이미 구상해둔 영화지만 대사를 내가 직접 쓰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도, 직접 뛰어다니며 투자자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렇기에 어떠한 투자도 받을 수 없었다. 형은 언젠가 세월이 흐른 뒤에라도 반드시 영화로 제작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28년 후 비로소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의 영상미가 놀라운 이유는 CG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특이한 의상을 입은 인물과 동물들, 기묘하게 생긴 소품들을 보면 당연히 CG를 사용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CG를 사용하는 걸 원치 않았다. 나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 어릴 때 1920년에 나온 영화를 접했는데 당시는 CG 기술이 없던 때인데도 환상적인 영상을 구현했더라. 마치 CG를 사용한 것처럼. 물론 스토리도 탄탄하고 좋았다. 그래서 독특하고 기이한 스토리를 애매한 CG 없이 사실적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두 번째 이유는 CG는 훌륭한 작업이지만 15년이든 20년이든 시간이 지나면 촌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은 발전하니까. CG 없이 ‘오페라’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은 좋거나, 싫거나 둘 중 하나다. 난 어떠한 반응도 좋다. 다만 내가 만든 영화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봤을 때도 여전히 무섭고, 기이하고, 동시대적인 느낌으로 세련되길 바란다. 오페라처럼. 시대에 뒤처진 감독이 되긴 싫다. <더 셀>은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주기 위해 약간의 CG를 사용했지만,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CG를 사용하지 않고 경이로운 장면을 구현하는 건 힘든 작업이다.
그렇지.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내가 인생을 사는 유일한 이유인데! CG 없이 영화 만드는 건 정말 힘들지만 너무 재미있고 좋다. 굳이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는, CG 영화는 오늘 봤을 땐 꽤 만족스럽지만, 10년 뒤에 보면 ‘훨씬 더 무섭고 비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라며 후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의상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특이하고 화려하다. 누구의 도움이 있었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의상 디자이너인 ‘에이코 이시오카(Eiko Ishioka)’의 작품이다. 한계란 없는 그녀는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것 같다. 이전부터 그녀와 함께 작업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고 <더 셀>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디자이너도 추천받았지만 그녀 아니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당시 내 여자친구가 내게 그녀와 바람 피우냐고 물었을 정도로 우린 늘 붙어 다녔다. 아무튼 그녀는 예술을 창조하는 놀라운 여자다.
당신의 영화는 상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꿈이라고 해도 될까?
꿈이라고 봐도 되지.
꿈을 모티브로 사용한 이유는 뭔가?
반드시 ‘꿈’이 모티브가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꿈이라는 소재는 어떤 것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다. 꿈에는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이 드러난다. 상상하던 게 꿈속에선 현실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특정한 환경, 상황, 감정을 내가 원하는 대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에 꿈을 모티브로 사용했다.
<더 셀>에서 연쇄살인범 ‘칼 스타거’ 안에 내재된 본능과 욕망을 알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꿈’이 사용된다.
내가 어릴 적 봤던 영화 속 대사들은 외계어투성이였다. TV 속 모든 것들이 내가 모르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직 영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는 다른 영화에 비해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대사가 적은 고요한 영화, 모든 걸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속마음이나 어린이의 상상력처럼. 누군가의 속마음이나 어린이의 상상력은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쉽다. ‘꿈’도 그렇고. ‘칼 스타거’의 마음을 내가 원하는 대로 비주얼로 그려내는 것, 그게 내가 작업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당신의 영화를 ‘하나의 예술’이라 칭하고, 영화를 본 후엔 ‘멘탈이 박살나는 경험’을 한다고 하더라. 어떻게 생각하나?
굉장한 칭찬이네. 하하하. 난 영화를 통해 사람들의 감정과 기분을 마구 흔들고 싶다.
예술적인 영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영감의 원천이 궁금하다.
모르겠다. 모든 것? 대개 사람들은 영감의 원천이 무엇이냐 묻지만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책, 영화, 뮤직비디오, 그림, 영화, 모두 영감이다. 그리고 내 영감을 진정 알고 싶다면 내 입장이 되어봐야 한다. 내가 본 영화, 읽은 것, 경험한 것, 잠자리를 함께한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모든 게 영감이 된다.
타셈 싱을 이끄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아주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다. 현실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지금 당장 현실주의 영화를 만드는 건 어렵다. 난 벌써 환상 속의, 꿈같은 이야기를 그린 작품들을 만들어왔고, 그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어릴 적부터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영화들을 보며 비주얼만 습득했고, 이를 토대로 광고, 뮤직비디오, 영화로 풀어내왔다. 원동력은 내 DNA라고 대답하고 싶다. 타고난 DNA를 따라 작업물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래서 생각할 필요가 없고, 누군가 내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오는지 물을 때면 항상 DNA라고 대답한다. 최근 장애인 올림픽 선수 ‘제시카 롱(Jessica Long)’을 위해 작업한 영상 ‘슈퍼볼 토요타(Super Bowl Toyota)’를 보면 내가 어떤 영상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을 거다. 반드시 찾아보길 바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영화로 표현하는 본인만의 방식이 있나?
