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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아요이를 보는 세 개의 시선

1950년대, 기모노에 달러를 숨기고 뉴욕으로 와서 숱한 갤러리의 문을 두드리며 회화부터 설치, 퍼포먼스까지 온몸을 던져 예술가로서 인정받고자 했던 한 여성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개봉을 기다리며, 큐레이터, 아티스트, 정신과 전문의 3인이 쿠사마 야요이라는 독특하고 대체 불가한 아티스트를 각자의 시각으로 들여다보았다.

UpdatedOn January 0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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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of a manhattan suicide addict, 2010-present, Image ⓒ Yayoi Kusama

Song of a manhattan suicide addict, 2010-present, Image ⓒ Yayoi Kusama

자기 자신이라는 모순을 넘어

아티스트의 시선 by 정희민(미술가)

미지라는 단어는 얼마나 매혹적이며 무책임한가.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광포한 불확실성을 매일 껴안으며 살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불확실성을 거부하면서도 갈망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쿠사마 야요이를 이야기할 때 강박장애나 환시 등의 몇 가지 단어들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점을 생각해볼 때, 야요이는 그가 가진 영향력만큼이나 어쩌면 가장 강력하게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일지 모른다.
환시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 그는 모순 그 자체다. 고통을 부르짖으면서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고통 속에 내던지는 모순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때 나는 비로소 그 작품의 과격함 뒤에 가려진 연약한 아름다움에 한발 다가갈 수 있었다. 기괴하게 몸을 배배 꼰 채로 입을 벌리고 있는 꽃, 점으로 뒤덮인 꽃이 가득한 벽면을 바라보는 여성. 가부장제 속 여성이 아니라 작가이기를 원했던 야요이가 여러 차례 혼담을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그림을 그렸던 초년 시절의 일화는 그 시절 그가 남긴 형상들만큼이나 남다른 자의식을 보여준다. 야요이는 27세의 나이에 “너무 작고, 너무 비굴하고, 너무 봉건적이며, 여성을 경멸하는” 일본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떠난다.
1950년대의 뉴욕이라는 무대는 혈혈단신 아시아 여성에게는 지독히 외로우면서도 충분히 도전적인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 백지 같은 공간에 막 당도한 젊은 시절 그의 눈에는 성공에 대한 확신과 기대, 작품이 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는 저명한 아티스트들의 스튜디오 근처에 작업 공간을 얻고, 메이저 갤러리의 문을 거침없이 두드렸다. 백인 남성이 주류를 이루었던 미술계에서 빠르게 자리 잡을 만큼 전략가이기도 했던 그의 뉴욕 입성이 완전히 불운했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야요이의 작품은 전시의 기회를 얻었고 호평을 받았으나, 범인이 아니었던 그에게는 어떤 관심도 충분하지 않았다. 젊음의 패기로 가늠하던 가능성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여 있음을 완전히 감지해내기까지는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동료 작가들에게 아이디어를 빼앗기고, 작품에 응당한 대가를 받지 못해 지칠 대로 지친 야요이는 잦은 병치레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능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잊히는 것과 각인되는 일의 두려움 사이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는 그 충동의 힘으로 또다시 작품을 제작했다. 이방인으로서의 지독한 좌절을 맛보고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 생존을 위한 지리멸렬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어린 야요이가 보내는 미약한 신호들을 놓지 않았고 작품을 통해 때로는 바다가, 때로는 그물이, 때로는 펄펄 나는 나비가 되었다가 꽃이 되었다.
초년 시절부터 이어진 ‘무한 그물’을 통해 야요이가 반복적으로 가두고 드러내며 촘촘히 어루만지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작품을 통해 무아지경을 얘기하지만 스스로 한 번도 자기를 지운 적이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고통의 근원이었을까? 나는 야요이의 연약함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그 연약함을 지켜내고자 했던 순진한 선택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때로 길을 잃었고, 상심했고, 숨어버렸다가도 금방 그림으로 돌아왔다. 애지중지 다듬고 길들인 고통을 재료 삼아 선을 긋고 형상을 빚어냈다.
자신조차 헤아릴 길 없는 욕망을 가까스로 긍정하고 주장하며 야요이가 밟은 미지의 땅은 어떤 욕망도 어떤 소명도 닿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는 고요한 명상의 공간이리라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광활한 땅 한가운데서 그는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고 싶다’고 읊조린다. 나는 천재성이나 위대한 예술은 믿지 않지만, 고통은 실재하기에 그것을 뛰어넘는 순간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위대함을 믿는다. 예술은 모든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삶을 선택하는 작가들의, 나의 순진함 속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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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yoi Kusama, Infinity Mirrored Room-Love Forever, 1966/1994. Installation view, YAYOI KUSAMA , Le Consortium, Dijon, France, 2000 Image ⓒ Yayoi Kusama

