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만화 중에 <크로우즈>가 있는데, 주인공은 보우야 하루미치다. 싸움을 잘한다. ‘세다’가 정확한 표현이려나. 난 보우야 하루미치가 엄청 좋고, 그다음으로 히로미라는 애를 좋아한다. 보우야만큼 싸움을 잘하진 않는데, 영리하고, 뭐랄까, 직관적인 면이 있다고 할까. 앞에 나서서 싸우는 걸 피하지 않으면서도, 한 걸음 물러나서 싸움판 전체를 볼 줄도 안다. 전사이며 전략가. 히로미가 유희열 같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유희열이라는 ‘캐릭터’를 유심히 보기 시작한 건 <K팝스타> 심사위원으로 나왔을 때인데, 사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유희열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모른다. 박진영과 양현석이라는 상징적 거물 사이에서 잘 버티네 정도 생각했지만, 더 생각해보니 너무 당연했다. 저 둘이 본능적이라면, 유희열은 지적이니까. 본능의 상대어로는 ‘이성’이 어울리겠지만, 유희열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지적이다’인 것 같고.
박진영과 양현석은 서로 경쟁할지 몰라도 유희열은 저 둘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그냥 다른 사람이라서. 두 줄 정도 위에 ‘유희열, 서울대 졸업했다’라고 썼다가 지웠다. 서울대가 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튼 이런 건 중요한 얘기가 아니고, 나는 유희열이 옷을 잘 입어서 유심히 보았다. 셔츠, 타이, 재킷. 유희열은 늘 이 조합으로 잘 입는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올 때도, 유재석과 예능을 할 때도 저렇게 입고, 잘 입는다. 스타일리스트가 누구인지 찾아보기도 했다. 타이와 셔츠를 매치하는 솜씨가 훌륭하다. 이게 의외로 어려워서 옷을 아주 잘 입는 사람도 종종 어이없는 조합을 선보인다. 적어도 내가 보았을 때만은, 유희열은 늘 성공했다. 진지하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무드도 좋다. 저 조합을 무게 잡고 입으면 멋있거나 지루하거나 지루하면서 멋있거나 셋 중 하나다.
JTBC <싱어게인> 심사위원 자리에서 유희열은 가운데 앉는다. 그 자리에 박진영이 앉았다면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람들은 박진영만 혹은 박진영 위주로 쳐다보게 됐을 것이다. 유희열이 가운데 앉으면 유희열 옆에 앉은 사람들도 같이 보게 된다. 유희열이 주인공이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일까? 주변 사람들을 빛나게 해주는 성품의 소유자여서? 이 부분에 대해 유희열과 이야기 나눠본 적이 없으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추정하자면, 그런 거 같다. 하지만 주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유희열은 시선을 끄는 캐릭터가 아니다. 음, 시선을 확 끌지 않는 캐릭터가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다. 시선을 확 끄는 캐릭터는 정말이지 차고 넘쳐서. 하물며 TV 속에서야! 그 와중에 나는 다시 한번 ‘유희열, 서울대 졸업했다’라고 썼다가 지웠다.
유희열이 가운데 앉는 건 여러 가지를 시사하는데, 그중 하나는 아이돌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는 것은 아니고…, 아이돌이 맹렬히 질주하는 사이, 숨 고르던 다양한 음악인들이 다시 음악 신의 주역으로 솟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음악 평론가가 아니어서 그들의 이름을 일별할 능력은 안 된다. 하지만 문화적인 트렌드를 분석할 때 이 진단에 대한 확신은 있다. 유희열이 이 흐름을 이끌었다고 볼 수는 없고, 내가 판단하기에는 넘치는 아이돌들에 대한 피로감 때문인 것 같지만, 유희열이 ‘안테나’라는 훌륭한 레이블을 이끌며 그저 좋은 음악을 하겠다는 뮤지션들에게 동기부여를 한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이 유희열을 좋아한다면, 이 부분에 대한 존중의 마음도 한몫하지 않을까? 유희열이 주목하고 응원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좋아했거나. 아, 그러고 보니 아이돌이든, 아이돌로 불리지 않는 음악인이든, 유희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유희열이 주목하고 응원하는 뮤지션들이 대체로 좋은 음악을 선보였기 때문이겠지. 이 부분의 안목에 대해서 유희열은 대한민국 넘버 1이다. 넘버 2일 수도 넘버 3일 수도 있다. 아무튼 뛰어나다.
뛰어난데, 심지어 웃기다. 나는 이 부분에서는 당당히 다음과 같이 적어보려고 한다. ‘유희열, 서울대 졸업했다.’ 머리가 좋다. 그걸 순발력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그냥 머리가 좋은 거다.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알고, 말을 해야 할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안다. 본능적 감각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까? 음, 부족하다. 감각을 따르다 보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유희열은 빈틈을 의도적으로 배치한다. 그냥 머리가 좋은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적당히 부족해 보이면서 굉장히 지적으로 보이는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이 정도면, 시청자가 모두 유희열에게 속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게다가 유희열은 똑똑한 뮤지션과 교류한다. 예를 들면 윤상, 이적, 김동률. 존중받는 뮤지션이고, 매우 지적인 인물들로 추정되며, 일류 대학을 나왔다. 그러니 아무리 실없이 굴어도, 엉터리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가 없어. 여기 대한민국이라서.
게다가 밉지 않다. 어찌됐건, 그럼에도, 아무튼, 밉지가 않다. 중요한 지점이다. 유희열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유희열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글을 기획하면서 어떤 소재들로 글을 이끌어나갈지 고민했다. 그런데 뭐랄까, 핵심 소재로 삼을 만한 게 없었다. 유희열에 대해 할 이야기는 많은데 뭔가 굵직한 소재가 없는 것이다. 유희열은 정말 그게 없는 사람일까, 없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스스로 이미지를 만든 사람일까? 너무 똑똑하니 답을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없는 사람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나는 유희열의 이런 지점이 좋다. 내세우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건 유희열의 최대 미덕일 텐데, 내가 이야기하는 건 그것과 좀 다르다. 와, 저 사람 진짜 잘났어, 천재 아냐, 라고 유희열에게 말할 수 없다. 그런 말은 박진영에게 어울린다. 진짜 잘나지 않았거나 천재가 아니더라도, 그런 말은 박진영에게 더 어울린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이 유희열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희열은 무엇 하나를 엄청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대체로 뭐든, 매우 감각적으로, 아주 잘하는 사람 같다. 혹은 딱 그 정도만 잘하는 사람처럼 보일 줄 아는 무시무시한 천재거나.
유희열의 역사인 ‘토이’는 1994년 시작되었다. JTBC <싱어게인>에서 유희열의 심사평은 냉철하고 온화하다. 음악적 평가와 가치 판단은 내 영역이 아니니, 그의 심사평을 평가하거나 가치 판단하고 싶지 않다. 다만 유희열이 참가자를 바라보는 태도는, 뭐랄까,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한 시절을 정직하게 거쳐 온 자만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사람을 어른이라고 할 수 있고, 좋은 어른이 대체로 그렇듯, 유희열은 거만하지 않다. 꽤 괜찮은 인간의 새로운 전형 같다. 아, 우연이겠지만, 히로미 헤어스타일과 유희열 헤어스타일이 비슷하다. 뭐,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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