내가 상상한 걸 표출하는 거지. 그 상상을 인도와 중국 문화와 교묘하게 버무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독특하다고 느낀 것일 수도 있다.
타셈 싱은 어떤 꿈을 꾸나?
모든 사람은 꿈을 꾸지. 꿈은 대개 환상적,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나는 특이한 꿈을 꿀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 꿈도 특별할 건 없다. 하하하. 다른 사람들의 꿈을 들어보면 어떨 땐 내 꿈보다 훨씬 특이하고 기이할 때도 있다. 다만 차이는 그들은 꿈을 영화로 만들지 않지만 나는 꿈을 영화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영화 <백설공주>는 여성을 보편적인 인식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린다. 주인공 ‘백설공주’는 검술을 익히고, 능동적이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인다. 당신이 가진 여성에 대한 가치관을 담은 건가?
그렇다. 여성에 대한 내 철학을 담았다. 디즈니가 위험에 갇힌 여성을 그려내는 방식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공주가 위험에 갇히면 늘 왕자가 나타나서 구해주잖아. 너무 뻔하다. 내 가치관과는 맞지 않았고 그 방식을 타파하고 싶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비교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고, 그러한 능력에 비해 너무 억압받아왔다고 생각한다. 남성에 대한 과대평가가 더욱 일찍이 비판받았더라면, 세상은 더욱 좋아졌을 거다. 어쨌든 여성은 억압받아온 게 사실이고, 이젠 그 억압을 깨부숴야 한다.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에 등장하는 네 살 된 여자아이는 영화 중반부터는 남자아이처럼 그려진다. 내게 그건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남자아이 역할이라고 해서 여자아이가 맡지 말라는 법은 없다. 백설공주는 아름답지만 강하고 능동적이다. 힘을 가진 여성은 아주 아름답고 훌륭하며, 이를 조명하는 것도 중요했다.
당신의 작업 스타일이 궁금하다. 짜여진 콘티대로 진행하는 편인가?
난 콘티를 정말 싫어한다. 하하하. 현장에서 정신이 깨어 있는 걸 좋아한다. 어떤 환경이 주어지든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한다. 변화에 적응하는 건 무척 중요하다. 스튜디오를 빌릴 돈이 없거나, 생각한 대로 촬영을 추진할 자금이 부족할 경우, 그에 맞게 대처해나간다. 그리고 대개는 더욱 훌륭하게 발전시키는 편이다. 스토리보드는 너무 지루하다. 스토리보드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발로 뛰어 이곳저곳을 방문하고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과 가깝다면 곧바로 촬영을 진행한다. 즉흥적으로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콘티는 아예 배제한다고?
약간은 콘티대로 하지. 심지어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26개 국가에서 촬영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병원 장면만이 계획했던 거다. 촬영을 시작하고 3주간 진행됐던 병원 장면 외에는 즉흥적으로 연출한 장면들이다.
인간으로서 타셈 싱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모르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그때 내게 반드시 알려줘라.
어떤 영화 좋아하나?
학교 다닐 땐 영상미가 화려한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졸업 후엔 그런 영화는 보기도 싫더라. (불행하게도 지금 난 그런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호러 영화 아주 좋아한다. 사람들은 내 영화가 무섭다고 하던데 내가 생각할 땐 전혀 아니다. 오히려 웃긴 영화라 생각한다. 언젠간 호러 영화도 만들어보고 싶다.
가장 좋아하는 호러 영화는 무엇인가?
너무 많다. <에일리언>도 좋아하는데 호러 영화라기보단 공상 과학 영화에 가깝다. 귀신 들린 집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귀신 들린 집 우주 버전인 거지.
그럼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는 무엇인가?
여전히 내 마음속 1위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다. 너무 사랑한다.
요즘 가장 열정적으로 임하는 게 있나?
불행하게도, 영화는 안 본다. 1년에 세 번 볼까 말까다. 2년간 다섯 편의 작품밖에 보지 않았다. 이게 다 체스 때문이다. 35년간 두지 않았던 체스를 최근에 시작했는데 지금에 와서야 완전 중독됐다. 미쳐 있다. 체스가 내가 좋아하던 독서, 영화 감상,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통화 음질 때문인지 채팅할 때의 ‘챗’으로 들렸다. ‘체스’였구나.
난 페이스북도 없고, 인스타그램도 없다. 타인과 대화하기도 싫다. 체스 두는 것만큼 즐겁지 않잖아.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필요 없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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