Yayoi Kusama, Infinity Mirrored Room-Love Forever, 1966/1994. Installation view, YAYOI KUSAMA , Le Consortium, Dijon, France, 2000 Image ⓒ Yayoi Kusama

무한한 저항

정신과 전문의의 시선
by 신동근(마마라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동국대학원 예술치료학과 겸임교수)

섬 전체가 미술관인 일본 나오시마섬의 선착장에 내리면 제일 먼저 동그란 점이 박힌 커다란 빨간색과 노란색의 호박 조형물이 눈에 띈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이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그 기묘한 매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혹자는 야요이의 예술이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고 하고, 혹자는 그의 정신질환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를 보며 그의 트라우마와 정신질환을 추정해볼 수 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야요이는 아버지의 외도로 부부싸움을 자주 겪었다. 어머니는 어린 야요이를 통해 아버지를 감시하게 했고, 아버지의 외도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남근과 결혼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성장한 야요이는 부잣집에 시집가라는 부모의 제안을 뿌리치고 혈혈단신 뉴욕으로 떠나 갖은 노력 끝에 자신의 예술을 발전시키고 성장한다. 그러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도둑맞기 일쑤였고,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밀려나 결국 일본으로 귀국한다. 고국에서도 홀대받던 그는 정신병원에서 지내며 예술을 이어가는데 세상은 점차 그녀를 재발견하며 주목한다.
야요이의 생을 내밀히 접근한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추측해보자면 그는 ‘강박신경증’을 앓고 있었다. ‘강박’이란 머릿속에 침습하는 생각을 말하는데, 그 생각이란 오염, 질서, 숫자, 불확신 같은 것이 있고 그로 인해 청결, 정돈, 숫자 세기, 확인하기 같은 행동이 뒤따르는 정신 병리를 말한다. 그에겐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강박이 있었고, 반복적인 패턴의 그물 무늬와 점은 강박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격적으로는 손상된 자존감을 높이려는 자기애와 타인의 관심을 끄는 연극적 성향이 일부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뺏겼을 때나 예술계의 관심에서 벗어났을 때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는 등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국 일본에 돌아오고 우울증이 극심해져 환각 경험도 하던 당시에는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한 우울증’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정신질환이 있었기 때문에 쿠사마 야요이의 예술이 독창성이 있다는 주장은 그의 뛰어난 천재성 앞에 너무나 초라한 가설일 뿐이다. 그의 창조성에 대해 심리적으로 들여다보자.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를 겪은 야요이는 꽃밭에서 꽃에 의해 압도되는, 즉 자연에 파묻혀 자신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두려움을 심리적으로 ‘파멸의 공포(Fear of Annhilation)’라고 하는데 이런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야요이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는 사물에 집착하며 그림으로 표현한다. 이와 같이 두려움을 느낄 때 그 감정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역공포 반응(counterphobic reaction)’이라 하는데 흔히 두려울 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고소공포가 있는 사람이 암벽등반 같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요이의 역공포 반응은 압도되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그물과 점으로, 남근에 대한 두려움은 남근의자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죽음의 테마로,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대한 두려움은 응시하는 눈의 테마로 이어진다.
쿠사마 야요이의 삶은 기존체제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연속이었다. 그는 미술 대신 예절 교육을 가르치며 순종적인 여인이 되라는 보수적인 집안에 반기를 들었고, 기존 예술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며 세계 미술사 최초로 전시에 거울을 활용하거나 보디 페인팅을 시도했으며 최초의 동성 결혼식을 진행해주기도 했고, 남들이 전쟁에 찬성하며 광분할 때 전쟁에 반대하며 나체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그의 역공포 반응도 기존 공포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었던 것이다.
조현병 환자의 작품을 최초로 분석한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한스 프린츠호른은 예술의 근원으로 ‘장식’ ‘모방’ ‘상징’ ‘놀이’ ‘표현’ ‘정리정돈’ 6가지의 욕구를 들고 있는데 쿠사마 야요이의 인생과 작품을 보니 여기에 한 가지 욕구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도전과 저항 욕구’라는 쿠사마 야요이의 선명한 욕망 말이다.

K at Orez with
mannequin
ⓒ Harrie Verstappen

K at Orez with mannequin ⓒ Harrie Verstappen

K at Orez with mannequin ⓒ Harrie Verstappen

K spraypainting
ⓒ Harrie Verstappen

K spraypainting ⓒ Harrie Verstappen

K spraypainting ⓒ Harrie Verstap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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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sama at Orez ⓒ Harrie Verstappen

Kusama at Orez ⓒ Harrie Verstappen

클리셰에서 벗어난 쿠사마 야요이 보기

큐레이터의 시선 by 김해주(아트선재 부관장)

쿠사마 야요이는 너무나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대중적인 유명세와 더불어 점을 찍어 구성하는 작업의 형태가 각인된 나머지 그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선명한 노란색, 빨간색 호박 형태에 점이 그려진 야외 조형물이 세계 곳곳에 랜드 마크로 놓이며 익숙해진 것도 한몫한다. 한편 실내 설치 작업들은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크기와 중심이 없는 강박적 반복 모티브로 인해 관람자에게 압도적 몰입감을 준다. 야요이가 연출한 영화 <자기소멸>(1968)이란 제목처럼, 보는 이를 그 무한 반복 속에 소멸되어가는 개체로 담근다. 몽환, 영원, 신비를 암시하는 그 작업들은 너무 직관적이어서 부연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들이 조명받기 시작하며 작가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겨우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29년에 태어난 작가는 무려 60년 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라는 이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작년에 보았던 덴마크의 안무가이자 퍼포머 메테 잉바르트센의 퍼포먼스 ‘69 포지션’ 덕분이었다. 이 작업은 전시장처럼 꾸민 무대 위에 관객이 올라 영상과 이미지, 텍스트를 바탕으로 섹슈얼리티와 공적 영역 간의 관계를 질문하는 잉바르트센의 퍼포먼스를 따라가는 형식이었다. 첫 장면은 1960년대 주요 퍼포먼스들부터 시작한다. 영화<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에도 등장하는 작가 캐롤리 슈니먼과 잉바르트센이 주고받은 이메일이 그 출발점이다. 나체 퍼포머들이 날것의 고기들과 뒹구는 제의적 장면을 연출한 캐롤리 슈니먼의 유명한 퍼포먼스 ‘미트 조이’(1964)에 대해 슈니먼은 “이 같은 감각의 제의를 심화시킨 문화적 배경은 끝나지 않는 베트남 전쟁의 잔인성이었습니다. (…) 그러나 당시의 암울한 저류와 괴로움, 불안은 ‘섹스, 러브, 로큰롤’이라는 클리셰로만 남았습니다”라며 당시 작업 배경과 이후의 허탈함에 대해 설명한다. 이어 잉바르트센이 소개한 작업은 월스트리트 주식 시장 앞에서 알몸으로 춤추는 이들의 몸에 땡땡이 무늬를 그리며 “주식은 사기다. 주식을 불태워야 한다. 월스트리트맨을 땡땡이 무늬로 뒤덮어라”를 외쳤던 야요이의 작업 ‘월스트리트에서의 해부학적 폭발’(1968)이었다. 전쟁에 대한 반대이자 신체에 대한 해방으로서 나체 퍼포먼스를 실현한 슈니먼과 그 동료들처럼 야요이도 “이 아름다운 몸들을 왜 전장으로 내몰아야 하는가”라며 알몸 시위를 한 것인데, 특히 주식거래를 전쟁을 동조, 촉발하는 기계라며 저항의 의미로 거래소 앞에 섰던 것이다. 퍼포먼스는 시작 15분 만에 경찰에 저지당한다. 야요이는 이듬해에 이번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모던 미술 무덤에 대한 생각’이라는 선언문을 낭독하며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의 조각 공원에서 알몸 시위를 벌인다.
모마가 살아 있는 작가들보다는 사망한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소개한다는 것에 반발하며 “현대미술관에서 도대체 무엇이 현대적인지 나는 못 찾겠다…. 죽은 전시가 죽은 미술을 소개하는 동안 살아 있는 작가들은 죽어간다”라고 강력히 발언한다. 내가 잘 몰랐던 야요이의 모습이다. 영화<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에서 특히 내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안은 채 1957년 뉴욕으로 혈혈단신으로 떠나 1972년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15년간의 시간이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던 가족과 고향을 떠나 뉴욕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굳건히 서보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성이자 아시아인으로서 가진 이중 제약과 서구의 이국주의적 시선이라는 또 다른 억압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의 중심이었던 당시의 뉴욕에서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행위예술의 자장을 흡수하며, 자신의 작업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정말이지 무던히 애썼다. 성소수자들과 연대하고, 반전운동을 벌이고, 미술관의 보수적인 전시 형태를 비판하는 등 세상의 변화를 바랐던 싸움에 적극적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자기 내부 세계에 대한 강박에만 갇히지 않고, 외부에도 관심을 돌렸다는 측면에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는 야요이의 작업 전반에서 매우 특이한 시기다.
그러나 그 후 야요이는 뉴욕 생활을 접고 15년 만인 1972년 일본으로 돌아온다. 귀국 이유는 보수화되어가는 미국 사회와 미술계에 절망한 탓일 수도 있고, 전위적이고 과격한 작업들을 이어가다 길을 잃어서일 수도 있다. 당대의 유명 남성 예술가들이 각종 제도의 지원을 받아 명성과 기회를 얻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아웃사이더 취급받던 야요이는 결국 일본으로 되돌아왔고, 그녀의 해프닝에 대해 선정적인 보도만 전해진 일본에서 역시 그는 작가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내가 일하는 아트선재센터에서는 2003년 쿠사마 야요이의 한국 첫 개인전이 열렸다. 당시 하루 관람객이 천여 명에 이르러 미술관 앞에 길게 줄을 설 정도였다. 형형색색의 동그라미로 방을 채운 10점의 설치 작품들은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는 쿠사마 야요이의 이름을 한국에 알리는 데도 일조했다.
다시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가 열린다면, 나는 작가의 과거 작업들, 특히 1972년 일본으로 귀국하기 이전의 쿠사마 야요이를 재조명하고 싶다. 화려한 색감과 땡땡이 무늬,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작가로만 설명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클리셰에 다시 그를 가둬놓는 것이 될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의 초기 작업을 돌아보는 것은 한 여성 작가가 그를 둘러싼 사회와 연결되려 노력하지만 여전히 불화하는 고통을 겪으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싸움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이를 통해 현재 작품에서 드러나는 강렬한 원색은 결국 죽음과 두려움의 세계에 대한 콘트라스트로 나오는 강렬한 생의 의지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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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Moore, Photo of Yayoi Kusama with ‘My Flower Bed’ in her NYC studio, c. 1965 ⓒ 2018 Barbara Moore / Licensed by VAGA 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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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with Orgy mag ⓒ Harrie Verstappen

K with Orgy mag ⓒ Harrie Verstap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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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예지
사진 제공 영화 수입배급사 오드(AUD)

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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